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떼’가 사라지는 재앙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엘리위젤의 고전과도 같은 책 ‘팔티엘의 비망록’ (원제: The Testament)을 보면 아들 그리샤가 아버지 팔티엘 거쇼노비치에게 어려서 배운 일을 독백하는 내용이 나온다.
“나는 그들에게서(공산주의자들) 볼세비즘, 멘세비즘, 사회주의, 무정부주의란 세 단어를 배웠습니다. 나는 아버지에게 ‘주의(_ism)’라는 것이 정확하게 무엇이냐고 여쭈어 보았습니다. 그러자 아버지께서 이렇게 답해 주셨습니다. 그건 혼인할 준비를 하고 있는 변덕스러운 여자 같은 거란다. 앞의 단어에 따라가는 거야”(엘리 위젤, “팔티엘의 비망록”, 주우,63.)
이 글이 준 감동이 커서 내 첫 번째 출간 도서에 인용할 정도로 그 새김은 아직도 꿈틀거린다. 엘리 위젤이 소개한 단문은 전율할 만한 기막힌 통찰이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이데올로기가 아니라는 점에서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래서 그런가보다. 권위주의(Authoritarianism)가 시대착오적인 발상이기에 마땅히 청산되어야 할 구시대적 유물의 톱 랭크에 올라간 이유가. 단 1%의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런데 말이다. 몹시 헷갈리는 것이 있다. ‘권위’(Lordship)도 청산되어야 하는가의 제문제(諸問題) 말이다. ‘권위’라는 영어단어가 ‘authority'임을 모르는 바보이기에 이 단어를 ’Lordship' 으로 번역했다고 공격하지는 마시라. ‘의미논제’ 라는 말을 아는가? 가볍게 해석하지 않기를. 근래 목사에 대한 평가는 바닥이다. 여론이든, 세간이든, 심지어 교회라는 공동체 안에서도 목사는 무차별적인 샌드백 신세가 되고 말았다. 항변의 여백이라고는 1도 보이지 않는다. 더 참담한 것은 호전될 가능성이 0%라는 점이다. 많은 사람들이 목사에게 이렇게 거세게 몰아붙인다. 자업자득, 사필귀정 등등의 용어를 동원하여 난도질을 서슴없이 자행한다. 당해야지 뭐 어쩌겠나 싶지만, 아주 가끔은 피가 거꾸로 솟는 악몽을 꾼다. 해서 목사 로브를 벗는 상상을 하루에도 수 십 번 씩 한다. 아주 오랜 옛날, 시골마을마다 호랑이 같은 훈장 역할을 하는 어른이 계셨다. 후레자식이 한 둘 정도는 으레 있었던 그 마을이 그래도 버릇없이 굴러가지 않고, 나름의 질서를 갖고 마을의 가치를 생성해 나갈 수 있었던 이유는 어른의 권위를 대우하고 인정하는 미학적 예의가 있었기 때문이다. 조심스럽지만 말해본다. 적어도 바른 신학을 토대로, 바른 신학적 성찰을 하며, 시대의 엇나감과 비상식화와 맞서 싸우려는 목사들이 힘들지만 버티려는 권위는 한 줌의 재도 안 되는 알량한 권위주의가 아니다. 이들이 버텨내는 힘은 주님을 주님으로 인정하려는 권위 즉 로드십을 붙들고 있기 때문이다. 목사가 한 말을 ‘라떼’의 설교로 싸잡아 공격하는 오늘, 무슨 희망이 있을까 되뇌면 절망스럽다. 로드십의 권위를 시장판에 널려 있는 돌멩이로 여겨 발로 차버리는 것에 열광하고, 달라스 윌라드 박사의 말대로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이 성경적 권위보다 더 높은 위치를 선점한 작금은 하나님이 꿈꾸시는 나라에 조종이 울린 것 같아 못내 쓰리고 쓰리다. 지난 주간, 사순절 탄소 금식을 앞두고 아내와 함께 일탈했다. 서재에서 내가 내려주는 커피보다 S사에서 내려준 카페 라떼를 사먹었으니 말이다. 음, S사의 라떼 별로다. 그래서 내게는 적어도 금식의 대상이다. 하지만 나는 오늘도 ‘라떼’을 말해주는 어른이 없어 서글퍼진다. 그만큼 이제 내가 늙었나 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