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양단

제목[목사님컬럼] 독서와 기도에 힘쓰는 사역자가 되어주라2024-03-27 14:22
작성자 Level 10

독서와 기도에 힘쓰는 사역자가 되어주라

 

소위‘얼굴책’이라고 말하는 페이스북(facebook)에 내 페이지를 열고 살아가며 이 시대의 목사로서 나눌 수 있는 이야기들을 지인들과 함께 하기 시작한 지가 이제 3개월이 되어 갑니다. 페이스북을 열고 관리를 하지 못하면 게으른 자로 또 생각도 안 하고 사는 무능하다는 소리를 듣기도 할 것 같아 망설이다가 용기를 냈는데 이제 제법 많은 친구들과 교제를 하며 은혜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하기를 잘 한 것 같습니다. 지난 주일, 사역을 마치고 너무나 여유롭고 행복한 시간을 서재에서 보내면서 느낀 감동을 하나 뉴스피드에 다음과 같이 올렸습니다.

“주일 사역을 온전히 마치고 가장 행복하고 여유로운 시간 서재에서 고든 콘웰 신학교에서 신약을 가르쳤던 데이빗 고든이 쓴 '우리 목사님은 왜 설교를 못하는가? 집어 들고 조용히 그와 동행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읽다가 멈추어 몇 번이고 되 뇌이며 언더라인을 한 문구가 있습니다. 정보를 읽는 것과 텍스트를 읽는 것은 천양지차다. 정보를 읽을 때는 '내용'에 집중하지만 텍스트를 읽을 때는 '주제'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중략)”

페이스북에 올렸던 이 글을 읽은 사랑하는 친구인 한세대 차준희 목사가 저에게 다음과 같은 댓글을 하나 올려놓았습니다.

"(중략) 독서와 기도에 힘쓰는 사역자가 되어주라"

친구의 진정성 있는 충고가 일주일 내내 머릿속에서 맴돌았습니다. 우리 교우들이 잘 아시는 것처럼 저는 요즈음 가을 열린 모임 사역을 아름답게 감당하기 위해 여러분과 함께 금식을 하며 정해진 곡기를 줄여가며 기도에 정진하고 있습니다. 이런 차에 친구의 충고를 들어서 그런지 가슴에 아림이 있었습니다. 이제 목회의 후반전으로 막 들어선 저에게 기쁨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하는 후배들이 엄청난 독서를 감당하면서 지성에 있어 앞서나가고 있다는 기쁨입니다. 아마도 21세기를 살면서 감내해야 하는 목양의 현장에서 독서는 목사들에게 필수적인 요소가 아닌 둣 싶습니다. 약 한 달 전 즈음, 캐나다에서 사역을 하고 있는 후배가 페북을 통해 책을 한 권 소개했습니다. 에드워드 윌슨의 ‘통섭’(consilience)이었습니다. 구입해 책을 읽으면서 진도가 다른 여타 책보다 너무 느리게 나감을 통감했습니다. 사전적인 기초 지식이 한참이나 모자란 자연과학적인 무지에서 오는 결과였습니다. 자존심이 상했지만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투쟁하며 책을 읽다가 감탄을 했습니다. 후배가 벌써 이런 책과 소통하고 있음에 대한 감동 때문이었습니다. 후배들이 이렇게 지적 영역에서 진일보하고 있음이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또 다른 한편에서 왠지 모를 불안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친구의 댓글이 일주일 내내 머릿속에서 빠르게 운동을 한 이유이고 한 것이었는데 기도의 영력이 함께 성장하고 있는가? 의 노파심이었습니다. 친구가 말한 그대로 ‘기도에 힘쓰는’이라는 바로 그 부분이었습니다. 지성만을 추구하는 목회자에게 무슨 영적인 능력이 있겠습니까? 그곳에 무슨 획득된 권위가 있겠습니까? 그곳에 무슨 성령의 통치하심이 있겠습니까? 부족한 종을 여기까지 도달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신 선배 목사님들은 폰 라드가 누구인지, 칼 바르트가 누구인지, 본 회퍼가 누인지, 윌터 브루그만이 누구인지는 몰랐지만 양복바지는 항상 구겨져 있었던 분들이었습니다. 그 분들의 상당수의 침실은 강대상 위였습니다. 그러했기에 그 분들의 영성은 후배인 제가 감히 따라가기가 버겁습니다. 오늘의 시대를 둘러보면 주변에 똑똑한 목사들은 너무나 많은 세대에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땅을 치며 통곡하며 우는 목사는 드문 것 같아 유감스럽습니다. 그래서 저 역시 긴장이 됩니다. 친구의 말 대로 독서와 기도 이 두 마리의 토끼를 놓치지 않는 균형을 잃지 않는 목사가 되도록 최선을 다해야할 것 같습니다. 고백하지만 저 역시 강대상 위보다는 서재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하는 뻔뻔스런 목사입니다. 친구의 충고가 정신을 번쩍 들게 합니다. 그래서 실천해 보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