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양단

제목[서평] 존 스토트의 [제자도](강추)2024-03-27 11:25
작성자 Level 10

20세기의 탁월한 복음주의 지도자 존 스토트가 말하는 제자의 자질!


현대 기독교 지성을 대표하는 복음주의자이자 신약학자인 존 스토트가 말하는 제자도『제자도』. 존 스토트가 88세의 나이에 마지막으로 펜을 들면서 평생의 헌신을 마감하고, 제자도의 가치를 재확인하는 메시지를 전하는 책이다. 자신이 생각하는 온전한 제자상을 강렬하게 그려내며, 총 8장에 걸쳐 제자의 자질을 설명하고 있다. 종종 무시되지만 진지하게 고민할 가치가 있는 기독교 제자도의 8가지 특성을 깊이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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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소믈리에 한마디!
불순응, 닮음, 성숙, 창조 세계를 돌봄, 균형, 의존, 죽음 등 예수를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의 8가지 특징을 살펴본다. 존 스토트가 은퇴한 뒤 머물고 있는 세인트바나바 칼리지의 공동체에서 썼다는 이 책은 저자만의 명쾌함과 힘찬 열정, 그리고 죽음을 가까이 둔 영적 거인의 인간적인 면모를 잘 보여준다. 제자 훈련을 하는 목회자와 평신도,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길잡이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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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도, 존 스토트, IV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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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인가? 그리스도인인가?

 

“The Radical Disciple"

왜 제자인가?

- 진정한 제자도는 전심을 다하는(wholehearted) 제자도이다.(눅 6:46)

왜 급진적인가?

- 근본적인 문제를 들추어내고 대의에 철저하게 헌신한 이들을 가르킨다.

왜 급진적 제자인가?

- 우리가 예수님께 복종할 영역들을 취사선택할 권리가 없다.

“우리의 부족한 찬양과 영광과 능력을 받기에 합당하신 예수. 영원히 주 되시옵소서.” Isaac Watts.

 

제1장 불순응

 

내용요약

존 스토트는 그의 마지막 책 'The Radical Disciple'에서 급진적 제자의 첫째 특성을 '불순응'(non-conformity)으로 일컫는다. '세상에서 도피하여 거룩함을 보존하려해서도 안되고, 세상에 순응하여 거룩함을 희생해서도 안 된다'는 그의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성경의 율법서, 예언서, 예수님의 가르침, 사도들의 가르침에 나타난 부르심-주변문화를 따르지 말고 타협하지 말고 참여하여 그것을 바꾸라는 부르심을 설명하면서 우리가 맞서야 할 네 가지 현대사상을 이야기한다.

 

그 첫째는, 모든 '-주의'가 타당성이 있고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고 말하는 '다원주의'이다. 다원주의는 유일하고 최종적이라는 기독교의 주장을 순진한 오만이라 여긴다. 이에 대해 우리는 개인적 우월감을 비치지 않는 지극한 겸손으로 대하되 그분의 유일한(the Only) 성육신, 유일한 속죄, 유일한 부활, 그의 유일한 자격, 그리고 그 모든 최종성에 대해 계속 주장해야 한다.

 

둘째, 영적인 삶을 질식시킬 만큼 물질적인 것에 사로잡혀 있는 '물질주의'이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바울이 경고했듯 검소하고 관대하며, 자족하는 생활방식을 이어가야 한다. 자족, 검소, 관대(딤전 6:6). 짐이 가벼워야 순례의 길을 갈 수 있다.

 

셋째, '윤리적 상대주의'이다. 사람들이 혼란스러워하고 절대적 기준이 잠식당하고 있다. 특히 1960년대 이후 성(性) 혁명 이후 이 부분에서 급격한 도덕적 해이가 일어나고 있다. 우리의 윤리적인 결정이 완벽할 수는 없으나 각각의 상황에 성경적 원리를 적용하는데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하며, 그리스도인의 행동의 토대는 바로 '예수가 주님'이시라는 사실에 있다. 교회 앞에 놓인 질문은 '누가 주님인가'(예수가 주님이다)라는 것이다. 문화, 체계, 기준, 생활방식이 세상의 방식과 주인되신 주님이 기뻐하시는 방식 두 가지로 나뉜다. 급진적 제자들의 선택은 그리 어렵지 않다.

 

넷째, '나르시시즘'의 도전이다. 이것은 자아실현의 욕구를 강조한 인간 잠재력 회복 운동으로 나타나서 뉴에이지 운동의 편승을 이끌었다. 이런 가르침이 교회에 침투해서 하나님과 이웃사랑뿐 아니라 '자신도 사랑해야 한다'라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것은 틀린 것이다. 자기를 사랑하는 것은 말세에 나타나는 징표 중 하나다.(딤후 3:2) 아가페 사랑의 의미는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다. 자기긍정과 자기부인이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즉, 창조와 구속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있게 된 것은 모두 긍정하고, 타락으로 인한 것은 부인해야 한다.

“사랑하지 않는 자는 살아 있지 않는 것이다.” Raymond Lull

 

이런 풍조들 앞에서 우리는 나약하게 세상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라 철저하게 세상을 따르지 않는 삶으로 부르심을 받는다. 예수그리스도의 유일성을 옹호하는 진리의 공동체로 다원주의에 맞서라! 검소한 순례자의 공동체가 되어 물질주의의 도전에 맞서라!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 나르시시즘에 맞서라!

“죽은 물고기만이 흐름을 따라간다.” 말콤 맥거리지

환경에 따라 자기 색을 바꾸는 카멜레온이 되지 말라.(롬 8:29)

 

생각

우리가 거슬러야 할 현대의 4풍조가 내 안에 가득함을 본다. 성경의 진리에 뿌리박지 못하여 상대적인 생각에 사로잡히기도 하고, 나 자신을 사랑하는 욕구로 사역과 일들을 벌이기도 하며, 다른 이를 섬기는 것조차 내 이익을 위한 때가 있다는 사실이다. 자기부인을 강조하고 그것의 당위를 알지만 이기적이고 내 인정과 명예에 집착하는 모습을 본다. 내가 속한 공동체는 어떨까. 우리 가정교회는 이런 현대의 4풍조에 어떻게 맞서고 있는가. 우리 가정과 우리 신앙공동체는, 세상에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 않은 그런 공동체로 살아야겠다는 용기가 선언만 있어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 같다. 구체적인 행함 그것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위 4가지에 맞서기 위해서는 말씀에 집중하고 몰입하는 것, 그것만이 유일한 시작이고 길이다. 그리고 그것을 공동체 안에서 나누고 그 연구된 바가 삶으로 열매 맺으며, 서로에게 도전하고 서로 앞에서 고백해야 한다.

 

 

제2장 닮음

 

내용요약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그리스도처럼 되기를 바라신다.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다. (35)

 

로마서 8:29, 고후 3:18, 요일 3:2에서 언급하듯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셨다. 그것은 영원히 예정된 하나님의 목적이다. 또한 성령을 통해 지금 우리를 변화시키신다. 그리고 그분이 자신과 동역하도록 부르신 것이다. 즉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처럼 되어야 한다.'(37)

 

하나님에게는 분명한 목적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미리 정하심을 받았다는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 우리가 성령에 의해 변화되고 있다는 하나님의 역사적인 목적, 또한 우리가 그분처럼 될 것이라는 최종적인 종말론적 목적이다. 이것이 성경적 기초이다.

 

신약에서 바울이 가르치는 바는, 우리는 빌립보서 2장의 말씀처럼 그분의 성육신하신 위대한 겸손의 본을 따르도록 본을 받았으며(2:5 -8), 제자들과의 마지막 밤에 발 씻김으로 보이신 섬김의 삶을 닮아야 한다.(요 13:14-15) 또한 자기 몸을 내어주신 십자가의 사랑으로 살아야 한다.(엡 5:2, 21) 오래 참으신 주님(벧전 2:18,21), 선교의 사명(요 17:18 ; 20:21) 베드로가 가르친 것처럼 여러 문화에서 박해가 점증하고 있는 오늘날 상황 속에서 부당하게 고난당하신 그리스도를 닮아가라는 명령이 우리에게 주어졌다. 또한 요한의 복음에 있는 말씀처럼 우리가 세상에 보냄을 받았다는 인식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성육신적 선교의 정신이다.

 

그리스도를 닮아갈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그 세 가지 결과는 첫째가 고난의 신비요, 둘째가 복음전도의 도전이며, 마지막으로 성령의 내주하심이다. 고난은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스도를 닮은 존재로 만드시는 과정의 일부이다.(43) 복음전도의 도전이라 함의 내용은, 존 풀톤의 말을 빌면 “소통하는 것은 무엇보다 사람이지 말이나 개념이 아니다”. 즉 가장 효과적인 선포는 자신이 선포한 대로 사는 사람들의 선포이다.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일은 어떻게 가능한가. 바로 성령의 내주, 충만이 그 답이다.

 

생각

그리스도를 닮는다는 것을 추상적으로 말하지 말자.(reality) 성경은 분명하게 그리스도인 삶의 목적이 아들 예수를 닮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사실을 머리에 깊이 새기고 마음에 새기고 행동에 새기자. 겸손의 삶, 섬김의 삶, 사랑의 삶, 결코 쉬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성령의 충만을 입어 그의 능력에 힘입어 감당할 수 있어야 하고. 감당해야 한다. 세상에 있으나 속하지 않기 위해 인생의 명확한 목표, 비전이 있어야 함을 깨닫는다. 그것은 바로 예수그리스도 그분을 닮는 것이다. 다른 길, 다른 생명이 아니라 바로 예수가 길, 진리, 생명이시다.

 

 

제3장 성숙

 

내용요약

세계 교회가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으나 우리는 깊이 없는 성장 즉, '승리주의'에 빠져서는 안 된다. 세계 교회 지도자들이 수적 성장에 상응하는 제자도를 보이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골로새서 1장 28-29절을 통해 보자.

 

첫째 성숙의 본질은 무엇인가? 바울 사도는 영적 성숙을 그리스도 안에서의 성숙, 즉 그리스도와 성숙한 관계를 맺는 것이라 부른다. 성숙이란, 그리스도를 예배하고 신뢰하고 사랑하고 순종함으로 그분과 성숙한 관계를 맺는 것이다.

 

둘째,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성숙하는가? 제임스 패커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지적했듯이 "우리의 하나님이 왜소하기 때문에 우리는 왜소한 그리스도인"이다. 거짓되고 왜곡된 예수를 어설프게 모방하는 일이 많다. 진정한 성숙에 이르고자 한다면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선하고 참된 시각이 필요하다. 그분의 존재(하나님의 형상이자 하나님의 충만함)로 인해, 그분이 하신 일(창조 세계를 존재하게 하시고 화해를 가져오신)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는 이중적 우월성을 가진다. 그는 우주의 머리이며 동시에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예수는 어디서 찾을 수 있는가? 답은 '성부께서 그려내신 성자의 모습에 성령이 색을 입히신' 성경에서 찾을 수 있다. 깊이 없는 성장을 주의.

 

셋째, 이 성숙에 대한 부르심은 누구에게 주어진 것인가? 바울은 기독교 엘리트주의를 혐오하고 반대했다. 그는 영지주의 용어인 "텔레이오스"를 그대로 가져와 '각 사람' 즉 모든 사람에게 적용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성숙은 특별한 소수에게 열려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있다. 우리가 안수를 받았든 평신도 지도자든 간에, 우리에게는 그가 받은 것에 견줄 만한 목회적 책임이 있다. 따라서 우리는 바울의 목회적 목표에 주목해야 한다. 표면적으로는 회심자를 얻고 교회를 세우고 떠나는 것으로 보이나 그가 간절히 바란 것은 전도를 넘어 제자도로 나가는 것이며,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하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성경에 대한 무지함은 그리스도에 대한 무지함이다.

 

우리에게는 이중적 책임이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한 자가 되는 것은 우리 자신을 위한 목표이기도 하고 다른 사람을 위한 우리 목회 사역의 목표이기도 하다.

 

골 1:29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운동선수) 수고하노라(농부)”

 

생각

모든 이들에게는 사도 바울이 받은 책무에 견줄만한 목회적 책임이 있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고 감사하고 걱정하게 된다. 기독교 엘리트주의를 반대하면서도 특별한 이들에게 이런 의무가 주어졌다는 생각이 은연중에 내 생각에 자리 잡는 것은 아닌가? 교회에서 타이틀을 갖고 사역을 하면서 늘 기독교엘리트주의를 경계하였지만, 그래서 더 열심히 성경 연구와 학문연구에 탐독하고 사회에 대한 소양을 위해 애쓰지만, 그러면서도 한국교회와 사회가 갖는 한계를 절감하면서 타이틀을 따야 뭔가 할 수 있다는 유혹에 빠진다. 또 실제적으로 주위에서는 그렇게 늘 나에게 권유하고 그게 쉽고 빠르다고 말한다. 하나님 나라를 위한 영광스런 책임이 누구나에게-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열렸는데, 그런 논쟁과 권유와 내 고민이 무어 그리 중요한가. 나 스스로가 더욱 주님께만 매달려 성숙할 수 있는 환경으로 몰자. 그것이 분명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것이다.

이 모든 책임이 우리 사랑하는 가정과 신앙공동체 식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모두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심장이 고동을 친다.

 

 

제4장 - 창조 세계를 돌봄

 

내용요약

성경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할 때 기본적 관계를 세우셨다. 바로 1) 그분 자신과의 관계 2) 서로와의 관계 3) 선한 땅과 피조물들과의 관계이다. 타락으로 이 세 관계가 모두 왜곡되었다. 하나님의 회복 계획에는 하나님과 화해하고 서로 화해하는 것 뿐 아니라 신음하는 창조세계를 해방시키는 일 역시 포함되어 있다. '부활한 몸의 최종적인 운명에 대한 이해가 현재 우리 몸을 대하는 태도에 영향을 미치듯,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지식은 우리가 지금 이 세상을 대하는 태도에 영향을 미치고 그것을 더 귀중하게 다루게 한다.'(64)

 

"땅은 여호와의 것이로다"(시 24:1)와 "땅은 사람에게 주셨도다"(시 15:16)라는 선언은 서로 모순되기보다는 보완적이다. 땅은 창조로 인해 하나님께 속하고 위임으로 인해 우리에게 속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분을 대신하여 그 땅을 보존하고 개발하도록 책임을 주셨다는 의미다. 두가지 반대 극단을 피하고 자연과의 더 나은 관계를 발전시켜야 한다.

 

첫째, 우리는 자연을 신격화하는 일을 피해야 한다. 이는 창조주와 창조세계를 동일시하는 범신론자, 자연세계를 영들의 거처로 삼은 정령숭배자, 뉴에이지운동가들의 실수이며 이 혼란은 창조주를 모욕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자연을 만드셨기에 자연을 존중하나 우리는 자연을 경배하지 않는다.

 

둘째, 우리는 자연을 착취하는 것을 피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인 것처럼 오만하게 자연을 대해서는 안 된다. 자연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책임 있는 청지기로 우릴 부르셨다.

 

셋째, 인간과 자연의 올바른 관계는 하나님과 동역하는 것이다. 환경을 보존할 뿐 아니라 공공의 이익을 위해 자원을 개발해야 한다. 만물의 즐거움과 유익을 위해 창조 질서를 변화시키는 것은 고귀한 소명이며 예배의 표현이다. 창조 세계를 돌보는 일에는 창조주를 향한 우리의 사랑이 반영될 것이기 때문이다.

 

주의할 점은, 하나님은 우리의 일이 예배의 표현이 되도록 의도하셨으며, 창조 세계를 돌보는 일에 창조주를 향한 사랑이 담기도록 하셨다. 그렇기에 일이 마치 우리 존재의 전부인 양 거기 매몰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또한 건전한 성경적 가르침을 바탕으로 생태계의 위기를 주목해야 한다. '세계인구 성장의 가속화', '지구 자원의 고갈', '쓰레기 처리', '기후변화'의 문제이다. 이에 대해 기독교 환경 단체를 후원하는 일 등과 아울러 개인적 차원에서의 책임은 무엇일까? 구약학자 크리스토퍼 라이트는 '환경 친화적 에너지 사용, 불필요한 기기의 전원 끄기, 윤리적으로 건전한 환경정책을 가진 회사의 식품/재화/용역을 구매하기, 환경 보호 협회에 가입하기, 불필요한 낭비피하고 재활용생활화하기' 등을 권면한다. 또한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배한다면서, 예수의 제자라고 주장하면서 그분의 소유인 이 땅에 관심이 없는 그리스도인들이 있다는 것이 나는 너무나 불가사의하다. 그들은 이 땅이 오용되는 현실에 관심이 없을 뿐 아니라, 낭비와 소비의 생활 방식으로 이 땅의 오용에 동참하고 있다.'라고 강하게 말한다.

 

"하늘과 모든 하늘의 하늘과 땅과 그 위의 만물은 본래 네 하나님 여호와께 속한 것이로되"(신 10:14)

 

생각

환경을 생각해야 한다는 당위가 삶이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지식이 축적과 설득의 과정이 필요한 시대인가. 나 스스로를 보아도 그렇다. 이런 성경적 당위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야말로 상황 속에 복음을 살아내는 진정한 회심자가 아닐까. 그러나 이런 위기가 제자들에게는 필수불가결한 코스임에도 선택 가능한 옵션으로 여기고 싶은 욕구가 샘솟는다. 만물을 향하신 하나님의 창조, 그리고 새 창조의 계획에 눈은 떴으나 생활 속에서 그것을 실천하고자 하는 의지는 얼마나 적은지. 그것은 과다생산과 소비, 지불의사와 능력 등의 개념이 혼란스러운 현대 사회 속에서 모종의 노예로 살고 있는 것을 반증한다. 한때 가정교회에서 주일에 플라스틱 컵을 사용하도록 하고 주일봉사로 컵 씻는 일을 하자는 아이디어가 있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사그라졌다. 이런 창조적 봉사의 아이디어가 끊임없이 더 많이 더 두루 퍼지면 좋겠고 실천하면서 지속가능한 일들이 일어나야겠다. 지체들에게 부끄럽다. 하나님께 죄송하다. 창조세계에 대한 책임 있는 자세와 삶이 바로 예배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제5장 단순한 삶

 

내용요약

생명(life)과 삶(lifestyle)은 연결된 단어이고 뗄 수 없다.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새로운 생명을 얻는 그리스도인에게 어떤 삶이 적합한가? 그 생명이 새로운 것이라면, 그 삶 또한 새로워야 한다. 다음은 존 스토트가 '단순한 삶에 대한 복음주의의 언약'을 요약한 내용이다.

simple lifestyle // 거룩, 겸손, 단순, 지족, 쉼

 

1. 새로운 공동체 : 우리는 교회가 하나님의 새로운 공동체가 되어 새로운 가치관과 새로운 기준과 새로운 삶의 모습을 드러내도록 의도된 것임을 기뻐한다.

 

2. 개인의 삶 : 우리는 어떤 규칙이나 규정도 두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매일 약 1만 명이 굶어 죽는다는 사실에 비추어 단순한 삶을 살기로 결단한다.

 

3. 국제적인 개발 : 우리는 수백만의 가난한 이들로 인해 충격을 받는다. 우리는 인간 개발 계획에 더 관대하게 기부하기로 결단한다. 하지만 정부의 활동도 꼭 필요하다.

 

4. 정의와 정치 : 우리는 현재의 사회적으로 불의한 상황을 하나님이 혐오하시리라 믿으며, 변화가 올 수 있으며 와야 한다고 믿는다.

 

5. 복음 전도 : 우리는 복음화 되지 않은 수백만의 사람에게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 단순하기 살라는 부르심은 책임 있는 증인이 되라는 부르심과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

 

6. 주님의 재림 : 우리는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가장 작은 자를 섬김으로써 그분을 섬긴 이들은 구원을 받으리라 믿는다. 구원받는 믿음은 섬기는 사랑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생각

위 언약이 생길 무렵, 로잔언약이 생긴 그 무렵 경제계에서는 프리드먼 같은 학자가 노벨상을 타던 때이다. 대처, 레이건 등에 의해 실험되고 확대 발전되고 있는 신자유주의의 문제. 거기서 파생되는 수많은 문제들, 전 지구의 빈부격차심화와 다시 고개를 드는 제국주의 등. 어찌 보면 위의 이야기들이 정말 문서에 형식적으로 있는 활자들. 복음주의자들의 지적만족을 위한 내용들로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단순한 삶으로 초대받았다는 메시지는 존 스토트나 어떤 이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고 살아내신 것이다. 제자라면 그 길을 걸어야 한다. 개인적 차원에서 '단순한 삶'과 관련된 부분은 리처드 포스터의 '돈, 섹스, 권력', '영적 훈련과 성장' 등에서 도움을 받는 것이 실제적일 것이고, 세상을 보는 원리에 대해서는 엘룰의 '하나님이냐 돈이냐'가 더욱 실제적 안내를 해줄 것 같다. 그러나 존 스토트가 성경에서 얻는 가치를 자신의 삶과 직결시키고, 그뿐만 아니라 그것을 나눌 수 있는 이들과 연대하고, 공적 사역에서 운동화시켰다는 점은 무척 존경스럽고 배울만한 점이다.

 

단순한 삶을 위해 분투하는 지체들을 격려하고 존경한다. 내 삶에도 그런 구석이 좀 더 있길 바란다. 또한 미래에 우리의 자녀들이 우리를 보며 예수님처럼 세상과 다른 방식으로 살아내는 것을 좋아하고 배우고 싶어 하길 진심으로 바란다.

 

 

제6장 균형

 

내용요약

거듭남 - 성령이 주시는 깊은 내면의 근본적인 변화

벧전 2:1-7

존 스토트는 제자의 특징을 6가지로 이야기한다. 즉 다음과 같다.

 

1. 성장해야 하는 갓난아기 - 맛보면 갈증을 느낀다. 매일의 훈련이 요구됨.

2. 교제를 나누어야 하는 산 돌 // 자라고(1) 공동의 교제(2)를 이루고

3. 예배드려야 하는 거룩한 제사장

4. 증거해야 하는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 // 예배(3) + 일(복음증거, 4) = 교회는 예배와 증거

5. 거룩해야 하는 거류민과 나그네 - 시민권도 없고, 집도 없음.

6. 시민이 되어야 하는 하나님의 종 - 양심적인 하나님의 종 // 순례(5) + 시민(6)

 

갓난아기로 비유함은 다시 태어났기 때문이다. 거듭남이란 사람의 인격에 성령이 가져다주시는 깊은 내면의 근본적인 변화다. 요점은 우리가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성품과 지식을 통해서 거듭난 존재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장이 필요한 갓난아이들처럼 다시 태어난다는 사실이다. '순전하고 신령한 젖' 즉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성장에 필수적인 것이다. 또한 교회를 세우시는 하나님을 주목하라. 어떤 것도 하나님의 교회를 무너뜨릴 수 없다. 우리는 어떻게 이 교회에 속하게 되는가. 세례를 통하여 가시적이고 외적인 교회에 속한다. 또한 우리는 서로에게 속해 있다. 건물을 상상할 때 하나님의 건물의 산 돌이란 이미지가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니다.

 

제사장은 두 가지 특권 즉, 하나님께 나갈 수 있는 특권, 희생 제사를 드리는 특권을 누린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제사장과 백성 사이의 이런 구별은 폐지되었다. 교회 전체가 제사장인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도록 부름받은 거룩한 제사장이다. 그러나 제자의 모습이 아기들로서 개인적 성장, 건물의 돌같은 교제, 신령한 제사를 드리는 예배뿐인가? 우리는 그분의 증인이 되도록 '거룩한 나라'로 부름을 받았다.

 

또한 이 땅의 거류민과 나그네가 되었다. 하늘의 거룩한 시민권에 대한 개념은 종종 세상적인 책임에서 손을 떼게 하는 오류를 범하곤 했다. 그러나 우리는 순례자임과 동시에 이 땅의 시민으로서의 의무를 갖고 있다. 그것은 양심적인 하나님의 '종들'로 묘사된다. 자유를 오용하지 말되 자유로운 사람으로 살며 하나님의 종으로서, 동료신자들, 하나님, 권세자들 등 모든 사람을 합당하게 공경해야 한다.

 

우리의 실패는 거의 모두 제자의 포괄적인 정체성을 잊어버리는 태만에서 나온다. 각 쌍들에서 우리는 균형을 유지하고, 한쪽을 희생함으로써 다른 쪽을 강조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개인적인 제자와 공동적인 교제로, 예배와 일로, 순례자와 시민 둘 다로 부름 받는다.

 

“사랑하는 아들아 너는 네가 누구인지를 늘 기억해야 한다.

네게 누구인지 기억한다면 그에 합당하게 행동하게 될 것이다.”

 

생각

종종 하나님 나라의 특성이 우리가 한 가지 개념으로 치닫고 싶어 하는 본성에 위배되기에 이해되지도 만져지지도 않을 때가 있다. 균형을 말하는 장에서도 그런 점은 두드러진다. 한 가지 많은 내용을 짧게 담고자 하니 책에서 저자가 주장하는 바가 역동적이지 못한 듯하다. 그러나 포괄적 정체성을 잊는 것 자체가 태만함이란 사실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쉽게 생각하고 싶고, 쉽게 결론내리고 싶고, 쉽게 답을 얻고 결과를 얻고 싶을 때가 얼마나 많은가. 그리고 내가 이해하는 것이 전부라고 착각할 때가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나는 동시에 균형에 대해 신중함을 보이는 태도로 인해 아무런 액션도 못하고 주저하는 이가 많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이 땅의 정치 문제에 있어서도, 경제문제에 있어서도 균형을 유지하려는 지적 만족에 머물러서 결국 아무런 것도 하지 못하는 경우 말이다. 개인적 경건이 부재하면서 공동체만 강조하고 이 땅의 시민임을 강조하지만 땅에 너무 발을 붙인 나머지 타협하는 겉 멋든 나그네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리고 그게 바로 내가 아닌가. 이 모든 균형에 대한 이해들은 이런 몇 번의 요약과 짧은 대화로 해결되거나 길러지는 것이 아니다. 글쎄.. 우리의 다음세대는 이것에 대해 치열한 토의도 할 필요 없이 그들이 자라가는 신앙 공동체에서 자연스럽고 호흡처럼 이런 감각을 배우고 익힐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본다. 성장, 교제, 예배, 일, 나그네, 시민 등등 이 항목들에 나를 비춰본다. 하나님 앞에서 그분의 눈으로 나를 보자.

 

Resident Aliens - "하나님의 나그네된 백성"이 이 장에 이어서 읽을 책이 아닐까. 추천해본다. 그 저자들이 쓴 '십계명', '주여, 기도를 가르치소서'가 같은 맥락의 책.

 

 

제7장 - 의존

 

내용요약

존 스토트는 자신이 어느 주일 아침 우연히 넘어지면서 수술을 받고 한동안 재활치료를 받은 경험을 이야기한다. 그 과정을 통해 자신이 철저하게 다른 이들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경험을 얻고, 제자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가 바로 '의존'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한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도 그러셨던 것처럼 노년에 들면서 그런 의존의 필요는 더욱 커진다. 의존과 더불어 '자립'도 중요한 자질이다. 어떤 상황에서는 자립이 중요한 태도이기도 하지만 '의존'이 급진적 제자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존 와이어트의 표현을 빌면 "우리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가 의존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사랑과 보살핌과 보호에 전적으로 의존하여 이 세상에 들어왔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의존하는 인생의 단계를 거쳐 간다. 또한 우리는 다른 사람의 사랑과 보살핌에 전적으로 의존하여 이 세상을 떠날 것이다. 이것은 참담한 현실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육체적 본성의 일부이며 하나님의 계획의 일면이다.(131)

 

그리스도께서도 갓난아이로 태어나 그런 모든 과정을 겪으셨다. 십자가에서조차. 그러나 예수께서는 의존하되 위엄을 잃지 않는 본을 보이셨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갈라디아서 6장 2절

 

주기도문에 대한 바른 이해 전반부는 하나님의 영광의 3가지 간구, 후반부 하나님을 의존해야 하는 인간의 간구-일용할 양식, 죄용서, 악에서 구하소서.

 

생각

자신의 육체적, 정신적 힘이 쇠약해질 때 '의존'은 더욱 크게 다가올 것이다. 난 아직 내가 젊고 모든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고 도움을 겸손하게 구하고 협동하고 섬기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듯하다. 또한 내 옆에 있는 이를 어떻게 돕고 있는가. 내게 의존할 수 있는 자리를 내어주고 있는가 돌아본다. 의존할 때 위엄을 잃지 않는 비결은 무엇일까? 그것은 건강한 정체성에서 비롯되고 그 이전에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가정교회 식구들에게 의존하는 구체적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또한 그들이 내게 의존하도록 길을 여는 것에는 어떤 지혜가 있을까? 앞으로 펼쳐질 수많은 사역들 속에서 나는 이 의존이란 숙제를 어떻게 풀어갈 수 있을까.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는 이 명령이 오늘 내게 더욱 신선하게 다가온다.

 

 

제8장 - 죽음

 

내용요약

존 스토트는 제자의 특징 중 8번째, 마지막을 '죽음'으로 꼽았다. 생명에 이르는 길은 바로 죽음이다. 삶과 죽음은 우리가 인정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이며 신비하고 정의하기 어려운 것이다. 여섯 가지 영역에서 죽음을 말해보자.

구원 - 하나님과 사귐을 막는 장벽이 죄이며 그 삯은 죽음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오셨다. 그리스도와 하나가 됨으로써 그분이 죽음으로 이루신 일이 우리의 것이 되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있는 자”, 그분의 죽음을 통하여 살아 있는 자다.

 

제자도 - 예수님은 자기 부인을 대가로 진정한 자기 발견을, 죽음을 대가로 진정한 생명을 약속하신다. 우리는 우리 안에 거하는 죄와 전투를 벌이고, 그 죄와 타협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한 철저함은 성령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우리가 몸의 잘못된 행실을 죽이면 살 것이다"

본회퍼의 “나를 따르라”, “옥중 서간”

선교 - 예수님은 자신이 고난 받는 종의 예언을 성취할 것임을 분명히 아셨고, 선교에는 고난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씀하셨다. 바울도 다른 이를 살리기 위해 자신이 죽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고후 4:12) "많은 열매를 맺으려면 씨가 죽어야 한다"

박해 - 여기서 말하는 박해는 복음을 위해 받게 되는 신체적 박해를 일컫는다. 박해를 받는 그리스도인이 모두 바울처럼 죽음에서 구출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죽음의 한가운데에서도 생명을 경험할 수 있다. 지금도 약 2억 명의 그리스도인이 국가의 압제 아래 두려워하며 살고 있다.

순교 - 계 20:4에 의하면 순교당한 자들에게 새로운 세상에서 그들에게 특별한 영예가 주어질 것이다. 디히트리트 본회퍼가 처형되던 날 그가 한말은 다음의 것이다. "이것으로 끝이다. 하지만 내게는 생명의 시작이다"

유한성 - 죽음은 많은 사람에게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죽음이 공포가 아니다. 부활한 몸에 일어난 일은 어떤 면에서 새 하늘과 새 땅에서도 그대로 일어날 것이다. 창조세계 전체가 썩어짐의 종노릇하는 데서 해방될 것이다. 최고의 것은 아직 오지 않았다.

빌 1:21-23 “1: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우리는 복음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생명의 영광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156)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 것이 된 영원한 생명이며, 우리 육체의 욕망을 죽임으로써 우리 것이 된 강력해진 생명이며, 우리 육체의 연약함과 죽을 수밖에 없는 처지 가운데 누릴 수 있는 내적인 생명력이며, 자신의 사명에 신실한 이들에게 약속된 풍성함이며, 박해 가운데에서 또 순교당할 상황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위로이며, 새로운 창조 세계 안에서 누릴 궁극적인 부활 생명이다.

 

우리가 살고자 한다면 죽어야 한다. 죽음이 안내하는 생명의 영광을 볼 때에만 우리는 기꺼이 죽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이들"이다.

주를 따르고 섬기는 일에 자의적 선택을 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있는가?

 

생각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 젊은이들의 특징이다. 자신이 약해지고 노쇠하고 시간의 유한함을 절감할 때에야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죽음'에 대해서 아주 진작 말씀하셨고 그것이 두려워할 것이 아닌 영광의 문임을 알려주셨다. 그것은 이미 나에게 주어진 복음의 신비에 큰 일부이며, 지금의 삶을 살아가는 중요한 열쇠인 것이다. 죽음은 어떻게 하면 삶을 잘 마무리할까라는 생각에서 필요한 것이 아니며, 내가 어떤 업적을 남겼는가에 초점을 맞추게 하는 그 무언가가 아니다. 그것은 생명에 대한 깨달음이 비로소 현실화되는 시간이며, 그것은 우리가 알지 못한 비밀의 답을 손에 쥐게 되는 놀라운 시작의 순간이다. 목숨의 끝은 그렇게 오지만, 생명을 소유한 제자가 살아가면서 제자답게 살지 못할 때, 몸의 죽은 행실과 죄의 영향력 아래에서 죽음과 절망을 경험한다. 그러나 매일의 묵상과 관계와 사역을 통해 거듭 그리스도의 생명을 경험한다. 이런 죽음과 생명의 신비가 그 날에 어떤 식으로 연속/비연속이 될는지?

그리스도인이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이들'이다.

로마서 8장과 고린도전서1 5장을 깊이 묵상하며 하루를 보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