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협의 목회'와 '눈높이 목회' '人人人人人'
'사람이면 다 사람인가 사람이 사람다워야 사람이지.' 어느 목사님께서 목회를 하는 후배 목사에게 편지한 내용 속에 들어 있는 글이라고 하는 내용을 책에서 읽은 적이 있습니다. 저는 이 글을 기억할 때마다 이렇게 채찍질을 했습니다. '목사면 다 목사인가 목사가 목사다워야 목사이지.' 목양의 현장에서 목회를 한지가 어언 23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스가랴 선지자가 말했던 것처럼 타나 남은 마른 장작과도 같은 종의 보잘 것 없음과 연약함을 알고 계신 주님께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주님이외의 것과는 타협하지 않음'의 심정으로 달려온 종의 고집을 그런대로 예쁘게 보시고 여기까지 이끌어주셨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지난 겨울, 이 맘 때 지금의 날씨만큼이나 추운 겨울을 보냈습니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인생의 회오리 속에서 엄동설한의 추위를 겪어 냈습니다. 아마도 그 추위를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우리 세인지체들이 종의 융통성 없이 고집한 목회적 철학을 인정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교권과는 타협하지 않겠다는 고집, 정치적인 헤게모니 싸움과는 결별하겠다는 고집, 대접을 받는 높은 자리를 차지하겠다는 것에 목숨을 건 구태와는 교제하지 않겠다는 고집, 느리지만 하나님의 식을 택하겠다는 영적인 자존심을 우리 교우들이 인정해주었기에 여기까지 달려왔다고 저는 자위하고 있습니다. 이제 불과 열흘 남짓이 되면 종은 나이가 오십이라는 반열에 서게 됩니다. 지천명의 나이에 들어서게 된다는 말이지요. '知天命' 이란 '하늘의 이치에 순종한다.'는 의미의 뜻인데 이제 한 해를 마감하면서 현장에서 목회를 하는 목사로서 솔직한 영적 딜레마가 있습니다. 종이 고민하는 영적 딜레마는 목회적 고집이 외롭다는 딜레마입니다. 지난 주 친한 친구 목사들과 만남을 가졌습니다. 그 중에 저를 아주 많이 이해하는 친구 목사가 항상 저에게 권면해 준 것이 있습니다. '눈높이 목회'를 하라는 것입니다. 정말로 친구 목사는 섬기는 교회에서 눈높이 목회를 통하여 교회를 아름답게 목회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친구 목사의 신학적인 색깔이나 목양적 방법론이 저하고는 똑같을 수는 없고 또 어느 부분은 인정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친구목사를 통하여 배우는 여러 가지의 도움 중에 하나가 말 그대로 '눈높이 사역'입니다. 조금 더 젊었을 때 '나는 타협하지 않아'라고 고집을 피웠는데 이제 지천명의 나이가 들어가면서 친구의 목회가 '타협의 목회'가 아니라 '눈높이 목회'로 보이는 아이러니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친구에게 배울 점이 많이 있습니다. 이제 세인교회가 개척된 지 1년이라는 세월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습니다. 교회를 개척한 목사로서 당연한 일이겠지만 지난 1년이라는 시간, 정말로 '바른 교회, 바른 부흥' 의 초석을 세우기 위해 한 가지에 집중하며 달려왔습니다. 이런 이유로 하나님은 우리 세인교회를 빠르게 안정시키셨고 또 세워오셨습니다. 2009년이라는 시간은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는 이 때 종의 목양적인 패러다임을 토마스 쿤(Thomas Samuel Khun)이 말한 대로 '패러다임 쉬프트'(Paradigm Shift)를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도전에 직면해 있습니다. '타협의 목회와 눈높이 목회' 세인지체들의 중보를 부탁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