사순절 네 번째 주일을 맞이합니다. 기독교적인 피정을 통해 개신교만이 가질 수 있는 영성을 추구하는 절기가 되자고 역설하지만, 그 길이 녹록하지만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다만 마음을 주군께 집중하려는 것에서는 물러서고 싶지 않습니다. 어느 목사가 그러지 않겠나 싶겠지만 저 역시 주일을 앞두고는 긴장합니다. 이제 담임 목회만 35년을 했으면 나름의 여유를 가져도 될 만한 여백이 생겼을 만도 한데 여전히 주일은 긴장감 100%입니다. 아내가 토요일이 되면 주간의 다른 날에 비해 분주해집니다. 부쩍 얼굴에 많아진 남편의 검버섯이 신경이 쓰이는지, 나는 이름도 알지 못하는 팩을 마구 붙입니다. 선택 사항이 아니라 의무 조항입니다. 이렇게 변장은 시작됩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면 팩을 떼고 약 세 가지 정도의 화장품을 얼굴에 마사지하며 투여합니다. 아이 크림도 빼놓지 말고 바르라고 압박하기도 합니다. 얼마 전에는 기미와 검버섯 발생을 완화해 주는 로션 제품을 구매해서 또 다른 변장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교우들 앞에 서는 주일이 되면 회중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 얼굴을 표현해야 한다면 얼굴 톤을 밝게 하는 선크림을 얼굴에 발라줍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어느새 나는 나름의 변장(變裝)과 위장(僞裝)을 하고 교우들 앞에 서 있습니다. 내가 나를 보면서 그 변장과 위장을 통해 나름 젊어져 있는 나를 보며 깜놀(?)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냥 웃지요. 6학년 4반에 입학한 지 이제 3개월 차로 접어들었습니다. 교우들 앞에 염려를 끼치지 말아야 하고 예의를 지키는 목사가 되어야 한다는 아내의 지론 때문에, 나는 토요일이 되면 순한 양이 됩니다. 또 한편, 이렇게 남편을 내조하는 아내의 그 사랑이 너무 감사해 얼굴을 그녀에게 맡깁니다. 이제 몇 년을 더 변장할 수 있을까? 위장할 수 있을까 싶어 그럴 수 있을 때 해야지 하는 마음으로 아내의 마음을 헤아려 얼굴을 맡깁니다. 다만 이 시간 동안 다짐하는 것이 있습니다. 끝까지 내면의 얼굴이 더 아름다운 목사의 삶 살아내기를 결기하는 다짐입니다. 주일 설교를 준비하기 위해 서재에 앉은 예비일 아침, 매일 읽기 위해 잠시의 시선을 고정하는 『나태주, 시간의 쉼표』3월 9일 자 글감이 뭉클하게 합니다. “바위는 부서져 모래가 되는데 사람의 마음은 부서져 무엇이 되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예언자 스가랴의 표현처럼 검게 타나 남은 마른 장작 같은 나를 위해 전 인생을 함께 걸으며 울고 웃고 아파했고 기뻐했던 아내의 손길이 얼마나 컸는지를 실감하는 노년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습니다. 평범하지 않은 남편 때문에 편안한 길을 걷지 못하고 온 마음 부숴 힘들고 지난한 길을 35년째 걸었고 또 걷고 있는 아내에게 나 또한 남은 내 생의 마음을 부숴보려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변장과 위장을 해주려는 아내에게 얼굴을 들이미는 시간은 젊어지기 위해 변장과 위장을 위한 시간이 아니라 ‘에제르 크네그도’(배필인 돕는 자)의 부합했던 동역자에게 사랑한다는 확신의 아딧줄을 잡는 행복하기 그지없는 시간입니다. 설교 준비를 시작하기에 앞서 감상하기 위해 틀어놓은 서재 턴테이블을 통해 울려 퍼지는 Kenny G의 “Don’t make me wait for me.”의 색소폰 소리가 천상의 운율처럼 들리는 아침입니다. 아, 그래도 검버섯은 여전합니다. 6학년 4반의 검버섯이 어디 가겠습니까? (ㅎㅎ)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