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도문을 틀린 건 처음이네요.
드립 커피를 한 잔 내려서 먹었습니다. 왠지 그래야 숨을 쉴 것 같아서. 친구가 사경을 헤매고 있는 소식을 실시간으로 전달받으며 숨이 턱턱 막히는 호흡에 장애가 있어서 정신이라도 바짝 차리기 위해 카페인의 도움을 받고 싶었습니다. 친구는 서울의 봄이 무참히 짓밟히고 있었던 암울의 시기에 선지동산에 올라와 예언자적인 소명을 감당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미래에 주께서 맡기신 목양의 현장에서 주의 종으로 평생을 헌신하고 섬기기 위해 푸르고 푸른 꿈을 꾸었습니다. 목양을 핑계로 동기회에 나가지 않았던 저는 친구를 졸업한 후에 한참을 지나서야 다시 만났습니다. 다시 동기회에 나온 저를 누구보다도 서먹하지 않게 따뜻하게 맞아준 친구, 어쩔 수 없이 교단을 떠나야 했던 저를 가슴으로 아파하며 안타까워 했던 친구, 시간이 나면 언제나 건강과 안부를 묻던 친구가 지금 삶의 마지막 부분에 도달하여 숨을 가쁘게 쉬고 있습니다. 기십 년 전, 발병한 혈액 암으로 인해 힘차게 사역하려던 꿈을 꺾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군께서 위탁해 주신 작은 목장을 섬김의 사역지로 삼고 잘 감당해 온 친구를 늘 응원했습니다. 입퇴원을 반복하는 지난한 투병 생활이었지만 잘 버텨온 친구가 자랑스럽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코로나 확진 이후, 후유증으로 다시 입원할 수밖에 없었던 친구의 입원이 이번에는 마지막이 될 수 있다는 동기들의 단체 톡에 올라오는 글을 읽으면서 심통(心痛)이 밀려와 주일을 준비하는 제 마음이 가리산지리산 하고 있습니다. 친구가 위급한 상태로 입원했다는 소식을 들은 날, 친구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울음 섞인 떨리는 목소리로 남편의 상황을 알려주던 사모가 참았던 울음을 터트렸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위로가 무엇인지 갈피를 잡지 못했지만 직업의식(?)이 발동하여 친구 아내를 위해 전심으로 간절히 기도해 주었습니다. 혼자 있는 줄 알고 기도했는데, 스피커폰으로 친구가 같이 기도를 받고 있었습니다. 기도가 끝나자 폰 너머로 작은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 목사, 나 괜찮아. 기도해 줘서 너무 고맙다. 힘내볼 게.” 친구의 목소리를 듣고 나니 어쩔 수 없이 나 또한 참았던 울음을 터트렸습니다. 산소 포화도가 급격히 낮아지고 있는 친구, 이제 시간이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 친구가 오늘 산소 호흡기를 낀 채 창백한 웃픈 얼굴을 찍어 제게 보내주었습니다. 사랑했던 친구가 제게 보내준 사진을 보니,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친구야, 그 동안 너무 고마웠다. 이게 네게 보여주는 마지막 모습일 거야.” 친구가 생명 연장을 위한 일체의 연명 치료를 거부했다고 합니다. 작은 공동체이지만 너무 사랑했던 교회 공동체에 대한 사후 일에 대해서 나름 정리하는 작업도 이미 마쳤다고 합니다. 너무 힘들어 보이는 친구의 사진을 보면서, 하나님께 이렇게 ‘하가’했습니다. “하나님, 이제는 그만 친구를 안아 주세요. 더 이상 힘들지 않게!” 새벽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들어가니 아내가 핀잔을 줍니다. “아니 벌써 주기도문을 틀리게 암송하면 어떻게 해요. 정신 차려요. 정신!” 머리가 텅 비어 있는 것 같습니다. 주일이 내일인데. (ㅠ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