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영월에 있는 우룡으로 신년 사업체 심방을 다녀왔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교제를 하다가 이 권사님 고향에 있는 밭에 호두나무를 심었다는 이야기를 듣는 중에 지난해 농사를 지었던 콩 수확에 대한 웃픈 이야기를 문 집사님께 동시에 듣게 되었습니다. 콩은 경작하는 것이 예민하기 때문에 손이 많이 가는 농작물 중에 하나라고 했습니다. 해서 전문적인 콩 재배 지식이 없는 문외한이 할 수 있는 일은 제한적이고 중요한 콩 재배에 따른 기술력은 타인에게 의존하였다는 전언도 전해 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다른 농작물에 비해 콩은 농약을 적절하게 뿌려주지 않으면 100% 죽기 때문에 수확 때까지 두 번에 걸친 농약주기도 역시 타인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안 되었기에 전문적인 지식이 있는 지인의 손을 빌렸다고 했습니다.
문 집사님 왈 콩을 수확하는 데 들어간 이모저모의 비용을 계산해 보니 약 100만 원 정도, 그리고 추수하여 얻은 콩 작물을 돈으로 계산하니 약 60여 만 원, 그러니 산술적으로 손해를 본 것입니다. 40만 원 정도의 손해는 다분히 숫자적인 통계이고, 그 동안 재배하면서 쏟은 농부로서의 수고, 땀 흘림 등등의 소프트웨어적인 통계까지 함께 계산해 보면 수지타산 빵점의 농사가 콩 재배였다는 보고였습니다. 설득력이 있는 콩 농사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런 산술적인 통계의 보고보다 이동화 권사님의 반응은 조금 달랐습니다. 편을 가르는 것은 아니지만 저에게는 훨씬 더 의미 있게 다가왔습니다.(ㅎㅎ) “목사님, 이렇게 문 집사가 땀 흘려 얻은 콩을 가지고 만들어 먹은 두부는 시장에서 사가지고 온 두부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맛있는 일품이었습니다. 힘은 들었고, 산술적으로는 손해도 보았지만 그것과는 비교가 안 되는 수확들이 있습니다. 재배하는 가운데 땀 흘리는 수고로 인하여 자연적으로 주어진 육체적인 건강, 내가 재배한 농작물이라는 자부심이 주는 기쁨, 엄청난 농약으로 범벅인 된 것이 아닌 믿을 수 있는 먹거리, 무엇보다도 내 식탁에 올라왔을 때의 그 감동 등등은 손해 본 40만 원으로는 도무지 살 수 없는 최고의 선물입니다.” 듣고 있다 보니 이 권사님의 이야기가 복음처럼 들렸습니다. 손해를 보았지만 결코 손해 보지 않는 삶을 산 것이 콩 재배였다는 이야기를 듣다가 속으로 아멘 했습니다. 언젠가 전 국립 수목원장을 역임한 신준환 박사의 글에서 귀한 내용을 보았습니다. “살아 있는 것 중에 아프지 않은 것은 없다. 나무는 늘 아프다. 늘 아파서 향기를 낸다. 인간이 좋아하는 피톤치드라는 것은 ‘식물을 죽인다.’는 뜻을 갖고 있는 물질이지만, 나무는 남을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아파서 자신을 치유하기 위해서 이 물질을 낸다. 사람이 편한 자리를 만들어 키운 인삼의 치유 물질이 산삼의 치유물질보다 못하듯이 나무도 편한 자리에서 아픔을 없애주며 키우면 피톤치드가 적어진다. 자신이 아파서 내는 향기, 우리는 그 향기를 마시고 낫는다. 향기로움 뒤엔 그 향기가 진한 만큼의 아픔이 숨어 있는 것이다.”(신준환, “다시, 나무를 보다.”, pp,45-46.) 김기석 목사가 쓴 ‘내 영혼의 흔들림’을 읽다가 순간 울컥했던 기도가 있었습니다. “풍요와 편리함에 중독된 사람들은 두려워하면서도 자기 삶을 바꾸려 하지 않습니다. 주님,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교회가 먼저 돌이켜 생명 살림의 길을 걸어가게 해 주십시오.”(김기석, “내 영혼의 작은 흔들림”,p,76) 손해는 보았지만 그 손해는 결코 손해가 아니었다는 이 권사님의 역설의 말은 풍요와 편리함을 추구하는 세대에 생명 살림의 지혜를 알려준 뜻밖의 득템이었습니다.
사업체 심방을 통해 은혜를 주려고 갔던 목사는 예상하지 못한 은혜를 배로 받고 돌아왔습니다. 왜 옛 선배 목사님들이 심방 목회에 목을 걸었는지 다시 한 번 교훈 받은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