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 전에 신학교 선배 목사께서 ‘목사가 넥타이를 매고 자는 까닭은?’이라는 글을 출간했는데 목회 후일담을 아주 솔직 담백하게 기록한 글이었기에 부담 없이 읽으며 공감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선배 목사님의 목회 단상 중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시무하는 교회에 한 집사님이 교회를 나오지 않아 구역장에게 결석 이유를 물었습니다. 알고 보니 시험에 들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시험 든 이유는 목사가 감기에 걸렸는데 도대체 얼마나 은혜가 없으면 감기에 걸렸는가? 하는 이유 때문에 은혜가 없는 교회에 나올 수 없다는 지론이었습니다. 물론 선배 목사님께서 이 목회 경험담을 표현한 것은 아주 오래 전의 한국교회의 자화상이었기에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 한국교회에서는 있을 수 없는 고전과도 같은 이야기로 치부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장에서 목회를 하는 목사는 고전과도 같은 ‘이런 일’을 결코 가볍게만 여길 수가 없습니다. 이유는 교회 공동체 안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성도들의 삶의 정황(Sitz im Leben)에서 당하는 아픔이 곧 목사의 아픔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간에 교우들 중에 불의에 사고를 당하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교통사로로 타박상을 입고, 눈길에 미끄러져 인대가 늘어나고, 회사 단합대회에 가서 운동을 하다가 갈비뼈에 금이 가고 그래서 며칠 동안 입원치료를 요하는 아픔들을 당하는 것을 보며 목사가 느끼는 괴로움은 일반 교우들이 당하는 아픔과는 비길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특별기도회라도 선포해야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 바로 그 시간 전화가 한 통화가 결려왔습니다.
“목사님, 준하가 합격했데요.”
전화를 받는데 순간적으로 느끼고 있었던 목회자의 아픔이 순식간에 달아났습니다. 200:1의 경쟁률은 사실은 경쟁률이라고 볼 수 없는 불가능의 영역과도 같은 것인데 그 과정을 무난히 이기고 예술계의 서울대학교 라고 할 수 있는 한국예술종합학교에 당당히 합격한 준하의 기쁜 소식을 전해주는 이영미집사님의 전화가 어찌 그리 눈물겹게 귀한지 이번에는 목회현장에서 일어나는 또 다른 ‘저런 일’을 경험하였습니다.
목사가 왜 넥타이를 매고 자는 것일까? 말 할 것도 없이 목회 현장의 긴장감을 토로하는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가끔은 이런 생각이 듭니다. 은퇴한 목사님들이 너무나 부럽다는 생각을 말입니다. 이제는 모든 근심 걱정을 버리고 평강을 주시는 하나님과의 교제만을 경험하고 살 수 있으니 말입니다. 2011년에는 하나님의 교회에 정말로 신바람 나는 일들만이 일어나기를 중보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