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 “목사님, 10분 내로 도착할 예정이구요, 목사님 폰으로 전화 드리라 했어요. 더우실 텐데 잠시라도 시원하시기를 바래요.” 금요일, 히브리서 10장 본문과 치열하게 씨름하고 있어 머리가 터질 것 같은 오후, 지체에게 온 문자입니다. 문자가 도착한 오후 2시 30분, 휴대폰 바탕 화면에 뜬 온도는 섭씨 31도를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왠지 모르게 아직은 에어컨을 틀면 안 된다는 강박 때문에 선풍기 두 대를 가동했는데도 설교 준비하기가 숨이 차오를 정도로 더위에 힘든 상태였는데 문자를 받은 것입니다. 관내에 소재한 ‘설빙’에서 배송된 망고 빙수 세트를 지체가 보낸 시간이 바로 그 시간이었습니다. 포장을 뜯는데 속에서 올라오는 짠 한 감사가 밀려왔습니다. 빙수를 보낸 지체도 지금 시간이면 직장에서 아이들을 케어(care) 하기 위해 정성을 다하며 땀을 흘릴 시간인데, 마음 한편으로 목회자를 생각하는 따뜻함과 사랑이 전해져 지체가 보낸 빙수는 빙수가 아닌 큰 사랑으로 자리매김하는 소확행으로 다가왔습니다, 목회를 하다보면 기도케 하는 신자들로 인해 적지 않은 고통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말 그대로 현대판 엘리압들입니다. 하지만 기도케 하는 신자보다 기도해 주는 동역자들이 더 많아 목회라는 영적 정글에서의 사역을 목사는 은혜로 감당할 수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지난 주간, 나태주 시인의 시어 하나를 붙들었습니다. “예쁘면 얼마나 예쁘겠나/때론 나도 예쁘지 않은데/좋으면 얼마나 좋겠나/때로 나도 좋지 않은데/그만큼 예쁘면 됐지/그만큼 좋으면 됐지/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나태주, “너무 잘 하려고 애쓰지 마라”, 열림원, 114.) 지난 6개월을 뒤돌아보았습니다. 세인 공동체의 지체들 중에도 기도케 하는 신자가 없는 것이 아니고, 나를 도저히 일어날 힘이 없게 그로기 상태로 몰아넣는 야속한 신자가 없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이렇게 아직은 목양 현장에서 행복한 목사로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예쁜 성도, 그만큼 좋은 동역자들이 내 옆에 있었기 때문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저녁 식사를 샐러드로 식단을 바꾼 것을 안 지체가 집에서 재배한 오이, 상추를 비롯한 야채 꾸러미를 보내주었습니다. 더운 여름에 조금이라도 갈증을 없애라고 식혜도 전해준 지체가 있습니다. 편두통으로 인해 행여나 새벽 예배를 지키지 못한 날이면, 간절히 중보 하는 메시지를 보내주는 고마운 교우도 있습니다. 직장에서 만든 된장찌개가 너무 맛있어서 담임목사가 좋아하는 것을 알고 택시를 타고 사택으로 가지고 온 지체의 따뜻한 사랑도 얼마 전 받았습니다. 타 교회 교우인데 이석증으로 힘들어하는 것을 알고 이석증에 도움이 되는 병원용 높낮이 침대를 구입하라고 한사코 거절했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강제적으로 물질을 보내준 동역자도 있습니다. 부산에 거주하는 권사님이 몇 주 전, 제천 여행 차 교회에 들려 예배로 교제했는데 돌아가면서 가진 것이 너무 없어 드릴 게 너무 없다고 눈물지으신 것을 보면서 울컥했습니다. 어떻게 사랑의 빚을 지고 있으며, 기도해 주는 교우들의 그 사랑을 일일이 열거할 수 있겠습니까? 맥추감사주일을 맞이하여 교우들이 상반기 받은 감사의 내용들을 두 가지씩 보내라고 해서 받은 내용들을 읽으며, 한 번 더 다짐했습니다. 하반기에는 교우들이 경험하는 소확행이 배(倍)는 더하도록 강단에서 엎드릴 것을. 세인 공동체에 속해 있는 지체들과 부족한 종을 위해 중보 해주는 사랑하는 이들 모두가, 예기치 않은 엄청난 보물을 얻는 대박은 아니더라도 날마다 소확행을 체감하고 느낄 수 있는 하반기가 되기를 화살기도 해 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