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 데우스 시대에 호모 사케르인 나를 보다 재독학자 한병철이 말했습니다. “21세기의 사회는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 변모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사회의 주민도 더 이상 ‘복종적 주체’가 아니라 ‘성과주체’라고 불린다.” (한병철, “피로사회”, 문학과 지성사,23) 그의 갈파를 접했을 때의 첫 번째 느꼈던 소회는 씁쓸함이었습니다. ‘호머 사케르’(Homo Sacer)라는 말이 있습니다. 조르조 아감벤이 인간을 학명으로 정의한 단어인데 풀이하면 ‘신의 명령을 위반하여 공동체에서 추방당한 자’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21세기를 가리켜 ‘포스트모던의 시대’라고 말하는 학자들은 소멸되었습니다. 근자에 21세기를 가장 많이 지칭하는 단어는 ‘포스트휴먼의 시대’입니다. 이 시대의 특징 중에 특징은 유발 하라리가 주창한 ‘호모 데우스’입니다. 종합하자면 21세기를 성과사회라고 한병철은 지적했고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인다면 인간은 성과의 주체라는 자리까지 등극했기에 호모 사케르의 비극적 모드에서 호모 데우스의 반열에 올라왔다는 해석을 가능하게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 하나, 인간은 완벽한 주체가 되어야 하는데 왜 시간이 가면 갈수록 인간은 더 피폐하고 추악한 존재가 되는 것일까? 왜 인간은 더 피로한 사회에서 잉여 인간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일까? 종교적 관점에서 볼 때 왜 인간은 더 사악해 지는 것일까? 답해야 합니다. 나는 목사로 살고 있습니다. 근래 치열하게 싸우려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좋아요’의 유혹과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알고리즘에 낚이지 않기’입니다. 말장난이 아니라 이 싸움은 적어도 내게는 3차 세계대전을 방불하게 하는 영적 전투입니다. ‘좋아요’에 민감하고, 찰나적 만족의 장으로 이끄는 알고리즘으로 편입이 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어 하는 나를 포함한 현대인은 누구일까? 그러다가 불연 듯 소름끼치는 오싹함에 부들부들 떱니다. 왜? 너는 호모-데우스 시대의주역이라고 압박하고 있는 그 무언가로부터의 몰아침 때문에 진짜로 나는 호모 사케르가 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무시무시한 두려움 때문입니다. 성과를 오늘 안에 내지 않으면 마치 무저갱의 나락을 떨어지는 것처럼 호들갑을 떠는 ‘나’는 은희경이 ‘새의 선물’에서 지적했던 ‘보여 지는 나’를 포기하지 못해서는 아닐까 싶습니다. 이런 쳇바퀴 속에서 맴도는 ‘나’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피로사회의 주인공으로 발탁되는 비극의 스토리텔러인 것이 아닐까 싶어 무섭습니다. 어제 말씀을 묵상하다가 야곱이 바로에게 토로했던 말이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아니면 치열한 전쟁의 복판에 있어선지 크게 들어왔습니다. “야곱이 바로에게 아뢰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창 47:9) 지난 주간, 포스트모던의 한 복판에서 호모 데우스가 되라는 무언의 압박을 받았습니다. 호모 사케르인 나를 절감하는 시간을 경험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얼마나 작은 존재인가를 뼈저리게 경험했습니다. 나의 남은 삶의 나날에 나는 피로사회의 주체로 살고 싶지 않기에 철저히 주의 노예로 살고자 합니다. 그것만이 험악한 세월을 견디는 방법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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