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렙돈을 받고서 서울 마포에서 아주 건강한 목회를 하는 동기 목사와 교제하다가 친구가 남긴 이런 이야기를 마음의 뇌에 저장해 놓았다. 친구는 핸드드립 커피를 좋아한다. 해서 좋은 원두 콩이 있으면 그곳에 가서 구입하여 먹을 정도의 드립 커피 마니아이다. 어느 날 아침 교회 사무실로 출근을 할 때 손에 드립 커피가 들려 있었다. 문제는 출근 길거리에서 섬기는 교회의 노 권사님을 만났는데 그 권사님은 폐지를 줍고 있었다. 그것을 주워 생활을 하는 어른이셨기 때문이다. 순간, 친구는 드립 커피 들고 있던 본인의 손이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른다고 술회했다. 이후 친구는 다시는 드립 커피를 교회 근처에서 들고 다니는 일을 결코 하지 않았다는 에피소드를 들으면서 참 따뜻했다. 내세울 만한 교회를 목회하는 친구의 그 마음이 아름다워 보였기 때문이다. 목사가 섬기는 교회의 지체들의 요구를 다 들어줄 수 없다. 목사도 나름의 삶이 있기 때문이다. 재론하지만 친구의 말을 들으면서 왠지 친구가 참 고마웠다. 너무나 당연한 것인데도 섬기는 교회 권사님의 삶을 몸으로 나누고자 했던 친구의 마음이 커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그기 친구는 지금도 내 마음에 항상 본받고 싶은 존경의 대상이다. 그런 친구를 둔 나는 참 행복한 사람이다. 마가기자는 자신의 쓴 복음서에서 이런 기록을 남겨놓았다.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막 12:42) 이 구절의 해석을 했던 주석 중에 개인적으로 참 공감하며 은혜를 나누었던 해석이 있다. 이제 은퇴를 해 일선에서 물러난 경동교회 원로이신 박종화 목사의 해석이었다. 그의 해석은 이런 감(感)의 해석이었다. “우리들이 익히 익숙해 있는 이 구절의 전통적인 해석은 전 재산을 헌금한 과부의 믿음이 큰 믿음이라고 진단하는 해석이다. 그러나 이 단문에서 주는 교훈은 그보다 훨씬 더 크다. 예루살렘 성전 주변에 살고 있었던 한 과부의 전 재산이 불과 두 렙돈인 현실적인 상황을 방치한 성전 종교와 제사장들의 무감각에 대한 주님의 맹렬한 고발을 알려준다. 두 렙돈은 성인 한 명이 1일 동안 벌어야 했던 1데나리온의 1/16에 해당하는 정말 볼품없는 물질의 가치였다. 이 작은 돈으로 하루를 연명할 수밖에 없는 과부를 그대로 방치한 성전 종교 제사장들에 대한 무서운 질책이 이 구절의 핵심적 가치이다.” (경동 교회 주일설교 중에서) 목회를 하면서 돈을 정말로 무서워했다. 경계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지난 30년 동안 하나님이 사역을 감당하면서 돈으로 인해 어려움을 당하게 하신 적이 없는 것 같아 한도의 한숨을 내쉰다. 아마도 목사 안수를 받을 때, 하나님께 기도했던 세 가지 중에 하나인, 물질에 노예가 되지 않겠다는 비장한 기도를 어여삐 여기신 결과가 아닌가 싶다. 바라기는 은퇴를 이제 얼마 남겨두지 않은 시점인데 끝까지 이 은혜 안에 살다가 강단 내려오기를 기대하는 마음 간절하다. 지난 주, 정기 휴가를 마치고 제일 먼저 암으로 고통당하는 여 집사님의 집을 방문했다. 마음의 염려가 내심 그녀에게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방광에서 발생한 종양이 이제는 거의 전신에 전이되어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 아니고는 다른 방법이 없는 아픔의 현장에 있다. 집사님을 보는 순간, 야윈 몸 때문에 순간 터져 나오는 눈물을 참으려고 인내했다. 이제는 소파에 앉아 있기조차 불편한 자매를 보면서 무슨 말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 목사로서 참 난감한 기막힘을 경험했다. 에모리 대학교의 켄들러 신학대학원에서 성서해석학을 강의하는 토마스 롱은 ‘고통과 씨름하다.’ 에서 자신이 만난 신실한 크리스천 의사의 말을 대신 전하고 있다. “내가 만일 천국에 가면, 제일 먼저 나는 손에 암세포를 들고 하나님의 집무실에 가서 왜? 라고 물을 것이다.”(p,199) 이 신실한 의사의 물음에 대하여 롱 교수는 이렇게 부연했다. “항의의 신정론은 하나님의 사랑을 인정하는 동시에 갈망한다.” 그렇다. 나 또한 자매를 위해 암 발생 이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중보의 끈을 놓지 않으면서 어떤 때는 하나님께 아양(?)도 떨어보고, 어떤 때는 하나님을 겁박(?)하기도 하면서 으르렁대기도 했다. 그러나 현실은 자매가 위중해 졌다는 사실에 절망할 때가 솔직히 더 많다. 그러나 목사가 약해져서야 되겠는가? 목사가 뒤로 물러서서야 되겠는가? 아직은 집사님의 호흡이 그래도 날숨과 들숨으로 펌프질하고 있는데. 힘겨운 심방을 마치고 나오는 데 집사님이 준비한 봉투를 전도사님에게 내민다. “전도사님,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고 싶은 마음 간절하지만 그럴 수가 없습니다. 대신 감사의 예물을 드려주십시오.” 뒷마무리를 하고 내려오라고 전도사님에게 부탁하고 주차장에 가기위해 먼저 승강기를 탄 후에 참았던 눈물을 쏟았다. 그녀의 드린 예물이 과부의 두 렙돈과도 같은 보물과 같은 예물이라고 생각하기도 했기 때문이지만 생사의 기로에서 아파하는 그녀를 위해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있는 내가 바로 예루살렘 성전에서 기생하고 있는 제사장이라는 생각을 감출 수 없어서 말이다. 휴가 기간 가지고 갔던 헬렌 니어링이 쓴 ‘아름다운 삶, 사랑과 그리고 마무리’ 를 보다가 그녀가 이야기 한 구절에 내 마음의 필이 꽂혔다. “어떤 경우에도 되새겨 생각해 볼 일은 우리가 무엇을 소유하고 있느냐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 변화하고 성장하는데 도움이 되는 어떤 일을 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흔히 우리의 소유물은 그 일의 방해물이 됩니다.”(p,191) 목사가 어떤 경우에 성도를 숫자로 가늠한다. 그것이 소유라고 믿기 때문이다. 목사로 살면서 성도가 소유물로 보인다면 목회를 그만해야 한다는 시기라는 것을 나는 잘 안다. 두 렙돈으로 살아가는 양들이 지천에 있다. 그 양은 내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이 위탁하신 하나님의 것이다. 나는 지금 목사로 소유하려는 삶에 천착해 있는가? 아닌가? 가슴으로 뒤돌아보게 하는 주일 오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