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든 맥도널드의 책입니다.
내면세계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가장 잘 깨닫게 된다. 거기서 우리의 긍지가 형성될 뿐만 아니라 동기와 가치관 그리고 헌신에 대한 기본적인 결정이 이루어지며, 바로 거기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다. 이것을 내면세계라 부르는데 그 이상적인 상태를 질서 있는 내면세계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내면속에 어떻게 거하시는 지, 왜 거하시는지를 깨닫지 못하는 것은 쉽게 헌신의 결단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거하시기로 선택하신 나의 내면세계를 잘 정돈하는 일은 일생을 두고 이루어질 뿐만 아니라 매일 매일의 문제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내 안의 무엇인가가(성경은 이것을“죄”라고 부른다) 주님의 거하심과 그 결과로서 세워지는 모든 질서에 대항한다. 죄는 무질서를 좋아 하는데, 그것은 그릇된 동기와 가치가 이 무질서 안에 은거해 있다가, 방심한 찰나 그 모습을 표면에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질서 있는 내면세계를 이루기 위한 매일 매일의 훈련을 통하여 먼지 뭉치 같은 무질서를 계속해서 치워 내야만 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그 원칙 위에서만 내면세계의 질서를 다룰 수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개인적인 초청과 위탁에 의하여 우리 삶 속에 신비하게, 그러나 확실하게 들어오신다. 각자의 개인적인 삶 속에 질서를 잡는다는 것은 삶의 모든 부분을 그 분께서 다스리시도록 요청하는 것이다.
*.내면세계는 모두 다섯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1.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어떠한 행동을 하게 하는가 하는 동기부여의 문제이다. 2.인생의 한정된 시간을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시간사용의 문제이다. 3.창조의 진리를 받아드리고 그 진리를 논리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놀랄 만한 능력을 우리의 마음이 소유하고 있는데, 그 마음을 가지고 무엇을 하느냐하는 지혜와 지식의 문제이다. 4.나 외에 다른 이는 아무도 알아듣거나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아버지와 교통할 수 있는 특별하고도 은밀한 곳이 있다. 내면세계의 정원인 영적인 부분의 문제이다. 5.우리 안에는 우리로 하여금 안식 혹은 안식일의 평화로 이끄는 부분이 있다. 내면의 질서를 잡는데 있어서 독특하고도 없어서는 안 될 원천으로서 인식되어져야만 하는 회복의 문제이다.
1. 함몰웅덩이의 증상(The Sinkhole Syndrome)
1.이전에는 알아채지 못했던 내적영역, 즉 내면세계가 있다. 이러한 내면세계를 무시해 버린다면 그것 은 위에서 내리누르는 외부압력을 오래 지탱하지 못할 것이 틀림없다. 이렇게 위기에 직면한 내면세계를 발견하게 되면 놀라고 혼란에 빠지고 만다.
2.우리는 두 개의 아주 다른 세계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 외면세계 혹은 공적세계는 다루기가 쉽다. 측정할 수 있고 눈에 보이며 계속 늘려 갈 수 있고, 쉽게 평가할 수 있는 우리 삶의 한 부분이다. * 내면세계는 본질적으로 영적이다. 선택과 가치가 결정되는 중심부이며, 고독과 성찰을 추구하는 곳이다. 이곳이야 말로 예배와 신앙고백이 이루어지는 곳이며 세상의 도덕적, 영적공해가 침투하지 않도록 해야 하는 곳이다.
3.우리의 공적세계는 우리에게서 끊임없이 많은 시간과 충성심, 물질과 정력을 요구한다. 이러한 우리 바깥의 공적세계는 뚜렷이 눈에 들어오는 것이고, 또 아주 현실적이기 때문에 그 유혹과 요구를 거절 하기가 쉽지 않다.
4.그러나 우리의 내면세계는 외적세계 만큼 큰 소리로 외치지 않기 때문에 도외시되고 있다. 이 내면세계는‘함몰웅덩이’처럼 무너져 내릴 때까지 쉽게 무시되는 것이다.
5.그리스도인 중에는 가정과 직장과 그리고 교회에서 무거운 책임들을 지고 수고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그들은 유능한 사람들이지만 대단히 지쳐있다. 그래서 그들은 너무나도 자주 함몰 웅덩이같이 붕괴되려는 위험에 처해 살고 있다. 이것은 내면세계를 너무 늦게까지 무시한 채 공적세계에만 치중하는 삶을 살기 때문이다.
6.내면세계의 질서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것을 보았을 때, 나는 삶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에 상당한 거리감을 두었기 때문에 삶의 중심점을 상실한 채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2. 조종실에서 보는 시각
1.창조주는 우리의 내면세계로부터 외면세계를 지향할 때 가장 능율적으로 살 수 있도록 우리를 만드셨다.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4:23)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한 뜻이 무엇인지 구별하도록 하라.”(롬12:2) 이러한 교훈의 배후에는 인간 삶의 조종실인 마음을 지키기 위해서는 신중하고도 훈련된 올바른 선택이 요구되어 진다.
2. 우리 안에 질서정연하고 고요한 곳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그 곳으로부터 외부의 소란을 극복하고, 그 소란에 의해 위축되지 않는 힘이 우러나오기 때문이다. 강한 내면세계의 계발과 유지가 우리 삶에 있어 가장 중요하고도 한결같은 과제가 될 때, 비로소 위에서 말한 심오한 원칙을 배우게 되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제 1 부 동 기 부 여
3. 황금 새장에 갇혀서
1.예수님께서는 부름 받은 사람과 쫓겨 다니는 사람에 대한 구분을 하셨다. 끌려 다니는 경향이 있는지 아니면 기꺼이 부름 받으려고 하는지에 따라 구분하셨다. 그 분은, 그들의 동기와 영적인 힘의 원천 그리고 어떤 종류의 만족에 관심을 갖고 있는지를 문제 삼으셨다.
2.어떤 사람들이 쫓겨 다니는 사람인지 알아 낼 수 있는 많은 증상들이 있다.
쫓겨 다니는 사람은 1.오직 성취함으로써 만족을 얻는다. 2.성취의 표상들에 집착한다. 3.보통 절제되지 않은 팽창욕에 사로잡혀 있다. 4.전인적(全人的)인 인격에는 별 관심이 없는 경향이 있다. 5.사람을 다루는 기술이 서툴고 미숙하다. 6.아주 경쟁적인 경향이 있다. 7.반대나 불신에 부딪치게 되면 폭발할 수 있는 격렬한 분노를 품고 있기도 하다. 8.대개 비정상적으로 바쁘다. 처리되지 않은 충동으로 가득 찬 내면생활은 주님이 부르실 때 그 음성을 잘 듣지 못하기 때문에 많은 교회들이 메마른 샘으로 변했고, 사람들을 성장케 하고 하나님의 법도를 기뻐하게 하는 생명의 샘이 되기는커녕 스트레스의 소음과 고통의 원천이 되어 버린 것이다. 쫓겨 다니는 사람의 내면세계는 무질서하다. 그가 갇혀있는 새장은 번쩍거리는 황금으로 꾸며져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것은 덫이다. 그 덫 안에서는 아무 것도 견뎌내지 못한다.
4. 어느 성공한 못난이의 불행한 이야기
1.지도적인 위치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성장 배경과 쫓기는 듯한 삶의 불안정감을 공통적으로 갖고 있다. 어떤 중요한 사람으로부터 용납과 인정을 얻으려는 욕망에 이끌리고 그것을 끝내 얻지 못하면 그 결핍을 보상받으려는 시도로써 그칠 줄 모르는 탐욕을 키워가게 된다.
2. 과도한 성취욕의 또 한 원인은 어린 시절의 심각한 상실감이나 수치심에 있다. 온갖 종류의 감동적인 영적 동기라는 옷을 입고 있어도 마음 중심부의 깊은 곳에는 치유되지 않은 과거의 상처가 도사리고 있다. 이러한 상처들은 우리의 내면세계에 무질서의 응어리로 남아서 끊임없이 따라다니며 괴롭힌다.
3. 어떤 사람들은 그저, 쫓기는 것이 생활방식이 된 그런 환경에서 자라는 경우도 있다. 쫓겨 다니는 사람들은 정돈된 내면세계의 평온함을 결코 즐길 수 없다. 그들의 주된 목표는 모두가 다 외형적이고 물질적이며 비교평가가 가능한 것이다. 이외의 다른 모든 것들은 비현실적인 것으로 취급된다. 그들은 자신이 추구하는 모든 것을 반드시 차지하여 손에 쥐어야 직성이 풀린다. 우리들 중의 누구라도 스스로의 내면을 들여다본다면 이렇듯 쫓겨 다니는 것이 우리의 생활방식임을 섬짓 발견케 될 것이다.
4. 쫓겨 다니는 사람이 부름 받은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은 그 자신이 부르심에 의해서가 아니라 충동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과도한 성취욕의 문제를 위해서 우리 자신의 동기와 가치관을 가차 없이 파헤치기 시작해야 하며, 과도한 성취욕으로부터의 자유를 추구하는 사람은 오늘날 우리에게 주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사람들의 충고와 비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또 겸허하게 자기를 낮추고 지금까지 추구해왔던 것들을 포기하는 자기 훈련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
5. 부름받은 사람으로서의 삶
1.부름 받은 사람은 자신이 청지기임을 의식한다. 2.부름 받은 사람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정확히 알고 있다. 3.부름 받은 사람은 요동치 않는 목적의식을 갖고 있다. 4.부름 받은 사람은 확고한 위탁을 이해한다. 5.세례 요한은 부름 받은 사람의 전형적인 모델이다. 요한의 삶에서 감탄할 만한 많은 종류의 특징들을 찾아볼 수 있다. 그에게는, 직업상의 안정과는 무관한 평안함이 있었다. 이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견고하며 요동치 않는 내면세계라는 기반위에 삶을 쌓은 결과이다. 우리는 또한 요한이 소유했던 기쁨의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요한의 자기평가는 일차적으로 자신의 내면세계에 근거한 것으로 그 곳에서 비로소, 하나님과의 연합으로 말미암아 진정한 가치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6.하나님께서 요한을 부르심은 성공에 대한 하나님의 판단기준과, 하나님의 방법과, 하나님의 순리에 순복할 것을 요구한다. 요한은 어떠한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하나님의 조건들을 기꺼이 따르려고 했다. 7.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곳은 광야였다. 갈등 가운데 처한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소명을 듣고자 한다면 광야야말로 가장 심오한 교훈을 얻을 수 있는 장소라는 사실이다.
*.사람은 광야에서 메마름이 무엇인지 배우게 된다. *.사람은 광야에서 하나님께 의지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광야는 사람에게 자유롭게 생각하고 계획하고 준비할 그러한 장소를 제공한다. *.광야에서 사람들은 부름 받을 수 있다. *.광야에서 형성된 내면세계의 구조는 단순히 정돈된 내면세계의 나타난 증거를 통하여만 알 수 있다.
모든 것이 혼돈되고 무질서해 보이는 공적세계에서 요한은 확신과 신뢰를 가지고 행동했다. 요한은 우리가 찾고 있는 부름 받은 사람의 원형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나는 할 일(Mission)을 알 수 있게 되며,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는 축을 따라 살아간다면 놀라운 내면의 질서를 누리게 될 것이다.
제 2 부 시 간 사 용
6. 누가 내 시간 본 사람 없어요? 어디다 두었는지 모르겠어요!
자기 훈련 없이는 그 누구도 탁월한 인물이 될 수 없으며, 그러한 인물이 되었다 해도 자기 훈련 없이는 그 상태를 계속 유지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시간을 다스리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가 착수해야 할 첫 번째 단계는 시간 사용 습관에 대한 가차 없는 자기비판이다. 개인적인 모든 시간 운영에 중심 되는 원칙은 간단하다. 즉, 시간 사용을 위해서도 예산을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개인 비서 없이도 공적인 시간 약속들을 잘 처리하셨을 뿐만 아니라, 기도와 묵상을 위한 자기만의 시간과 제자훈련을 위해 모으신 소수의 사람들과 같이 보낼 시간을 위해서도 적당량의 시간을 할애하셨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 모든 것이 가능했던 것은 그 분이 시간을 잘 다스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엇이 주님으로 하여금 그렇듯 질서 있는 사람이 되게 하였을까?
1.가장 감명을 주는 요소는, 그 분은 자신의 사역을 분명히 이해하고 계셨다는 것이다.
2.시간 경영에서 통찰할 수 있는 사실은, 예수님께서는 시간 사용면에서 자신의 한계를 잘 알고 계셨다는 점이다.
3.시간 계획을 위한 원칙 속의 중요한 요소는, 열두 명의 제자를 훈련하기 위한 시간을 따로 갖고 계셨다는 점이다. 예수님께서는 결코 시간이 부족해서 쫓기는 법이 없으셨다. 자신의 사역의 목적을 숙지하고 아버지와 단둘이 있는 순간들을 통해 영적으로 민감해져 있었으며, 또 하늘로 오르신 후에 자신의 사역을 영속시킬 만한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고 계셨기에 우리가 보기에 그럴싸하고 수락할 법한 어떤 초청이나 요구조차도 단호하게 거절하시는 것에 어려움을 겪지 않으셨다.
7.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고든 맥도날드의 계획되지 않은 시간의 법칙
제1법칙 : 계획되지 않은 시간은 나의 약점이 있는 곳으로 흐른다.
제2법칙 : 계획되지 않은 시간은 내가 속한 영역에서 지배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의 영향력에 의해 좌우 된다.
제3법칙 : 계획되지 않은 시간은 긴급한 일들에 소모된다.
제4법칙 : 계획되지 않은 시간은 대중의 갈채를 받는 일에 바쳐지게 된다.
*.시간을 성공적으로 회복하고 포획할 수 있는 세 가지 방법
1.최대의 효과를 낼 수 있는 생활의 리듬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여러 다양한 일들이 특정한 시간에, 특정한 조건하에서 가장 잘 성취된다는 것이다.
2.시간 사용 방법의 올바른 기준을 가져야만 한다. 참으로 때때로 어려웠지만, 최선의 것을 취하기위해서 하고 싶은 일들을 거절해야만 했었다. 우리가 시간을 다스리려 한다면 이를 악물고, 좋기는 하지만 최선이 아닌 기회들을 단호하고도 정중하게 거절해야만 하는 것이다.
3.시간 예산을 충분히 앞서 세울 때 시간을 통제하고 명령할 수 있다. 이 원칙은 가장 중요하다. 나의 내면세계에서 타협해서는 안 될 요소들, 즉 영적훈련, 지성훈련, 안식일적 휴식 그리고 물론 가족과 특별한 관계를 위한 시간들이 먼저 세워진다. 정해 놓은 우선순위와 계획된 시간에 따라 움직인다면 나의 내면세계는 얼마나 잘 계발 되겠는가?
하루를 시작하는 하나님과 만날 약속시간은 우리가 타협해서는 안 될 종류의 약속이다. 우리가 시간을 잃지 않고 잘 사용할 수 있으려면 말이다. 그것이야말로 질서 잡힌 하루하루와 질서 잡힌 삶과 질서 잡힌 내면세계의 시작인 것이다.
제 3 부 지혜와 지식
8. 더 뛰어난 사람이 패했다.
1.우리의 내면세계에 질서를 잡는 일은 강한 정신적인 인내와 이러한 열매인 지적성장이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강한 정신력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의견에 의존하게 된다. 어떤 사상이나 논제들을 다루기보다는 규율과 규칙과 프로그램 등에 자신을 내맡겨 버리는 것이다.
2.인내로써 강건해지지 않는 정신력의 소유자라고 반드시 비지성적인 것은 아니다. 그들은 그저, 성장 을 위하여 사고능력을 사용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생활방식이라는 것을 결코 생각해 본적이 없는 것이다. 특별히 우리 주위에 많은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들이 있어서 곧 그들이 우리를 대신해서 생각을 해주게 될 때에는 사고력이 나약해지도록 내버려 두는 덫에 걸리기가 쉬운 것이다.
3.우리의 정신은 사고하고, 분석하고, 혁신하게끔 훈련되어야 한다. 내적인 생활이 온전히 질서 잡힌 사람들은 생각하는 사람이 되는데 힘쓴다. 그들의 정신은 방심한 채로 있지 아니하고 활동하며, 매일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이고 정기적으로 새로운 앎과 결론들을 창출해 낸다. 그들은 매일 같이 정신을 단련시키는 일에 자신을 투자한다. 헌신된 내면의 삶, 외적인 봉사활동, 그리고 합리적인 지적생활, 이 세 가지 요소가 잘 계발되어야 생명력 있는 기독교가 될 것이다.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만이, 참다운 그리스도인의 온전히 조화된 강한 성품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4.생각하기를 두려워하는 그리스도인은 사실들과 교리상의 제도나 규칙들을 머릿속에 주워 담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라고 여기는 오류를 범한다. 사고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깨닫지 못하고 위험하게도 그 주위의 문화에 흡수되어 버리고, 비기독교적인 책략과 선전의 희생자가 되어버릴 수 있는 것이다. 그의 정신은 훈련되지 않았기 때문에 세상에 도전을 줄 수 있는 어려운 질문을 풀 능력이 부족하다.
5.그리스도인들의 내면세계는, 지적성장이라는 부분에 진지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나약해져 무방비한 상태가 되며 무질서해질 것이다. 몇 가지 자연적인 재능이나 몇 년간의 교육만으로는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일하도록 하신 분야에서 그 분의 쓰임을 받는 인물이 결코 될 수 없는 것이다.
9. 한번도 읽힌 적이 없는 책의 비극
1.지적으로 성장하지 않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마치, 여러 장이 붙어있는 채 읽히지 않은 책과도 같다. 사람이 한 개인으로서 성장과 계발을 위해서 그의 지성을 신중하게 활용하기 시작할 때, 새로운 질서가 그의 내면에 잡히기 시작한다.
2.우리의 내면세계의 지적차원을 계발하는 것에는 적어도 세 가지의 목적이 있다.
제1의 목적 : 지성은 기독교적으로 사고하도록 훈련되어야 한다.
기독교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이 세계가 하나님의 만드신 바요, 그 분의 소유라는 것과 창 조계에 대해 우리가 어떤 의무가 있으며 하나님의 법에 따라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등 의 견지에서 이 세상을 의미한다. 성경은 이것을 가리켜 청지기적 시각이라고 한다. 그러 나 그리스도께 대한 우리의 헌신을 새롭게 하지 않은 채 그저 기독교적으로 사고하는 것은 하나의 죽은 종교, 덤덤한 신앙, 효과 없는 전도를 초래할 수 있으므로 그리스도 복음 안에 서 성장해온 사람들은 그렇게 되지 않도록 매우 주의해야 한다.
제2의 목적 : 우리의 지성은 하나님께서 피조 세계 안에 기록해 놓으신 메시지를 고찰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훈련되어야 한다.
제3의 목적 : 정신은 내 주위의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서 정보와 아이디어와 통찰력을 추구하도록 훈련 되어야 한다.
*.나 자신의 지적성장에 대한 책임은 나 자신에 있으므로 어떻게 사람들이 내면세계 안에 지적인 체계를 세울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열거해 보면
1.우리는 듣는 사람이 됨으로써 성장한다.
*.듣는 자가 되기 위한 첫걸음은 질문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들음에 의한 지적성장은 사람들이 일하고 있는 일터를 방문하여 그들이 무엇을 하는지를 보고 그들과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그리고 그들이 현재 직면하고 있는 특별한 문제들에 대해서 배우기 시작했을 때 성취된 것이다. *.들음을 통한 성장은 지도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지적성장은 비판자들의 말에 귀 기울일 때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말하고 싶다. 아무리 공정하지 못한 비판이라 하더라도 항상 그것을 기도의 밀실로 가지고 가서 주님 앞에 사실대로 털어 놓는 것이다. 비판으로 인한 진리가 때로는 작은 것일 수도 있지만 그것은 언제나 발견해 내고 수고해 볼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유익한 진리가 담겨 있지 않은 비판은 거의 들어볼 수 없다.
우리는 적극적인 들음을 통해서 성장한다. 질문하고,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고, 잘못된 선택으로 인하여 실패한 사람들의 잘못된 결과들을 주목하면서 성장하는 것이다.
2.우리는 독서를 통해서 성장한다.
3.우리는 훈련된 공부를 통해서 성장한다. 한 가지, 택한 주제에 한정되어 미친 듯이 몰두하고 준비하는 방어적인 공부와 방대한 지식과 통찰력을 모으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공격적인 공부가 필요하지만, 우리는 공격적인 공부를 위한 훈련을 추구할 때에 성장한다.
제 4 부 영적인 힘
10. 마음의 정원에 질서를
1.영적으로 무질서 하다는 것은 때때로 내적 평온의 결핍을 의미하기도 한다.
우리에게 만족을 줄만한 영적인 생활을 계발할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은 운동선수가 경기를 위해서 자신의 신체를 단련하듯이 영적인 생활을 훈련이라는 각도에서 접근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훈련된 삶을 택하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그러한 도전을 받아드리지 않았던 것을 후회할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2.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시고 인도해주신 마음의 정원이 질서정연한 모습일 때 그 곳은 고요하다. 그 곳에는 번잡함과 복잡한 소음과 혼란스러움이 없다. 내면의 정원은 섬세한 곳이라서 잘 가꾸어지지 않으면 어느 사이엔가 가시덤불이 제멋대로 자라날 것이다. 하나님은 난잡하게 어지러워진 정원을 거닐지 않으신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소홀히 내버려둔 내면의 정원이 공허한 이유인 것이다.
3.영의 훈련은 지금 시작되어야 한다.
*.우리가 그러한 시작을 하지 않는다면 생명력이 흘러넘치는 삶을 살도록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많은 특권을 놓쳐 버리게 된다. 창조 시 의도된 대로, 우리가 지녀야 할 실재에 대한 영원하고 무한한 견지를 즐거워하는 법을 결코 배울 수 없을 것이다. *.우리의 내면세계의 영적중심부가 단련되지 않을 경우 우리가 잃게 될 두 번째 특권은 살아 있고 생명력 있는 그리스도와의 교제인 것이다. *.훈련되지 않은 영이 잃게 될 수 있는 세 번째 특권은 하나님께 대한 책임을 의식하는 가운데 지니게 되는 경외심이다. *.네 번째로 영적 중심부를 회복 불능 상태로 만든다는 것은 우리가 창조주 하나님과 비교하여 우리 자신이 얼마나 왜소한지를 망각해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소홀히 취급되어 무질서해진 영적 중심부로는, 실패하거나, 수치를 당하거나, 고통을 당하거나, 사랑하는 사람이 죽거나, 고독할 때 등과 같은 위기의 순간에 대처할 저력이나 해답을 가질 수 없다.
4. 로마의 감옥에서도 혼자가 아니라는 확신을 가졌던 바울의 경우는 수년에 걸친 영적 훈련에서 비롯된 것이며, 그를 둘러싼 그 어떤 외부세계와 상관없이 하나님과 그만이 만나는 장소 곧 영적 정원을 가꾼 덕분이었다. 내면세계라는 그 부분만큼은 철저히 개인적인 것이다. 그것은 지금까지 은밀히 계발되어왔고 앞으로도 은밀한 채로 남아있을 영역인 것이다. 그것은 나와 하나님만의 영역인 것이다.
11. 외부의 어떤 받침대도 필요치 않다.
*.그리스도인들이 무시해 버리지만 기본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는 영적훈련 방법은 영적훈련의 1번째 방법은 고독과 침묵을 발견(추구)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찾아야 하는데 그 분은 시끄럽고 불안정한 상태에서는 만나지지 않는다. 하나님은 침묵의 친구이시다. 우리의 영혼을 울리려면 침묵이 필요하다. 영적훈련의 2번째 방법은 규칙적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다.
내면세계의 정원은 침묵과 고독을 위해 침잠해 있을 때뿐만 아니라 환경 속에서 의식적으로 듣는 훈련을 하기 시작할 때에도 계발된다. 듣기를 위한 다른 모든 방법의 기도가 될 수 있는 다른 실천방법은 일기쓰기가 좋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의 일부이다. 일기를 쓰고 있는 것은 사실상 하나님께서 내개 말씀하시고자 하는 내용일 수도 있음을 의식한다. 하나님의 영이 내가 생각하고 기록하려고 하는 일 가운데서 역사하신다고 생각한다. 일기쓰기의 주된 가치는 내면세계의 정원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고요하고 세미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도구로서의 가치에 있다. 일기쓰기는 고요히 침잠하여 아버지와 교제하는 데 있어 놀라운 도구가 되는 것이다.
12. 모든 것은 입력되어야 한다.
내면의 정원을 가꾸는 것이라고 일컫는 영적훈련은, 고독과 침묵을 추구하고 하나님의 속삭임을 들으려고 하는 그리스도인들의 마음가짐에 달려있다. 그러나 우리가 고독과 침묵 속에서 듣는 것들은 내면화 되어야 한다. 영적훈련의 3번째 방법은 사색과 명상(묵상)의 체험으로 이루어진다.
명상은 우리의 영을 천국의 주파수에 맞추는 것과도 같은 것이다. 적당한 양의 시간, 침묵, 혼자 있을 수 있는 환경을 선택할 때에만 수행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성경 본문을 택하여 그 말씀이 그저 자아의 가장 깊은 속으로 들어가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면 여러 가지 형태로 결과들이 나타나는데 그것은 곧 속죄, 확신, 찬양과 감사를 드리고자 하는 마음 등이다. 때때로 하나님의 성품이나 그 분의 행동에 대한 명상을 통해, 우리 마음은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려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되거나 새로운 방향을 얻게 된다. 사색하고 명상하는 훈련에 있어, 먼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우리는 듣는다. 그러면 그 메시지는 우리의 가슴속에 입력된다. 그리하여 우리가 의지하던 외적 버팀대들은 하나씩 치워진다. 그리고 우리의 내적인 정원은 더 풍성히 가꾸어진다. 결국 영적 훈련을 거치는 사람들은 그 내면세계가 보다 강건해지는 것이다.
13. 하나님의 시각에 맞춰진 안목
위대한 성인들이 성자로 불리게 된 것은 가장 사소한 행동조차도 하나님께 알리는 습관이 있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 안에서 살았다. 그들은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사랑의 동기에서 행동했다. 그들은 타인의 그럴싸한 의견에 노예가 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기 인식의 노예가 되지도 않았다. 영적훈련의 4번째 방법은 예배와 중보로서의 기도를 통해서이다.
자신의 기도생활이 잘 되어가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사람은 별로 없다. 이것은 그토록 많은 사람들의 내면세계의 정원이 무질서한 상태에 있는 주요 원인이 된다. 1. 많은 사람들이 기도의 문제에 대하여 갈등하는 세 가지 이유를 제시한다.
*.예배와 중보기도를 부자연스럽게 여기기 때문이다.
기도야말로 실질적이고도 의미심장한 행동으로서 실로 시공을 초월하여 살아계신 하나님께 이르는 것 이라고 믿게 되기 전까지 예배와 중보기도의 습관을 결코 가질 수 없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기도가 생활의 자연스러운 일부가 아닌 것처럼 여기는 우리 자신을 극복하려는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예배와 중보기도는 우리들의 약함에 대한 묵시적인 시인이기 때문이다.
예배와 중보기도를 하기 어려운 것은 이 행동들이 본질상 인간의 나약함을 시인하는 것이라는 데 있다. 기도함으로써 우리의 내적정원에서는 우리가 생각을 아뢰고 있는 그 분께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는 인식이 싹트게 된다.
*.기도는 때때로 현실적인 결과와 무관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예배와 중보기도는 나 자신의 목적에 하나님이 맞추어 주시기를 구하는 것 이라기보다는 그 분의 목적에 나를 맞추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주님, 당신의 뜻이 저의 뜻이 되기를 원합니다.”라는 기도가 온당한 기도라 할 수 있다.
2. 기도의 내용
*.찬양: 기도 안에서 찬양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을 깊이 생각하고, 그 분 자신에 관해 계시해 주신 것들에 대해 감사함으로써 경배를 시작한다. 우리의 영으로 하여금 오래 전부터 지금까지 그 분이 하신 일들에 대해 깨닫게 하는 것과 또한 그 분 자신에 대해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는 것들을 기뻐하도록 하는 것이다.
*.고백: 위대하신 하나님의 빛 가운데서는, 우리 자신, 즉 하나님과 비교된 우리 자신의 모습이 어떠한가에 대하여 정직할 수밖에 없다. 자신에게서 불완전함과 악한 길을 찾는 성향을 직시하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깨어지면서 자신을 낮추는 경험을 날마다 가져야만 한다.
3. 중보기도의 사역
위대한 기도의 용사들은 충분히 예배를 드린 후에야 만이 중보기도를 시작할 수 있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하고 있다. 주님에 대한 경배가 다 드려졌을 때 중보기도는 시작될 수 있다. 중보기도는 다른 사람의 편에서 드리는 기도를 의미한다. 그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위대한 특권으로서 가장 위대한 사역이라고 생각하며, 아마도 가장 어려운 사역일 것이다. 어느 정도 지도자적인 책임을 갖고 있는 사람으로서, 날마다 중보기도로 나를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게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얼마나 든든하게 느껴지는지 모른다. 중보기도란 또한 우리가 세계선교에 대한 사명을 지녀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자신에 대한 청원과 요구를 주님 앞에 가져갈 수 있다. 우리의 내면세계에 있는 정원을 가꾸지 않은 채 내버려 두게 되면, 오래지 않아 그것도 온갖 잡초들로 어지럽게 덮이게 되어 그 곳에 거하시려는 하나님과 우리들 자신이 들어가기 싫은 곳이 되어 버린다. 너무 오래 무시해 버리게 되면, 그것은 정원 이라기보다는 쓰레기 버리는 곳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힘의 원천과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방향제시를 외부적인 것들에 의존하게 된다.
제 5 부 회 복
14. 여가 이상의 휴식
1, 규칙적으로 안식일적 휴식을 위해 일정한 시간대를 떼어놓은 사람은 일생을 균형 잡힌 안목으로 조망하고 탈진과 붕괴 상태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바쁜 공적생활 속에서 잠시 멈춤으로써 마음을 가다듬는 법을 아는 것은 중요하다. 우리들의 일상생활에 있어서 멈춤이라는 참된 휴식의 의미를 깨닫고 그것을 추구하는 자세가 없을 때에는 내면세계의 질서를 기대할 수 없다. 모든 역사의 시작부터 이것은 건강한 삶을 위한 자명한 이치가 되어 왔다. 그러나 불행히도 성취욕과 욕심에 끌려 다니는 사람들은 이 원리를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다.
2. 하나님께서 휴식과 일의 리듬을 창조세계에 심어 두셨고, 또한 어느 누구보다도 먼저 하나님 자신이 그 리듬을 지키심으로써 그 진리를 계시하셨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그 분은 우리의 내면세계에 질서를 유지하는 열쇠를 친히 보여 주신 것이다. 이 휴식은 사치가 아니라 성장과 성숙을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휴식의 의미가 왜곡된 여가나 오락은 내면세계에 어떠한 질서도 가져다주지 못한다. 재미있는 시간이나 기분전환, 웃음, 레크레이션 등을 추구하는 것 자체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육체를 위한 순간적인 휴식은 줄 수 있을지라도 내면세계 내부에 있는 휴식에의 깊은 욕구를 만족시켜 줄 수는 없는 것이다. 안식일적 휴식은 내면세계 가장 깊숙이 스며 있는 피로감에 까지 침투해 들어간다.
*. 안식일적 휴식의 의미
1.하나님이 제정하신 휴식은 첫 번째로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에게 우리의 일을 해석하고, 그 일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 일이 누구에게 바쳐져야 바람직한지를 확실하게 알게 하려는 의도로 만들어 진 것이다.
2.성경적 의미의 휴식이 내면세계에 질서를 회복시키는 데에는 또 하나의 길이 있다. 진정한 휴식은 우리가 일상생활의 와중에서 정기적으로 멈춰 서서 우리의 삶의 근거가 되고 있는 진리와 헌신을 정리해 낼 때 이루어진다. 우리는 날마다 어떤 것을 결정하고 가치판단을 해야 하며, 또한 우리의 자원과 시간을 투자하도록 요청받고 있다. 하나님의 의도는 이러한 일들에 대한 결정들을 깊이 다를 수 있도록 일주일 중 하루를 취하게 하는 것이다. 사실 그 분은 매년 일련의 축제기간을 따로 떼어놓아 영원한 진리의 중심 주제들과 하나님의 행위가 기억되고 기념되도록 하셨다. 우리는 그것을 영혼의 재조정이라고 부를 수 있다. 안식일에는 시간 속에서 거룩함에 맞추려고 애쓰는 것이다. 그 날은 시간 속에서 영원한 것을 서로 나누고, 창조의 결과로부터 창조의 신비에로, 창조된 세계로부터 세계의 창조로 시선을 돌리도록 부름받은 날이다. 휴식은 나의 일의 의미와 내가 최근 내 삶 가운데 걸어온 길의 의미를 회상해 보는 것만이 아니라 그것은 또한 그리스도에 대한 나의 믿음과 헌신을 새롭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내면세계의 나침반을 잘 조절하는 것과 같아서 다음 한 주간을 잘 살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성경적 의미에서 휴식을 취할 때, 우리의 생각이 그리스도 중심적인 내일의 삶을 추구하는데 모아지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다. 우리는 다음 주 다음 달 혹은 내년에 어디로 향해 갈 것인지를 숙고하게 된다. 우리의 생각을 분명히 하고 그에 따라 헌신을 다짐하게 되는 것이다.
3.세속적 여가의 재미보다 안식일적 휴식의 평화를 선택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는가?
*.안식일적 휴식은 그리스도인 가족끼리의 예배를 의미한다. 올바른 예배 안에서 우리는 내면세계의 휴식으로 이끄는 세 가지 측면, 즉 뒤돌아보고, 위를 보고, 앞을 내다보는 것 모두를 연습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될 것이다.
*.안식일은 개인 생활에 있어 휴식과 고요함을 사려 깊게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사역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우리 아이들과 교인들에게 쓸모 있는 사람이 되고자 한다면 우리는 영적 재충전을 위하여 이 안식일을 최대한 지켜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여기에 어떤 율법적 구속은 없다. 오히려 은혜를 받아들이는 자유가 있을 뿐이다.
4.우리가 이러한 노력을 꾸준히 계속한다면 그 결과는 엄청나게 큰 것임을 알게 된다. 우리의 내면세계는 실로 확실하게 질서를 되찾았을 뿐만 아니라, 다른 날들의 시간도 훨씬 능률적으로 사용하게 된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안식일을 잘 지킴으로써 내면세계에 휴식이 가득 찬 질서를 세우게 되면, 그 후의 다른 날에 훨씬 더 큰 지혜와 훌륭한 판단력으로 공적세계에서 일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일을 다 했기 때문에 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휴식을 명하셨고 휴식이 필요하도록 우리를 만드셨기 때문에 쉬는 것이다. 세상과 교회는 참으로 휴식을 취할 줄 아는 그리스도인을 필요로 한다. 그런 그리스도인은 여가가 아닌 진정한 안식일적 휴식에 의하여 규칙적으로 새롭게 되는 사람들이다.
▶ 물 레 질 ◀
1.마하트마 간디는 그의 삶의 중심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보였던 물레질을 통하여 내면의 질서감각, 겸손, 그리고 지혜와 판단력을 유지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공적생활과 개인생활의 균형감각을 유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 역시 우리의 내면세계가 끊임없이 강하고 생명력 있게 개변될 수 있도록 질서 잡는 일이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는 외부세계의 활동에 주력함으로써 내면세계에 질서를 부여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이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고, 위대한 신앙인들이 보여주며, 우리의 쓰라린 영적체험이 계속해서 증 거하는 것과는 정반대인 것이다.
2.다른 어떤 일보다도 영적 훈련이 훨씬 중요한 활동이라는 것이라고 결단할 때에만 우리는 내면세계의 공간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3.우리가 왕이신 예수를 바라보기 시작하는 것, 그것이 중심을 이루는 것이다.
내면의 중심부에서 우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의 광채와 위엄에 대해 경외심을 느낀다. 그곳에는 엄숙하지만 기쁨이 충만한 예배가 있다. 그 곳에는 고백과 통회가 있다. 그리고 그 곳에는 용서와 회복과 확신이 있는 것이다.
내면의 중심부에서 우리는 성령이신 하나님의 힘과 능력으로 충만해 진다. 그 곳에서 자신감과 기대가 되살아난다. 거기서 우리는 통찰력과 지혜를 부여받으며, 산을 움직일 만한 믿음이 생겨나고 사랑할 수 없는 사람까지 포함하여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이 자라기 시작한다.
4. 그리스도인이 공적세계에서 일하기 전에 먼저 내면세계를 정돈하게 되면 이 모든 것이 가능하게 될 뿐만 아니라 그 이상도 이룰 수 있다. 그것이 우선되지 않으면 함몰웅덩이 증상이 초래되는 것이다.
언제나 자신이 누구이며 삶의 모든 현실적인 일들이 궁극적으로는 무엇을 위한 것인가 하는 문제를 상기시켜 주었던 그 물레질이란 시간사용이 우선순위에 따라 정돈되고, 마음이 하나님의 창조적 사역에 눈뜨기 위해 주파수가 맞추어지고, 영은 예민해지고, 안식일적 휴식의 평온함이 있는 고요한 중심부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면세계인데, 적절한 주의를 기울이면 질서로운 상태를 유지할 수 있게 된다.
★ 내면세계가 무질서한 사람들을 위한 조언 ★
1.영적영역인 내면세계가 행동영역인 외면세계를 다스려야 한다고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2.내가 이러한 질서로운 상태를 지키기로 매일같이 선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3.하나님에 의해 만들어진 계획 방식이 아닌 무질서했던 과거로부터 형성되었던 방식을 따라 살려는 경향이 내게 있음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4.나를 재촉하여 몰아대는 것에 감연히 맞서서 주님의 부르심에 조용히 귀 기울이기 때문이다.
5.나 자신을 나의 목적, 역할, 신분의 주인으로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청지기로서 여기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6.내가 시간을 하나님의 선물로 여기고 신중하게 사용하려는 결심을 매일매일 하기 때문이다.
7.시간이 새어 나가는 것을 막고 내 능력과 한계와 우선순위에 준해 일할 수 있는 시간을 할당하기 때문이다.
8.내가 날마다 지식과 지혜안에서 성장하기로 결신했기 때문일 것이다.
9.그리스도께서 그러하셨듯이, 내가 배운 모든 것들을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데 사용하려고 애썼기 때문이다.
10.늘 나의 삶의 영적 중심부를 넓히기로 결심하기 때문일 것이다.
11.그리스도 앞에서 홀로 고요한 시간을 갖기를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12.그리스도의 말씀이 나의 태도와 행동에 배어 있기 때문이다.
13.내가 그리스도의 눈을 통하여 사건과 사람을 바라보는 훈련에 임하기 시작했고, 그로 인해 나의 기도는 그 분의 계획과 약속의 말씀에 맞추어지길 원하는 나의 갈망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14.내가 하나님께서 그 분 자신과 모든 인류을 위해 제정하신 안식을 발견하기 위하여, 매일 분주한 일상생활 속에 안식일적 평화를 굳게 붙잡기로 선택했기 때문일 것이다.
15.그 질서를 잡는 일을 지금 당장 시작하기로 기꺼이 결단하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