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힌네니’ “질문하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질문의 대상이신 주님을 찾아 나서기 때문입니다. 응답하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감사를 알고 찬양하는 존재로 변화되기 때문입니다. 실천하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성령 안에서 거듭난 지성과 의지와 감성이 필요함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앎을 추구하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반-지성주의라는 치욕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철학자로 귀한 사역을 감당하고 있는 강영안 교수가 쓴 ‘믿는다는 것’에 대한 총평입니다. 책에서 네 가지의 화두를 던진 그의 이 글을 보다가 아주 진한 자국이 남았습니다. 그가 소개한 창세기 22:11절의 담화를 나누어보겠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네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으로 데리고 가서 번제로 드리라는 청천벽력의 명령을 받은 아브라함이 그대로 순종하여 아들을 묶은 뒤에 제단에서 칼로 내리치려고 할 때, 대단히 급한 어조로 여호와의 사자가 아브라함의 행위를 멈추게 하려고 아브라함을 부릅니다. 바로 그 순간, 그가 대답한 말이 바로 이것입니다. ‘힌네니’ 직역하면 ‘나를 보십시오.’이고, 의역하면 ‘내가 여기 있나이다.’입니다. 강 교수는 아브라함의 이 대답을 소개하면서 너무 중요한 메시지를 글말로 내놓습니다. “아브라함이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부름에 반응할 때, 그곳에는 더 이상 자신은 없었습니다. 자기주장은 없고 오직 하나님만 중심에 서 있었습니다.”(강영안, “믿는다는 것”, 복 있는 사람, p,102.) 글을 읽다가 왠지 모를 격정이 제게도 임했습니다. 100% 동의했기 때문입니다. 100세에 얻은 아들을 죽이기로 결심한 아버지에게 무슨 자아가 존재하고, 무슨 자기주장이라는 자존심이 존재했겠습니까? 남아 있는 것은 단 하나, 하나님이라는 존재의 실체였습니다. 책에서 강 교수는 글로 필설하지는 않았지만 독자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이게 믿음이다. 또 하나, 그의 글을 읽다가 강한 음성으로 저를 강타한 내용이 있었습니다. 나는 ‘힌네니’라고 담대히 말할 수 있는 믿음이 있는가! ‘나를 보십시오.’라고 말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힌네니’의 아브라함은 가장 아름답게 응답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이 글을 만나고 나서 주 후반 내내 내 이성과 감성과 의지 속에서 ‘힌네니’가 소용돌이쳤습니다, 우리 교회 주차장에는 ‘하나님 앞에서’ 라는 스탠딩 기도처가 있습니다. 힌네니를 만난 날, 저녁 시간에 서치라이트로 비쳐지고 있는 ‘코람데오’ 앞으로 나갔습니다. 고개를 숙이고 이렇게 하가(읊조림)했습니다. “하나님, ‘코람데오’의 믿음으로 살아가는 자만이 ‘힌네니’를 고백할 수 있음을 깨닫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언제나, 항상, 늘 코람데오의 신실한 믿음으로 서서 ‘힌네니’를 고백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11,000원의 가격을 주고 산 책 한권에서 그 돈으로 가히 계산할 수 없는(countless) 엄청난 가치의 은혜 안에 머물렀던 한 주를 보냈습니다. 하나님께 너무도 감사하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