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하나님이 신학이 필요하신 것이 아니다. 신학은 인간에게 필요한 것이다. 이거 누가 한 말이에요? 설교에선가 들은 것 같은데 아브라함 조슈아 헤셀인가요?” 월요일에 아내와 외출해서 돌아오는 길에 아들에게 받은 카톡 문자다. 왜 그러는데? “내일 수업 시간에 불트만하고 포이에르바흐 발제를 맡았는데 프리젠테이션 할 때 삽입하려고요.” 불트만하고 포이에르바흐를 발표하는 데 이 인용구가 왜 필요한데? “내일 발표하는 소논문 논지가 소위 말하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을 바라본 복음주의권의 오해를 지적하고 그들이 제시했던 신학의 건더기들이 무조건적인 비판의 대상이 아니라 그들이 말하고자 했던 신학 하는 자의 삶의 정황, 배경, 그리고 비평적 사유함에 따른 것임을 주장해 보려고 하는데 ‘하나님이 신학이 필요하신 것이 아니다. 신학은 인간에게 필요한 것이다.’라는 어록이 전개하는데 좋은 인트로가 될 것 같아서요.” 라고 답했다. 이야기를 듣고 몇 주 전, DPA 강의 소논문을 준비할 때 소개한 미로슬라브 볼프의 이야기임을 알려주었다. “신학이 다루는 문제는 오직 한 가지, 즉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것은 단순하지만 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한 신학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존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뇌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소망이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위한 신학자이기는 해도, 하나님의 유익을 위한 신학자는 아닙니다. 하나님은 신학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신학이 필요한 존재는 바로 인간입니다. 세상의 생명을 위한 참된 삶을 위한 신학자들이 되십시다.”( 매슈 크로스문, 미로슬라브 볼프공저, “세상에 생명을 주는 신학”,IVP, 2020,p,230.) 아들에게 답을 하면서 전화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아들에게 자문했다. “아들, 신학 하는 자의 태도는 비평적 성찰이다. 특히 TH.M 과정은 학술 박사 과정으로 가는 프로세스이기에 더 더욱 그래야 한다. 하지만 아빠가 노파심으로 말하는데 진보적인 신학을 하는 자가 보수적인 신학을 하는 자를 업신여기는 태도나. 반대로 보수적인 신학의 정서에 길들여져 있는 자들이 진보적인 신학 하는 자들을 자유주의적인 자라고 매도하는 태도 두 가지를 다 경계해야 한다. 두 가지의 경우 모두가 학문적 교만함이 그 기저에 있기 때문이다.” 아들이 에비의 말을 알아들었을 것이라고 믿고 당부한 뒤에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었더니 아내가 옆에서 한 마디 한다. “아들은 좋겠어요. 그래도 말이 통하는 아빠가 옆에 있어서.” 생각해 보니 감사한 일이다. 에비의 말을 아직은 경청해 주는 걸 보니. 매번 하는 기도이지만 전화를 끊고 서재로 옮긴 뒤 잠시 아들을 위해 화살기도를 했다. “주님, 아들이 성령의 기름부음이 있는 지성적 사역자가 되게 하옵소서!” 아들의 영적 분투를 애비가 응원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