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물쭈물 하지 않기로 지난 주, 이경선 집사님의 친정어머니이신 차명순 집사님의 장례 기간 중, 두 번의 위로 예배를 인도했습니다. 제가 장례 예배 인도를 위임 받은 목사가 아니기에 교역자 윤리에 어긋나지 않는 한도에서 최대한 조심스럽게 두 번의 위로 예배를 통해 유족을 위로했습니다. 장례식 예배 인도는 그렇게 민감하고 조심스러운 것입니다. 이렇게 장례식은 남은 자들에 대한 예우도 중요하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부분은 고인에 대한 추모일 것입니다. 하나님께 부름 받은 분이 이 땅에서 어떤 족적과 흔적을 남겼는가? 반추하고 회상하며 고인에 대하여 가장 극진한 예와 추모를 올려드리는 것이 바로 산 자들 즉 남아 있는 자들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해서 저는 초상집에 갈 때마다 훗날 저의 장례식을 생각하며 남아 있는 자들에게 누(累)가 되거나 혹은 장례식을 인도하는 자들이 불편하지 않게 하도록 최선을 다하여 살아야 하겠다는 다짐들을 하곤 합니다. 지난 주간, 제게는 개인적으로 대 선배이시면서 제가 특히 어린 목사였을 때 저 어른을 어떻게 따라가지 할 정도로 큰 어른이셨고 거목이셨던 서울 중앙성결교회 원로목사님이신 이만신 목사님께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으셨습니다. 이 목사님의 소천은 당신에게는 그토록 갈망하던 하나님의 품에 안기신 행복한 사건임에 틀림이 없는 일이겠지만 저처럼 서울신학대학을 졸업한 후배들 거의 모두에게는 또 다른 한 편으로는 현장에서 영적인 배움을 주신 큰 어르신과의 별세라는 매우 슬픈 일이고 아쉬운 일일 것이 분명합니다. 개인적으로 1992년 목사 안수를 받을 때 공교롭게 저는 어르신의 안수 기도로 목사 안수를 받아서 그런지 어르신의 소천에 더 큰 애틋함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더불어 매년 독립교회 연합회 목사 안수식에 한기총 전직 회장자격으로 항상 초청되셔서 부족한 사람과 함께 까마득한 목사 후보생들을 안수하고 격려하는 공동의 자리에서 함께 사역하시면서 제가 성결교회 목사였다는 사실을 아신 뒤로는 때때마다 교단으로 반드시 다시 돌아오라고 안타까움을 갖고 격려하시던 따뜻함을 이제는 육성을 들을 수 없는 아쉬움이 가득하여 어르신의 소천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말이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개인적으로는 이런 소회와 감흥이 있지만 허나 저는 어르신의 소천을 보면서 또 한 번 귀중한 하나님의 진리의 교훈을 배워봅니다. 인간이 에노스임을. 어떤 의미로 인간이 반드시 죽는다는 명제가 얼마나 위대한 하나님의 섭리이며 계획이시고 교훈인가를 조금만 직시하면 아주 선명하게 알게 됩니다. 인간이 죽는 존재라는 에노스-그 대상이 큰 거목이든, 이름도 빛도 없이 살아온 민초들이든 상관없이-임을 알고 있다면 결코 교만할 수 없고, 희희낙락하며 막 살 수 없으며, 항상 언제든지 ‘코람데오’ 의 자세로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언젠가 조지 버나드 쇼의 묘비명에 새겨진 글귀를 책에서 보면서 크게 무릎을 쳤던 것은 기막힌 통찰이라고 동의했기 때문입니다. “I knew if I stay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 (직역: 나는 시간의 충분함에 맴돌다가 이 일이 갑자기 들이닥칠 줄 알았지.) 사람들이 이렇게 의역을 했는데 그럴 듯 했습니다. “우물쭈물 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정말로 커 보였던 어르신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해서 또 다시 재 다짐해 봅니다. ‘우물쭈물 하지 않기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