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명절 단상
설 명절 당일 오전에 서재로 나가 말씀을 묵상했습니다. 순간, 고요함과 적막함이 느껴질 정도로 서재가 조용했습니다. 아마도 고향을 찾아오고, 찾아간 사람들로 인해 모두의 마음이 분주한 반면, 교회에 홀로 남아 있는 제 모습에 스스로 도취되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겠고, 장모님이 돌아가신 후 이제 저와 아내는 찾아 뵐 부모님들이 존재하지 않는 명절의 아픔 때문에 그렇게 쓸쓸해 보인 설 명절이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말씀 묵상을 마치고 오디오를 틀었습니다. 턴테이블에 세팅되어 있는 음반인 마블 길릴로프의 피아노 연주와 미샤 마이스키의 첼로 선율로 울려 퍼지는 아베 마리아는 천상의 음악처럼 서재를 휘감았습니다. 교회를 지킨다는 이유로 서콬하는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선물은 저를 위로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이어 손에 제 3시대 그리스도 연구소 실장으로 있는 김진호 목사가 쓴 '산당들을 폐하라'(동연 간)를 들고 열독하기 시작했습니다. 음악은 너무 달콤한데 책에서는 저자가 비수를 들고 무너져 내리고 있는 조국교회를 위해 내뱉는 토설이 심상치 않았습니다. 그의 말을 귀 기울이면 조국교회가 꼭 들어야 광야의 소리인데 음악과는 전혀 다르게 공격적이고 전투적인 언어들로 직격되어 그런지 왠지 불편하고 아쉽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이유는 그의 말대로 민주주의는 시끄러운 것이 본질이라 했던 것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너무 극과 극을 동시에 경험하니 조금은 혼란스럽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진보적인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절치부심하며 아파하는 그 아픔의 속내를 들여다보면 너무나 교회를 사랑하기 때문인데 세속화된 일탈의 일부 교회들이 이런 외침을 반 기독교적이라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몰아치는 것은 안쓰럽다 못해 천박해 보이기까지 해서 아프기 그지없습니다. 프랑스의 신학자이자 사회학자인 자크 엘륄은 그의 걸작인 ‘뒤틀려진 기독교’에서 이렇게 꼬집었다. “기독교가 왜곡된 요인의 정점은 기독교의 성공이었다. 기독교가 일단 성공하자, 교회는 계속 성공하려고 했고, 이 갈망에서 그리스도인은 벗어나지 못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성공 뒤에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의식하지 못했다. 그 결과 기독교는 사회를 뒤집기는커녕 오히려 사회에 의해 뒤집혔다.”(p,362, 대장간 간) 무시무시한 성찰이자 가슴에 새겨야 할 촌철살인입니다. 9년 전, 우리 교회는 교회를 개척하면서 함께 내 건 교회의 방향성이 있었습니다. “세상에게 살려달라고 소리치는 교회가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살려달라고 소리치는 교회로의 진입” 그런데 이게 어디 쉬운 일입니까! 그리고 말로 되는 일입니까! 그래서 순간마다 곱씹는 것이 있는데 ‘그리스도인의 삶 살아내기’임을 우리 교우들은 잘 알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 살아내기라는 테제에 반드시 선행되고 잊지 말아야 할 모토가 있다면 두 가지와의 지난(至難)한 싸움에서 지지 말아야 한다는 경성일 것입니다. 하나는 성공주의를 포함한 ISM 이데올로기의 탈출이고, 둘은 타인을 위해 존재하려는 의도적인 붙임입니다. 앞서 언급한 김진호 실장은 전자를 오늘 21세기 교회가 반드시 폐할 산당이라고 정의한 점에 저 또한 동의합니다. 설 명절을 맞이하여 제천 지역에 있는 소녀들 중에 생리대를 구입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에 있는 딸들을 위해 생리대 구입 자금을 유관기관에 전달하고 오는 데 직원이 한 말이 죽비를 내리치는 말로 들렸습니다. “목사님, 이런 일을 많이 하는 교회가 그게 교회이겠죠?” 다시 한 번 내 휴대폰에 있는 일체의 자기소개 메시지에 담겨 있는 본회퍼의 글을 꺼내 보았습니다. “교회는 타인을 위해 존재할 때만 교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