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교회에서 수련회를 할 때, 은혜 받은 이야기를 글로 쓰라면 시리즈로 엮어도 괜찮을 만큼 거리가 풍성하다. 친구들이 방언의 은사를 받고 기뻐하던 일, 신유의 능력으로 치료함을 받고 감격의 눈물을 흘리던 일, 소위 말하는 입신(入神: 내가 만든 단어가 아니라 당시 목회자들이 만든 단어)을 경험하고 깨어난 아이들, 거듭났다고 들떠 눈물, 콧물을 범벅으로 쏟던 선후배들이 슬라이드처럼 지나간다. 그러니까, 그때가 80년이었다. 전인격적으로 내 심령을 주군께서 헤집어 놓지 않은 때라 그들의 간증이 난 다른 나라의 언어들이었고, 조금 부정적으로 심하게 말하면 종교적 열광주의라고 비난하던 때였다. 그래서 중고등부학교와 평신도 청년 시절에 난 언제나 수련회에 가면 요주의의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마른 장작 나무 같은 나에게도 수련회라는 행사를 만날 때마다 기억의 언저리에 생생하게 남아 있는 아름다운 추억이 있다. 매년 수련회가 열리면 그 자리에 언제나 발품을 하셨던 고향교회 권사님들과 집사님의 섬김의 자국이다. 지금처럼 에어컨 시스템이라는 것은 감히 상상할 수 없었던 그 시절, 삼복더위의 푹푹 찌는 불가마 같은 현장에서 100여명 정도가 되는 학생들의 식사를 섬기기 위해 그 고된 식사 봉사자로 자원하여 섬겼던 권사님들의 얼굴이 지금도 선명하다. 흐릿한 기억으로 봉사자가 너무 많아 순서에 따라 각 기관 수련회에 봉사자로 나누는 것도 일이었다고 농을 던지던 당시 담임목사님의 행복한 불평도 언뜻 기억에 있다. 봉사자들이 섬겨 주던 카레라이스는 당시 먹을 것이 풍족하지 않았던 시절, 최고의 맛이었다. 살코기보다 비계가 더 많은 돼지고기를 듬성듬성 썰어 넣고 만든 100인 분 정도의 김치찌개는 지금 내가 김치찌개를 가장 좋아하는 음식으로 만들어준 동기가 되었다. 그렇게 대단한 찬거리라고 지금 생각해도 인정할 수 없는 것들이었지만 봉사하기 위해 오셔서 학생들과 청년들을 위해 만들어 놓은 음식들은 천국의 향연에서나 맛볼 수 있는 최고의 맛으로 기억한다. 어디 이뿐인가? 식사 봉사를 마치고나면 집회 시간에 맨 뒷좌석에 앉아 교회의 다음 세대를 위해 중보하며 가장 크게 아멘으로 화답해 주었던 그 소리를 기억한다. 더불어 그분들이 통성으로 기도할 때, 지금 같은 공간에서 예배하며 훈련 받고 있는 아이들을 당신들의 자녀라고 믿고 눈물로 기도해 주시던 그 흔적은 당시 거듭나지 못했던 나에게 말할 수 없는 울림으로 남아 있다. 지금 분명히 믿는 것이 있다. 그 어르신들의 중보가 전혀 목사가 될 것 같지 않았던 볼품없는 나를 목사 이강덕으로 만들어 놓은 무기들이었다는 것을. 지난 주간 청년, 학생 수련회를 은혜 중에 마쳤다. 그 현장에 40년 전 고향 교회 권사님들과 같은 마음으로 식사 봉사자로, 교사로 사역을 감당해 준 지체들을 보면서 고향 교회가 떠올랐다. 너무나 환상적인 팀워크로 세인 교회 다음 세대에 있는 단 한 명의 영혼이라도 본인들이 전인격적으로 만난 바로 그 주님이 똑같이 간섭해 주시기를 기대하는 소망으로 땀흘려준 지체들이 자랑스럽다. 교회 청소를 아무렇지도 않게 용역에 맡기는 어처구니없는 기막힌 시대를 살고 있다. 불편하고 거북한 것은 조금도 못견뎌하며 극단적인 이기주의로 방어막을 치고 있는 전형적인 현대판 그리스도인들이 눈을 부릅뜨고 종교 생활을 하는 교회가 널려 있다. 둘째 날, 대원들을 격려하기 위해 수련장에 도착했더니 에어컨이 없는 장소에서 비지땀을 흘려가며 다음 세대를 위해 헌신하는 권사님들이 환하게 웃으며 이름 모를 들꽃이 담긴 화병 하나를 내게 내밀며 말한다. “목사님, 오늘 목사님이 오신다고 우리들이 들꽃을 꺾었어요. 예쁘죠?” 울컥하는 마음을 가다듬고 속으로 말했다. “아니요, 이 꽃이 아무리 예쁘다한들, 권사님들의 마음에 견주겠어요. 저는 지금 권사님들이 세상에서 가장 예쁜 꽃들입니다.” 세인 교회 다음 세대가 자라나기를 간절히 소망해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