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맑은 목사가 되고 싶습니다.
원주를 다녀왔습니다. 매년 절기 때마다 다녀오는 연례적인 행위 중에 하나는 도매로 꽃을 파는 원주 화원에 들려 절기 강단 꽃꽂이용 꽃을 사가지고 오는 일입니다. 금요일, 추수감사주일을 맞아 역시 아내와 함께 다녀왔습니다. 여타 다른 목회자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저는 강단에 꽃꽂이를 목숨 걸고 하는 목회의 마인드를 갖고 있지 않아서 지체들 중에 이 일에 관심을 갖고 사역을 돕는 자가 있으면 있는 대로 족하지만, 이 일에 별 관심들이 없으면 또 없는 대로 강단 꽃꽂이가 없어도 별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습니다. 허나 아내의 마음은 조금 달라 매년 그래도 절기만큼은 정성을 보이는 것이 좋다는 논리이기에 아내의 사역을 돕기 위해 원주에 다녀온 것입니다. 조금 뒤로 물러서 생각해 보면 아내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주일을 준비하는 성도들의 마음 자체가 아름다워야 하는 것이 중요하지, 강단 꽃꽂이를 통하여 외형적인 아름다움을 연출하는 것이 뭐 그리 중요할까 하는 고루한 생각이 저의 머릿속에 있기에 이런 박물관적인 목회관을 나름 반성할 때가 요 근래 많아졌습니다. 정말로 하나님이 귀히 보시는 아름다움은 무엇일까? 김기석 목사가 쓴 ‘죽음을 넘어 부활을 살다’를 보면 이런 글이 담겨 있습니다. “가슴속이 바르면 눈동자가 맑다고 합니다. 벚나무가 봄바람을 만나 꽃을 피웠습니다. 꽃이 활짝 피자 그 아래를 걷는 이들의 표정도 밝아졌습니다.” (두란노,2018,p,196) 눈동자가 맑은 사람의 특징은 가슴속이 바른 사람이라는 말에 흠칫했습니다. 경우에 따라 심드렁하게 살아가고 있는 ‘나’이기에 뭔가 들킨 것 같아 부끄러웠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지인 목사님이 사역하는 타 교회 예식이 있어 권면을 부탁받았을 때, 그 만한 말을 할 만한 위치에 있지 않다는 것을 빌미로 고사했는데 워낙 강하게 요구하는 터라 내키지 않는 순서를 맡은 적이 있었습니다. 많이 고민한 끝에 김수영님의 ‘풀’을 읊조리는 것으로 순서를 대치했습니다. 참 힘든 장애우 사역을 시작한 지인 목사님이 사역을 하면서 경우에 따라 힘에 부칠 때가 있을 것을 알기에 그때마다 좌절하지 말고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고,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는 풀’과 같은 사역자가 되어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식은땀 나게 권면을 전한 적이 있었습니다. 예식을 마치고 교제하는 시간, 그 자리에 참석한 한 장로님이 이렇게 립 서비스를 해 주었습니다. “눈이 참 맑은 권면을 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후 내내 마음을 훑으면서 목회 현장에서 긴장했던 일은 나는 눈이 맑은 목사로 살고 있는가에 대한 자답의 삶이었습니다. 화려한 교회당, 화려한 성도의 숫자, 화려한 일 년 재정의 풍요로움, 날마다 쌓이는 화려한 이력의 내역을 보면서 흐뭇한 미소를 띠는 눈먼 목회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를 또 돌아보는 계절이 왔습니다. 적어도 눈이 맑은 목사가 되고 싶습니다. 벚나무가 봄바람을 맞아 꽃을 피운 것 같이 그렇게 아름다운 목회를 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의 마음도 함께 아름다움으로 설레게 하는 목회를 하고 싶습니다. 아빌라 테레사가 이렇게 말했답니다. “주님이 당신의 임재에 대한 의식을 거두어가시면, 외로움에 빠진 그 영혼은 어떻게 해서든 그분을 돌이키려고 온갖 수고를 다하지만 이런 노력은 거의 쓸모가 없다.” (아빌라 테레사, “내면의 성”, 요단,p,274.)
정말로 주님의 임재를 놓치지 않는 눈이 맑은 목사가 되고 싶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