험악한 세월을
노환으로 거동도 불편할 수 있었던 야곱이 죽은 줄로만 알고 있었던 11번째 아들이 애굽에 살아 있다는 믿기지 않은 이야기를 듣고 단숨에 그 먼 길을 내달렸습니다. 그리고 꿈에도 그리던 요셉을 만나는 장면에서 울컥하는 부정(父情)을 느낍니다. 아들을 공직에 올려준 애굽의 바로와 만날 때 바로가 묻습니다. “네 나이가 얼마인가?” 이 질문을 받은 야곱의 뼈있는 고백이 이러했습니다. “야곱이 바로에게 아뢰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고”(창 47:9) 야곱의 노년 즉 생의 말기에 그가 고백한 이 골언(骨言)이 가슴을 깊게 저밀게 하는 것은 저만의 이야기일지요. 지난 주간에 아내와 함께 지체 중에 치매와 노환으로 입원 중에 있는 어르신들을 병원과 요양원으로 심방하면서 위로하고 돌아왔습니다. 가장 기초적인 기억만이 남아 있는 강영자 권사님, 이동우 집사님, 그리고 정영자 어르신까지 품에 안아드리고 기도로 사랑을 전하고 왔습니다. 90-80 평생의 삶을 이어오신 어르신들의 지나온 세월들이 어떠했을까?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아마도 동일한 공통분모가 있을 것입니다. “험악한 세월이었습니다.” 일제 강점기의 치욕을 맛보고, 해방 이후 분단의 아픔 속에서 좌우의 첨예한 대립으로 인해 정치적인 압박의 세월을 보냈고, 6,25 동란이라는 쓰라린 동족상잔의 비극에서 최절정의 가난과 보릿고개를 경험하면서 당신들은 배를 주렸지만 내 아들, 딸의 세대에서는 이런 아픔과 가난과 비극을 맛보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허리띠를 졸라맨 험악한 세월의 증인들이 바로 어르신들이었습니다. 아내가 강 권사님에게 물었습니다. “권사님, 누가 제일로 보고 싶으셨어요?” ‘목사니이임∼’ 이동우 집사님을 심방하는데 언어를 잃어버린 집사님은 제 얼굴을 보고 마냥 소년처럼 웃으셨습니다. 한근희 지매의 모친이신 정영자 어르신을 찾아뵙고 인사를 드리자 아직은 정신이 온전하신 당신께서 ‘미안해서 어쩌죠.’라고 소녀처럼 수줍은 얼굴로 대면하셨습니다. 요양병원에, 그리고 요양원에 계신 어르신들에게 인사를 드리면서 자연스럽게 같은 방과 병동에 계신 다른 어르신들이 눈에 띄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너무 잔인한가 싶습니다. 코에 달고 있는 호흡기만 떼면 금방 별세하실 분들이 거의 전부처럼 보였습니다. 피골이 상접한 육신들, 자가 호흡으로는 생존이 불가능한 어르신들을 보면서 감히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험악한 세월을 보내오신 우리들의 부모님들을 위한 효도는 도리어 안락한 최후를 맞도록 도와드리는 것은 아닐까? 요양병원의 관계자들의 직업을 위해서 어르신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아이러니가 있긴 하지만 너무 고통스러운 노후를 보내고 계신 어르신들을 보면서 멋쩍은 발상을 해보았습니다. 하기야 저 역시,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보내는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님, 부모님들을 하나님의 나라에 안착할 수 있도록 불러주옵소서!” 라고 기도하는 것 외에 다른 물리적인 방법에는 동의하지 않은 이율배반의 삶을 산 자식이기에 이렇게 말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인 것을 압니다. 해서 헷갈릴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 ‘어르신들에게 건강을 주십시오.’ 라고 기도하는 것이 옳은지 아니면 저들의 생명을 ‘하나님이 안아주십시오.’ 라고 기도하는 것이 옳은 기도인지. 분명한 것은 험악한 세월을 지내오신 어르신들의 영혼이 마지막까지 귀하고 복되기를 바라는 것은 오늘도 목사의 중보 제목 중에 하나라는 것입니다. “야곱이 바로에게 아뢰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고”(창 47:9) 오늘도 깊이 되새겨 보는 말씀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