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찬양하기 : 찬송가 357장 - 주 믿는 사람 일어나
2. 큐티본문 : 느헤미야 5:1-19
3. 큐티날짜 : 2011년 6월 20일
4. 말씀요약
느헤미야는 평신도 사역자로 흠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의 완벽한 하나님의 종이었다. 성벽 재건이라는 한 가지 목적을 향하여 달려갔고 그 목적을 위해서 최선을 다해 갔던 사람이었다. 외부적인 성벽 재건의 방해자들을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집중력으로 물리쳤고 특별히 영적인 공격과 방어를 동시에 조화롭게 감당했던 감동을 4장에서 보았다. 5장에서는 외부적인 공격을 승리를 이끌었던 느헤미야가 이제는 그 반대로 유다 신앙공동체 안에 고질적으로 부패되어 있었던 내재적인 문제들에 직면하여 굴하지 않고 그가 가지고 있었던 리더십을 발휘해 또 다시 승리했던 감동의 은혜를 만나게 된다. 5장의 가장 큰 이슈는 예루살렘 신앙공동체 안에 있었던 빈부의 문제, 가난한 자들의 자녀들이 돈 때문에 인신매매되는 기막힌 현실 그리고 지도자들의 부패였다. 이것이 성벽 재건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되었음을 보고한다. 예를 들자면 가난한 사람들의 생활고, 그들이 가난할 수 밖에 없었던 사회 구조적인 문제, 더불어 지도자들의 도덕적 해이까지 공동체 내부의 보이지 않는 벽에 금이 감으로 인하여 하나가 되어 사역을 해도 될까 말까 한 예루살렘 성벽 재건의 최대의 난적으로 등장해 느헤미야를 괴롭혔다. 이러한 시련을 느헤미야는 단호하게 영적 리더십을 발휘하여 지혜롭게 극복한 본 장을 통해 적지 않은 도전을 받게 된다.
5. 나에게 주신 말씀과 적용
1) 힘을 빼앗지 말라 (5절)
“우리 육체도 우리 형제의 육체와 같고 우리 자녀도 그들의 자녀와 같거늘 이제 우리 자녀를 종으로 파는도다 우리 딸 중에 벌써 종 된 자가 있고 우리의 밭과 포도원이 이미 남의 것이 되었으나 우리에게는 아무런 힘이 없도다 하더라”
유다 신앙공동체가 조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조국 땅 예루살렘에서의 삶은 녹록하지 않았다. 이유는 약한 서민들이 겪고 있는 겹겹의 고통 때문이었다. 인구들이 많아졌고 설상가상으로 닥친 흉년으로 인한 식량부족 현상, 이 고통의 틈새를 이용하여 고리대금업을 통해 부를 축적하던 악덕 민장(ruler)과 귀인(noble men), 그리고 바사에 내는 세금이라는 삼중고로 인하여 심각한 어려움을 서민들은 당해야 했다. 식민지 국가의 설움이라는 아픔을 전제하여 국가적으로 내는 세금이야 어쩔 수 없다 치고 같이 어려움을 분담하고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고통 분담을 함께 나누어야 할 민장들과 귀인들은 도리어 민중들을 압제함으로 성벽 재건이라는 시대적인 성역을 감당하는 것 자체에 힘이 빠지게 하는 암적인 요소로 작용하기에 이르렀다. 오늘날의 교회 공동체 안에도 이런 일들은 비일비재하다. 하나님의 귀한 사역을 감당하는 데에 있어서 그 사역을 방해하는 것은 힘이 빠지게 하는 내적인 공격이다. 사역의 영적인 부담을 함께하는 것은 마땅히 공동체의 지체들이 함께 짊어져야 하는 분깃이다. 그러나 도리어 지도층에 있는 자들이 하나님의 역사를 담부치 않았던 3장의 드고아의 귀족들처럼 힘을 빼는 일들을 자행하곤 한다.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힘을 주는 일이지 빼앗는 것이 아니다. 고리대금업으로 자기들의 배를 채우는 민장과 귀인들을 보며 새기는 것이 있다. 나는 힘을 불어넣는 사람인가? 아니면 빼앗는 사람인가? 귀담아야 하는 레마이다.
2) 들을 귀 (12-13절)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가 당신의 말씀대로 행하여 돌려보내고 그들에게서 아무것도 요구하지 아니하리이다 하기로 내가 제사장들을 불러 그들에게 그 말대로 행하겠다고 맹세하게 하고 내가 옷자락을 털며 이르기를 이 말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모두 하나님이 또한 이와 같이 그 집과 산업에서 털어 버리실지니 그는 곧 이렇게 털려서 빈손이 될지로다 하매 회중이 다 아멘 하고 여호와를 찬송하고 백성들이 그 말한 대로 행하였느니라”
서민들의 고통을 들은 느헤미야는 거룩하게 분노했다. 5-13절을 통하여 느헤미야는 고리대금업을 통하여 악한 일을 하고 있는 자들에게 4가지를 권고하기에 이른다. 첫째, 돈을 갚지 못한 이유 때문에 그 빚의 변제의 방법으로 사람을 매매하는 일을 당장 그만두라는 서슬이 시퍼런 명령(8절)과 둘째, 하나님이 보시기에 옳지 않은 일체의 일들을 버리고 신앙의 본질로 돌아오라는 것(9절)과 셋째, 고리대금은 반드시 척결해야 하며(10절), 마지막으로 채권자들에게는 탕감의 은혜를 베풀 것을 권고하였다.(10절) 당시 느헤미야의 이런 권고가 강력하기는 했지만 반드시 해야 하는 법적인 효력은 없었다. 그러기에 물질적으로 있는 자들과 정치적으로 지도급에 있는 자들인 그들이 느헤미야의 권고를 무시해도 하등의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이 된다. 그런데 결론이 무엇인가? 그들이 느헤미야의 권고에 순종했다는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었을까를 깊이 묵상했다. 두 가지 일 것이다. 느헤미야의 카리스마틱한 리더십이 전제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 가지고는 설명이 부족하다. 무엇이었을까? 당사자들의 들을 수 있는 귀였다. 그 동안 본인들이 잘못과 오류를 인정하고 느헤미야의 권면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열려 있는 귀가 그들에게는 있었다. 묵상을 하다가 진한 감동이 왔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 축복인가를. 지난 주간 철야의 과정에 찬송가 357장을 부를 때 요한일서 5:4절 말씀이 크게 들렸다. 그리고 성령은 이렇게 조명하셨다. ‘아들아, 큰 믿음을 가지라’ 말씀이 들리는 귀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했다. 그리고 행복했다. 동시에 거룩한 욕심이 생겼다. 하나님, ‘지속되게 하옵소서’의 욕심 말이다.
3) 삶으로 가르치는 것만 남는다.
“나보다 먼저 있었던 총독들은 백성에게서, 양식과 포도주와 또 은 사십 세겔을 그들에게서 빼앗았고 또한 그들의 종자들도 백성을 압제하였으나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이같이 행하지 아니하고” (15절)
내부적인 유다 공동체의 누수를 막는데 성공한 느헤미야는 자신의 신변을 지체들에게 고백하였다. 잘 아시는 것처럼 느헤미야는 유다 사람이기는 하였지만 당시 그의 신분은 바사의 관원이었다. 그는 바사의 아닥사스다 왕의 총애를 받고 있는 술 관원이었다. 그는 바사 제국의 국고에서 나오는 상당량의 월급을 받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유다의 총독의 신분으로 파송되어 유다 땅으로 넘어와서 총독의 신분으로 유다의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면서는 바사제국에서 주는 녹을 먹지 않았다는 것이다.(14절) 동시에 그는 이전 총독들처럼 불의한 방법으로 재산을 취하거나 백성들을 압제하면서 자신의 부를 늘려가지 않았음도 고백하였다. 한 발 더 나아가 권력을 갖고 땅 투기의 이익을 구하지도 않았다고 실토하였다.(16절) 왜 그랬을까? 묵상하는 동안 얻은 정답 구절이 나에게 인상 깊게 남아 있다. ‘나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가 정답이다. 하나님의 교회가 건축 중이다. 현직에서 목회를 하는 목사에게 양날의 칼과 같은 것이 교회 건축이다. 섬기는 교회를 건축하여 하나님께 일평생 한 번 봉헌하여 드린다는 것은 말할 수 없는 복이며 은혜임을 안다.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특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양날의 칼이라는 표현은 교회 건축은 목회자가 가지고 있는 조금의 경제적인 여유도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목사는 천주교회의 신부와 불교의 스님과는 달리 가정을 갖고 있다는 특수함이 있는 성직자이다. 그러기에 현실적으로 가정을 다스려야 한다는 또 하나의 거룩한 성직이 있다. 이번에 교회 건축을 감당하면서 내가 할 수 있는 물질적인 여력이 무엇이 있나 를 살펴보았다. ‘없다.’가 정답이었다. 굳이 가지고 있다면 교회를 개척하면서 친척에게 빌린 채무금을 갖고 있는 전부였다. 그리고 또 하나 이제 얼마 남지 않은 퇴직금이다. 아내가 먼저 이야기를 했다. 채무금의 변제를 친지이지만 분명히 채권자인 상대방에게 무릎으로 사정하자고. 변제의 날짜를 장기간으로 연장해 줄 것을. 그리고 남은 퇴직금과 2012년까지의 퇴직금까지 하나님께 드리기로 말이다. 이런 말이 있다. 내가 하면 로맨스이고 남이 하면 불륜이라고 한다. 목사가 건축을 하면서 드려야 하는 피 말리는 헌금은 당연하다고 한다. 그러나 평신도들이 드리는 헌금은 아깝다고 안타까워한다. 이것이 현실이다. 아내에게 미안하다. 정말로 미안하다. 그런데 목사는 이런 고통도 감내해야 한다. 왜 그런가? 삶으로 가르치는 것만 남기 때문이다. 세인교회를 목회하면서 목사도 인간인지라 다른 어떤 지체들보다 군사1기에게 투정 아닌 투정을 부려본다. 목사의 진정성을 이해해달라는 투정 말이다. 그리고 목회자를 불쌍히 여기는 사랑을 요구하면 배부른 투정일까?
6. 기도
아버지라는 남성성만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품어주시는 여성성까지 갖고 하나님.
오늘은 이 종이 어머니 같은 하나님을 불러봅니다.
사역이 힘이 들지만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종에게 힘을 주시고 삶으로 가르치는 것만이 남는다는 것을 알기에 인내합니다.
어머님 같은 하나님.
종에게 힘을 주옵소서.
느헤미야에게 주셨던 그 힘과 지혜를 종에게도 허락하여 주옵소서.
우리 세인교회는 힘을 불어넣는 공동체가 되게 하시고 들을 귀 있는 지체들로 훈련 받는 공동체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