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횟수가 늘고 글쓰기 훈련으로 성장할 수 있는 것일까요? 오늘 교수님 글을 읽으며 이전 품고 있었던 희미해진 소망들이 다시 소환되며 머리와 가슴에 찬물을 맞은 것 같았습니다.”
그의 글을 읽고 뭔가를 나누어야겠다는 생각에 제자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통화 중, 제자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옛 선생으로 격려가 필요할 것 같아 한 마디를 던졌습니다.
“전도사님, 너무 잘 하려고 하지 마세요. 그냥 지금의 상태에서 최선을 다하면 돼요. 그러다보면 시간이 지나면서 독서의 내공으로 인해 좋아질 거예요. 이것을 위해 다만 두 가지는 계속하기를 바랄게요.”
그리고 요구한 게 글 읽기와 글쓰기였습니다. 격려 차, 전화를 했는데 결국 이야기가 또 훈계가 된 것 같아 미안했습니다. 전화를 끊고 다시금 나도 나를 돌아보았습니다. 어떻게 지난 세월을 지나왔는지를. 지난 세월 동안 두 가지는 부침했던 것 같아 내심 자위했습니다. 끊임없이 책과 노는 것, 더불어 독서 이후의 아주 짧은 리뷰 쓰기를 중단하지 않은 것입니다. 진보적인 여류 작가 레베카 솔닛이 본인의 역작인 『멀고도 가까운』에서 남긴 이 문장에 전율했던 기억이 또렷합니다.
“글쓰기는 누구에게도 할 수 없는 말을 아무에게도 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모두에게 하는 행위다.”(솔닛, “멀고도 가까운 읽기, 쓰기, 고독, 연대에 관하여”, 반비, 2017,p,100.)
이렇게 멋진 일을 포기해서야 되겠는가 싶어 나는 오늘도 글을 쓰고 있습니다. 하지만 글 읽기가 동반되지 않는 글쓰기는 어불성설인 것을 알기에 또한 독서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몇 주 전에 교제했던 김기석 목사님께서 아주 자연스럽게 2023년을 시작한 1월에 너무 재미있게 선택했던 책읽기를 뒤돌아보니 11권 독서를 마치게 되었다는 소박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김 목사님의 이야기에서 제가 주목한 것은 독서의 양(量)이 아니었습니다. 재미있었다는 소회였습니다. 저의 블로그 이웃 중에 ‘쭈니허니맘’이란 닉네임으로 활동하는 블로거가 있습니다. 그녀의 블로그 콘텐츠에 가끔 방문하여 들춰보는 글을 대하다보면 ‘넘사벽’입니다. 2월 14일에 올린 그녀의 대문에 있는 글입니다.
“2020년부터 743권/2023년 12권 째/(신앙성장, 자아성찰) ‘모든 것의 가장자리에서’ (파카 파머, 글 항아리, 2018”
저 역시, 참 가슴 따뜻한 감동을 선물 받았던 파커 파머의 글이기에 더욱 연대감이 느껴졌던 블로그 이웃에게서 정말 많은 도전을 받습니다. 주변에는 이렇게 치열하게 글을 읽고, 글을 쓰는 이웃들이 있습니다. 이들을 통해 건질 수 있는 이삭줍기만 해도 너무 엄청나고 행복합니다. 목양터의 이야기 마당 쓰기, 성서일과를 통한 짧은 글쓰기, 글 읽기 이후 나눌 건더기를 주워 담는 북 리뷰 쓰기, 내 평생의 삶인 설교 원고 작성하기, 그리고 가끔 글을 요청하는 신문사와 출판사에 보낼 원고 쓰기가 부담이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 일을 계속하는 것은 나를 진보하게 만드는 너무 행복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3월에는 시인 이성복과 치열하게 만날 예정입니다. 친구가 언젠가 제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 목사, 북 리뷰에 시가 많이 안 보여 옥에 티야!” 마음에 새겼습니다. 3월은 시를 읽는 달이라, 조금 더 분발해 보려 합니다. 가뜩이나 할 게 많은 데 지난주에 차준희 교수가 숙제 하나를 더 주었습니다. ‘취리히 성경전서 독파하기’ 숙제입니다. 느슨해 질 때 즈음이면 항상 부담을 안기며 항상 공부하게 해주는 친구라 감사하기 그지없습니다. 이제 봄이 분명 머지않은 것 같습니다. 꽃샘추위야 하겠지만 봄을 생각하면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또 한 주, 그냥 걷던 걸음 잘 걸어보려 합니다. 맡겨진 글을 쓰고 책과 놀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