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2월 31일 송구예배 설교
본문: 열왕기하 5:8-14
제목: 주존심(主尊心)으로 다시 무장하는 교회
주존심이라는 단어를 한자로 쓰면 두 가지가 다 가능합니다.
첫째 주존심은 이렇습니다.
主存心입니다.
이럴 때 해석은 이래야 합니다.
“주인으로 마땅히 가져야 할 존재 의식”
또 하나의 경우가 있습니다.
主尊心입니다.
이 단어를 쓰면 의미가 첫 번째 단어와는 전혀 다른 것이 됩니다.
“주인을 존중하는 마음”입니다.
오늘 설교 제목은 물론, 몇 년 전에 우리 교회에서 표어로 삼았던 “주존심이 있는 교회”라고 했을 때의 문장은 전자가 아니라 후자입니다.
세인교회는 주님을 존귀히 여기는 교회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이 마음을 가졌던 성경 속의 인물을 한 사람 추천하라고 한다면 그 실례로 들 수 있는 믿음의 선배가 너무 많지만 저는 오늘 송구 예배의 주인공인 예언자 엘리사를 추천하고 싶습니다.
우리기 너무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엘리사는 흑암의 권세가 드리웠던 북왕국 이스라엘 지역에서 시대에 영적 길라잡이 역할을 감당했던 예언자였습니다.
엘리야가 갖고 있었던 영적인 권능의 갑절을 공급받고 패역했던 북왕국 쪽에서 진실한 하나님의 소리를 대변하던 흉 예언자 중에 한 명이 엘리사였습니다.
그가 도단에 거하고 있었을 때 아람(시리아)의 군대 장관인 나아만이 당시에는 불치의 병이자, 천형으로 여겨졌던 한센병에 감염됩니다.
그에게 청천벽력 같은 재앙이었을 것입니다.
당시 강력한 나라의 구도에 있었던 시리아의 군권을 잡고 있었고, 뿐만 아니라 그는 왕의 총애까지 받고 있었기에 그의 권력은 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무시무시한 권력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정작 자신의 질병은 고치지 못하는 무기력함에 좌절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가 갖고 있었던 권력, 금력 등등을 이용하여 시리아 전역에 있는 의사들에게 끊임없는 치료를 받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의 질병은 요지부동이었습니다.
그렇게 우울한 날을 보내던 어느 날, 이스라엘과의 전쟁 중에 생포하여 끌고 온 노예 중에 한 명인 어린 소녀가 나아만을 찾아옵니다.
그리고 그 어린 소녀는 자기의 고향 땅에 살고 예언자는 주인의 질병을 치료할 능력을 갖고 있다고 말하며 엘리사를 소개합니다.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할 신세에 처해 있었던 나아만은 즉각적으로 자기의 주군인 아람왕 즉 시리아의 왕에게 이 사실을 보고함으로 지지를 얻게 됩니다.
나아만의 절박한 보고를 받은 시리아 왕은 나아만의 치료를 위해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습니다.
나아만에게 치료에 필요한 재정적인 지원과 인적 인프라를 챙겨 주는데 그 중에 하나가 이스라엘 왕 요람에게 부하 나아만의 치료를 원한다는 청원의 편지를 쓴 것이었습니다.
열왕기하 5:5-6절입니다.
“아람 왕이 이르되 갈지어다 이제 내가 이스라엘 왕에게 글을 보내리라 하더라 나아만이 곧 떠날새 은 십 달란트와 금 육천 개와 의복 열 벌을 가지고 가서 이스라엘 왕에게 그 글을 전하니 일렀으되 내가 내 신하 나아만을 당신에게 보내오니 이 글이 당신에게 이르거든 당신은 그의 나병을 고쳐 주소서 하였더라”
여기에 보고된 나아만을 위해 왕이 지원한 대가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은 10달란트, 금 6천 개, 의복 열 벌이라면 오늘의 가치로 평가할 때 어마무시한 가치였습니다.
은 10달란트는 최소 300kg에서 최대 600kg에 해당하는 엄청난 액수입니다.
금 6,000개는 69kg의 가치였습니다.
이 값어치는 결코 작은 가치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엄청난 가치를 투자해서라도 나아만을 고치려 했던 것은 당시 시리아왕에게 나아만은 대단히 중요한 충복이었고, 신하였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한편, 인편으로 나아만의 치료를 원한다는 청원의 글을 받은 북왕국 이스라엘의 왕 여호람(요람)의 반응은 실망스럽기 그지 없습니다.
열왕기하 5:7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이스라엘 왕이 그 글을 읽고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내가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하나님이냐 그가 어찌하여 사람을 내게로 보내 그의 나병을 고치라 하느냐 너희는 깊이 생각하고 저 왕이 틈을 타서 나와 더불어 시비하려 함인줄 알라 하니라”
정말로 어처구니 없는 반응입니다.
실망감 100%의 반응입니다.
요람은 편지를 읽자마자 자기 옷을 찟으며 절망합니다.
그리고 절규합니다.
아람 왕이 우리 이스라엘을 공격하기 위해 트집을 잡는 것이라고 해석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기막히게 편지를 해석한 요람은 정말로 어떻게 이것을 해석하지! 라고 탄식하게 만드는 독백을 본문에서 합니다.
요람의 말을 들어보십시다.
“내가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하나님이냐? 그가 어찌하여 사람을 내게로 보내 그의 나병을 고치라 하느냐?”
이 말을 곱씹으면 이렇게 재해석이 가능합니다.
요람은 북왕국 이스라엘이 여호와 신앙에서 아무리 무너진 국가 공동체라고 하더라도 야훼 신앙에 대한 기본적 뿌리가 있는 하나님의 선민 공동체였기에 하나님에 대한 근본적인 신앙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했기에 한센병에 걸린 나아만을 고칠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하나님뿐이라는 사실을 알고 인정했습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에 대하여 들었던 풍월, 학습되어진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이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던 요람이었지만 정작 그 하나님이 일하시는 능력을 자기에게 인격적으로 적용하지 못하는 이율배반적이고, 대단히 형식적인 종교성을 갖고 있었던 자였기에 옷을 찟은 것입니다.
요람에 대해 이렇게 분석한 송병현 교수의 지적은 의미심장합니다.
“그는 분명 하나님은 나아만의 병을 고칠 수 있다고 선언했다. 그런데 왜 자기는 이런 하나님을 믿는 것을 거부했을까? 안타까운 일이다.” (송병현, 『엑스포지멘터리 주석-열왕기하』, 81쪽)
이런 불신앙적인 믿음을 갖고 있었던 요람의 안타까운 행위를 보고 받은 엘리사는 드디어 본인 스스로가 나서기로 합니다.
오늘 송구예배 설교 예배의 주제절인 본문 8절을 다같이 합독하십시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이스라엘 왕이 자기의 옷을 찢었다 함을 듣고 왕에게 보내 이르되 왕이 어찌하여 옷을 찢었나이까 그 사람을 내게로 오게 하소서 그가 이스라엘 중에 선지자가 있는 줄을 알리이다 하니라”
‘메시지’ 번역으로 살펴보십시다.
“이스라엘 왕이 너무 괴로워서 옷을 잡아 찢었다는 말을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들었다. 그는 왕에게 전갈을 보냈다. “어찌하여 옷을 찢을 정도 로 근심하고 계십니까? 그 사람을 내게 보내십시오. 그가 이스라엘에 예언자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엘리사가 요람에게 전언했던 이 구절을 보면서 저는 개인적으로 대단히 짜릿한 감동을 느꼈습니다.
‘어찌하여’라는 이 문구가 제게는 큰 감동으로 다가왔습니다.
엘리사의 토로에 담긴 참담함이 제게도 고스란히 전달되었기 때문입니다.
“왕이시여! 도대체 하나님을 믿으시기는 하는 것입니까? 왕이시여! 우리 이스라엘의 등뒤에는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가 계시는 것을 모르십니까? 왕이시여! 하나님께서 함께 하는 나 엘리사가 여기에 있습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가슨이 후련해 지는 선포입니다.
이렇게 무장한 엘리사는 우리들이 너무 잘 아는 것처럼 자신을 방문한 나아만에게 요단 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씻으라고 명함으로 나아만의 한센 병을 치료했음을 익히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과정에서도 엘리사는 갖고 있었던 영적 권위에서 흔들리지 않았음을 성경 내증을 통해 알게 됩니다.
나아만은 정중하게 맞이하지 않고 문전박대하는 식으로 요단 강에 가서 몸을 씻으라는 엘리사의 말에 격분하여 아람으로 돌아가려 합니다.
하지만 동행한 종들이 간곡하게 만류함으로 마지못해 요단강에서 몸을 일곱 번 씻고 올라오자 한센 병에서 치유되었음을 성경이 증언합니다.
놀라운 신유의 은혜를 경험한 나아만의 그 다음 행보가 저를 또 한 번 감동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열왕기하 5:15절을 주목해 주십시오.
“나아만이 모든 군대와 함께 하나님의 사람에게로 도로 와서 그의 앞에 서서 이르되 내가 이제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 줄을 아나이다 청하건대 당신의 종에게서 예물을 받으소서 하니”
그렇습니다.
온전한 굴복입니다.
전적인 머리숙임입니다.
오늘은 2023년을 마무리하고 새해를 맞이하는 길목인 12월 31일입니다.
이제 우리는 불과 몇 시간 후에 2023년이라는 크로노스를 역사의 뒤안길로 보내게 됩니다.
오래 전에 읽었던 프랑스가 낳은 위대한 신학자이자 사회학자인 쟈크 엘륄의 걸작인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 이 문장을 만났습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수단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나라라는 ‘목적’의 현존이어야 합니다.” (83쪽)
기막힌 성찰이자 명제입니다.
이렇게 말한 쟈크 엘륄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그리스도인이 살아야 할 방법론을 강력하게 소개합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참다운 삶이란 우리가 그 깊이를 잘 알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헤아릴 수 없는 진리에 붙들려 살아가는 삶입니다. 이런 삶을 영적인 삶이라고 말합니다.” (위의 책, 95쪽)
가만히 생각해 봅니다.
나와 여러분이 하나님 나라의 현존입니다.
대단히 감동적이며, 명징한 정의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으로부터 이런 위대한 위임을 받은 저와 여러분이라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세속주의에 물들어 거기에 부합한 삶을 살기 위해 치졸해져서야 되겠습니까?
21세기는 순교적 영성이 없이는 진솔한 신앙의 길에서 이탈할 수밖에 없는 기막힌 세대입니다.
이 랜덤의 세계 안에 있는 우리 모두가 가져야 할 것은 주님의 나라, 주님의 뜻, 주님의 말씀이 가장 위대한 가치라는 것에서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 즉 주존심을 갖는 것입니다.
적어도 아람과 나아만이라는 거대한 세속주의의 담벼락을 뛰어 넘기 위해 엘리사가 요람에게 선포했던 이 담대함으로 하나님의 일하심에 붙들려야 합니다.
“어찌하여 옷을 찢었나이까 그 사람을 내게로 오게 하소서 그가 이스라엘 중에 선지자가 있는 줄을 알리이다 하니라”
영국이 낳은 불의 사자 레오나드 레이븐힐은 이렇게 피를 토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이 나라의 죄를 심판하지 않으신다면 하나님은 소돔 고모라에게 사과하셔야 할 것입니다.” (레오나드 레이븐힐, 『소돔에는 말씀이 없었다.』, 규장, 128쪽.
사랑하는 제천 세인 교회 교우 여러분!
이강덕 목사가 정말로 못견디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 색깔이 없는 삶을 사는 삶입니다.
나는 우리 세인교회 성도들이 이렇게 살아갈 때 치욕스럽습니다.
나는 우리 교회가 주존감(主尊感)을 잃을 때가 가장 수치스럽습니다.
지난 3년 코로나의 공격으로 주님을 가장 위대한 가치로 여기는 신앙의 삶을 잃어버린 자들이 너무 많아졌습니다.
코로나가 눈 가장 큰 재앙이자 저주입니다.
2024년은 다시 주존감을 회복하는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 교우들이 넘쳐나기를 기대합니다.
본문 8절이 소름을 끼치게 하는 전율을 줍니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이스라엘 왕이 자기의 옷을 찢었다 함을 듣고 왕에게 보내 이르되 왕이 어찌하여 옷을 찢었나이까 그 사람을 내게로 오게 하소서 그가 이스라엘 중에 선지자가 있는 줄을 알리이다 하니라”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선포하라
선포하라 부활하신 영광의 주
아름다운 영광의 주를 보라
보좌에 앉으신 그 어린 양 예수
다 무릎꿇고서 주 경배하리라
선포하라 부활하신 영광의 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신 주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영원 영원토록 받아주옵소서
모든 영광과 존귀와 능력
받으소서 받으소서
영광과 존귀와 능력
받으소서 받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