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교 4학년 때, 기독교윤리학을 접했습니다. 참 신선했습니다. 지난 7학기 동안 공부했던 여타 과목들과는 달리 뭔가가 들리는 과목이었습니다. 물론 강의하는 교수가 진보적인 성향의 선배였기 때문에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여하튼 군사독재의 서슬이 극으로 달리던 때였기에 그 선배의 한 마디, 한 마디가 요즘 말로 말하면 심쿵(?)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강의를 듣는 나의 마음이 그랬기에 당연히 과목에 대한 몰입도가 좋았고, 공부하려는 태도 역시 전과는 다른 내 모습에 스스로 대견해 하기 까지 했습니다. 고전적인 기독교 윤리에 대한 눈이 떠졌습니다. 이어 월터 라우센 부쉬를 통해 사회복음의 신학과 윤리학의 조화를 배웠고, 문화와 같은 걸음을 걸었던 리츨의 신학과 윤리에 한 동안 집중했고, 조셉 플레처의 상황윤리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배웠습니다. 시대적 정황도 분명히 한몫했지만 본회퍼를 만나면서 열광했습니다. ‘나를 따르라’를 성경처럼 손에 들고 다니며 읽었습니다. 저에게는 참 큰 선생님들이었습니다. 이렇게 기독교 윤리학를 가르쳐 준 선생님 때문에 시작한 대가들과의 만남 중에 저에게 또 한 사람, 잊지 못할 사상가는 리처드 니버였습니다. 그의 문화윤리학은 당시에 아주 보수적 신학 교육에 길들여져 있는 나에게 적지 않은 파동을 일으켜 주었습니다. 흔히 신학생들 사이에 하는 농담 중에 신학교 1학년 때는 목사로서 살다가 학년이 올라갈수록 직분이 장로, 집사로 변하고 4학년 때는 직분이 사라진다는 웃픈 이야기가 있습니다. 저 역시 신학교 4학년 시절에 영적 상태가 바닥이었는데 조금은 아이러니하지만 본회퍼 때문에, 유대인 철학자이자 신학자인 부버 때문에, 그리고 니버 형제들 때문에 신학의 지푸라기를 잡을 수 있었던 추억이 있습니다. 리처드 니버의 걸작인 ‘그리스도와 문화’를 맨 처음 접했을 때의 소회가 므리바에 도착한 건조했던 이스라엘 공동체에게 반석에서 솟구친 물줄기 같았다고 말해도 전혀 과장된 표현이 아닙니다. 적어도 저에게는 그랬습니다. ‘문화에 대립하는 그리스도’(Christ against Culture)를 강요받았고, 또 그것이 신앙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던 저의 아집과 독선의 담벼락이 한 순간에 무너진 거장의 해석이었기 때문입니다. 이후 나 역시 니버의 주장처럼 ‘문화를 변혁하는 그리스도’ (Christ Transforming Culture)에 필이 꽂혀 지낸 적도 있습니다. 물론 신학교 4학년 시절, 리처드 니버의 주장에 대한 저의 이해가 철저하게 사변적이었다는 아쉬움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장의 가르침은 저를 흥분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신학교를 졸업해서 현장 목회자로 선지가 이제 금년 꼭 30년이 된 지금도 저는 나름 비판적 성찰이 요구되는 그의 주장임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가 지향했던 ‘문화를 변혁하는 그리스도’의 필드를 지지하는 것은 견고합니다. 금년에 잘 하면 우리나라 국민들의 GDP가 30,000불에 도달할 수 있다는 장밋빛 청사진이 제시된 기사를 신문에서 읽은 적이 있습니다. 1인당 국민소득 30,000불 시대에 종교는 무엇일까? 말할 것도 없이 문화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30년 전에 나름의 소명에 불타 목사로 어떻게 설 것인가? 에 대한 자답으로 보무도 당당하게 내가 품은 그리스도로 인해 문화를 변혁해 갈 수 있다는 자존감이 이제 고집인가? 답해야 하는데 뾰족한 답이나 탈출구가 보이지를 않아 아픕니다. 실제로 기독교가 종교라고 해도 자존심이 상하는데 이제는 문화라고 정의되는 더 큰 자괴감이 오늘 내가 섬기는 교회 현장에서도 보이니 니버의 말대로 이제는 ‘문화에 속한 그리스도’(Christ of Culture)의 시대를 인정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고통이 저에게 있습니다. 글 잘 쓰는 기자 출신 조정민 목사(베이직 교회 담임)의 글 시작에 이렇게 기록된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기독교가 종교라면 나는 불교를 떠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Why Jesus에서) 보수적 성향의 목사가 내 던진 메아리로 단지 치부하기에는 그의 지성과 영성의 만남이 천박하지만 않았기에 나 또한 그의 메시지가 큰 울림으로 공명됨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기독교는 종교나 문화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나의 주되심이다.” 내 자존심이 아니라 내가 가지고 있는 주존감(主尊感)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