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2월 2일 수요 저녁 기도회 (창세기 쉰 번째 강해) 본문: 창세기 13:1-4 제목: 다시 원점에서 바둑을 두는 사람들이 복기를 한다고 하지요. 복기(復碁)라는 단어의 사전적인 의미는 이렇습니다. “바둑에서, 한 번 두고 난 바둑의 판국을 비평하기 위하여 두었던 대로 다시 처음부터 놓아 보는 행위” 물론 고수들이 하는 작업입니다. 이 작업을 통하여 얻을 수 있는 것은 패했든지 승리를 했든지 그 원인을 뒤돌아 볼 수 있다는 매우 중요한 장점이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기에 목회를 하는 목사들에게도 복기는 대단히 중요한 사역의 요소입니다. 목회 사역의 복기, 설교의 복기, 성경 연구의 복기 등등은 수백 번을 강조해도 결코 과장이 아닌 목사의 중요한 사역 중의 하나입니다. 해서 저 역시 이 작업을 해 보려고 많이 애쓰는 편입니다. 설 명절 기간에 아들이 내려와서 근래 본인이 온라인으로 꼭 방문해서 듣는 설교가 있다고 전언해 주었습니다. pod(parade of David) 교회를 시무하는 원유경 목사의 설교라고 귀띔 해주었습니다. 젊은 여성 사역자인데 배울 게 많다는 이유로 아들이 온라인 방문을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까다로운 아들을 움직인 사역자가 궁금하여 저도 방문해 보았습니다. 온누리 교회 찬양 부교역자로 섬기다가 교회를 개척한 여성 목사인데 나름 젊은이들을 위한 사역에 신선한 바람을 몰고 온다는 이야기를 듣고 온라인상에서 포드 교회의 전반을 서핑 해 보았습니다. 원유경 목사는 온누리 교회 찬양 사역 유 경험자자이다보니 그녀의 신학적 성향에 대해서는 다시 질문하지 않아도 나름의 느낌을 받을 수 있었지만 코로나 펜데믹 상황에 무모하기까지 한 교회 개척을 감행한 그녀의 인트로 방송을 듣다가 제 마음에 꽂힌 멘트가 있었습니다. “본질은 집요하게 붙잡는 것이다. 예배를 향한 절대적인 갈망, 대체할 수 없는 기름 부으심이라는 본질을 철저하게 붙드는 교회를 만들고 싶다.” 이 말을 듣다가 이런 소회가 제게 임했습니다. 펜데믹이라는 전무했던 상황에 내몰렸던 지난 2년, 그리고 앞으로 살아야 할 또 다른 1년 그리고 그 이후까지 성도가 다잡이해야 하고 다시 복기해야 하는 것이 무엇일까? “예배를 통해서만 공급되는 위로부터 주시는 기름부음의 사모함이다. 그런데 이 기름부음은 결코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 대체할 수 없는 유일한 기름 부으심이다. 그러므로 예배의 회복이 정답이다.” 성도의 원자리가 어디일까? 예배하는 자리입니다.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앞으로 살피겠지만 창세기 31장을 미리 나누어 보십시다. 야곱은 에서를 속인 이유 때문에 살해위협을 피해 밧단아람으로 피신했다가 20년이 되는 어느 날 외삼촌 라반에게까지 미운털이 박혀 이제는 그곳에서마저도 살아갈 방도가 없어집니다. 야곱은 진퇴양난에 빠지게 됩니다. 그대로 있으면 20년 동안 살면서 획득하게 된 일체의 재산을 외삼촌에게 빼앗기는 것은 물론, 자칫하다가는 신변까지도 안전하지 못할 위기에 직면한 야곱은 할 수 없이 밧단아람을 떠나기로 마음먹습니다. 떠나기로 마음먹은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꿈에 현현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명하십니다. 창세기 31:13절입니다. “나는 벧엘의 하나님이라 네가 거기서 기둥에 기름을 붓고 거기서 내게 서원하였으니 지금 일어나 이 곳을 떠나서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 하셨느니라” 하나님이 당신의 이름을 야곱에게 밝히십니다. “나는 벧엘의 하나님이다.” 20년 전, 형에게 쫓겨 브엘세바에서 하란을 향한 먼 여정을 떠나던 야곱이 루스에 도착해서 피곤한 몸을 달래기 위해 잠을 청했습니다. 바로 그때 야곱이 꿈에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내가 너를 축복할 것이고, 네 자손이 많아지게 할 것이며, 너를 떠나지 않고 너와 함께 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게 됩니다. 잠에서 깬 야곱은 감격하여 하나님께 서원을 하며 약조를 합니다. 창세기 28:19-22절입니다. “그 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이 성의 옛 이름은 루스더라 야곱이 서원하여 이르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이렇게 하나님께 서원을 드렸던 장소가 바로 벧엘이었습니다. 밧단아람에서 하나님은 20년이 지난 사건을 복기하시며 야곱에게 밧단아람에서 떠나 벧엘로 올라와 그 서원을 지키라고 다시 하명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시하신 벧엘로의 복귀는 대단히 중요한 신학적 의미가 있는 명령입니다. 야곱에게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라는 명령이었기 때문입니다. 구제 문제로 분열의 위기까지 갔던 예루살렘 교회, 그래서 만신창이가 되어 버린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이 다시 정신을 차리고 복귀하기로 마음먹으며 돌아갔던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사도행전 6:4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같은 맥락에서 본문에 접근해 보겠습니다. 애굽에 내려가 만신창이가 된 믿음 없었던 아브람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와 돌보심으로 인해 위기를 극복하고 다시 애굽에서 돌아온 곳이 어디였습니까? 네게브였습니다. 이스라엘 전국토의 60%에 해당하는 네게브는 비가 많이 오지 않는 이유로 우기 때는 와디 즉 계곡이 형성되는 지역이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이 건조한 시기는 광야지역으로 척박한 지역이었습니다. 아브람이 애굽에서 다시 올라온 첫 지역이 바로 네게브지역이었기에 도무지 살 수가 없었습니다. 해서 그는 네게브를 거쳐 목적이 있는 땅으로 다시 이동합니다. 그는 애굽에서 예기치 않게 하나님의 개입하심으로 생긴 적지 않은 소유들이 있었습니다. 이것들을 이끌고 이전에 장막을 치고 하나님께 단을 쌓았던 아이와 벧엘 중간 지역으로 다시 복귀하였음을 본문 3-4절이 보고합니다. “그가 네게브에서부터 길을 떠나 벧엘에 이르며 벧엘과 아이 사이 곧 전에 장막 쳤던 곳에 이르니 그가 처음으로 제단을 쌓은 곳이라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그렇습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저는 수요 설교를 통해 본문을 그대로 지나치는 것이 아니라 다시 한 번 세밀하게 새겨야 할 대목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입니다. 우리는 아브람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 것이 여기가 처음이 아님을 살폈습니다. 창세기 12:8절에서 이미 아브람이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던 행위에 대해 공부했습니다. “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그렇다고 해서 오늘 본문에 기록하고 있는 같은 지역에서 같은 방법으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 아브람을 이전(창 12:8)과 같은 맥락으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깊이를 같은 관점에서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창세기 12:8절에서 아브람이 불렀던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은 관례에 따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람이 하란과 우르에서 섬겼던 우상 숭배 때 그가 섬겼던 대상에게 호칭하던 정도의 예의를 갖춘 종교적인 수준의 행위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기록된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던 행위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은 애굽에서 행했던 전혀 신앙인답지 않았던 아브람의 일탈에 개입하셔서 그는 물론 사래를 보호하시면서 구속사의 일하심이 훼손되지 않도록 적극적으로 일하셨습니다. 아브람의 입장에서는 두 손을 들고 항복할 하나님의 개입하심과 일하심이었습니다. 이 놀라운 하나님의 인격적 개입하심으로 인해 아브람은 절체절명의 위기를 극복했습니다. 더불어 그는 하나님께서 어떤 존재인가를 인격적으로 깨달았음은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하란에서 섬기던 비인격적인 우상이 아니라는 점을 각인했습니다. 그러기에 아브람이 벧엘과 아이 사이로 다시 돌아온 것은 대단히 의도적인 신앙적 의지이자 고백이기도 한 것이었습니다. 본문 3절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그가 네게브에서부터 길을 떠나 벧엘에 이르며 벧엘과 아이 사이 곧 전에 장막 쳤던 곳에 이르니” 표준 새 번역으로 3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그는 네겝에서는 얼마 살지 않고 그 곳을 떠나, 이곳저곳으로 떠돌아다니다가, 베델 부근에 이르렀다. 그 곳은 베델과 아이 사이에 있는, 예전에 장막을 치고 살던 곳이다.” ‘이곳저곳으로 떠돌아다니다가’라고 번역한 히브리어 ‘마싸’는 배회하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가 아닙니다. “‘마싸’는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대로 한 단계씩 목적지를 향하여 간다는 의미의 단어입니다.” (송병현, “엑스포지멘터리-창세기”, 국제제자훈련원, 270.) 결국 아브람은 벧엘과 아이 사이로 애굽에서 돌아와 다시 간 것은 무의미하게 간 것이 아니라 목적을 분명히 하고 올라갔다는 말입니다. 왜 다시 그곳으로 갔을까요? 재삼 강조하거니와 여호와의 이름을 다시 부르기 위해서였습니다. 아브람이 여호와의 이름을 상투적으로 부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시 원점에서 인격적으로 부르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말은 나를 부르신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원점에서 다시 확인하고 점검하겠다는 의지 천명인 셈입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영이 곤고한 때, 내가 영적으로 망가졌을 때, 내가 하나님의 은혜에서 흔들릴 때 내가 다시 다잡이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원점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이것을 전문적인 용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흔히 사용하는 말로 대치할 때 ‘ad fontes' 즉 ’다시 기본으로‘라는 단어를 쓰는 것입니다. 아브람은 다시 자기를 부르신 하나님께 돌아와 그 분의 그 이름을 다시 부른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수요 예배를 통해서 아브람이 실패를 경험하고 원래의 자리로 다시 돌아온 본문을 접하면서 받아야 하는 은혜가 있습니다. ※ 예배의 회복은 다시 원점에서 시작하는 가장 강력한 동기부여라는 은혜입니다. 누가복음 24:50-53절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을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그들에게 축복하시더니 축복하실 때에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려지시니] 그들이 [그에게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늘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니라” 이 구절은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예수의 승천하심을 알려주는 장면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승천하시기에 앞서 사역하셨습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들에게 성경을 풀어주심으로 다시 그들의 마음에 성령이 주시는 뜨거운 은혜를 부어주셨고, 두려워 떨고 있는 제자들이 있는 곳에 나타나셔서 당신의 손과 발을 보여주시면서 부활의 확실성을 알려주셨고, 심지어 구운 생선 한 토막을 제자들과 함께 드시면서 실절적인 부활을 증언해주셨습니다. 동시에 제자들을 포함한 주님의 부활을 목도한 일체의 사람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며 깨닫게 하셨습니다.이윽고 예수님은 베다니의 모서리에 있는 지역이었던 감람원에서 제자들을 축복하신 뒤에 승천하십니다. 그러자 승천을 목도한 자들이 예수님을 경배한 뒤에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하나님께 예배하였음을 누가복음 24:53절이 증인합니다. 특히 누가복음 24:48절을 주목해 주십시오.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여기에 언급된 2인칭 대명사 ‘너희’는 11명의 제자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너희’는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 11명의 제자, 그리고 그들과 함께 제 2의 제자군 전부를 의미하는 대명사입니다. 중요한 교훈을 찾겠습니다. 엠마오로 낙심하여 내려가던 제자들, 예루살렘에 있었지만 두려워 문도 못 열고 있었던 11명의 제자를 비롯한 다른 제자군이 주님의 부활과 승천을 목격하고 난 뒤에 보여주었던 결론적인 반응입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늘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니라” (눅 24:52-53) 예루살렘은 주님이 공생애의 마지막 한 주간을 제자들과 함께 하셨던 성전 장소입니다. 더불어 주께서 죽음을 당한 공포의 장소였습니다. 그러기에 제자들을 비롯한 제 2제자군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예루살렘은 동일하게 공포의 장소였습니다. 허나 모든 제자들은 예수님의 승천을 본 뒤에 그 공포의 장소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고 했습니다. 더불어 성전에 올라가 하나님을 찬송하는 삶이 ‘늘’의 사역으로 자리를 잡았다고 했습니다. 원래의 자리로 다시 돌아가 하나님을 경배하는 삶이 제자들의 삶으로 굳어진 것입니다. 신앙에서 이탈한 자들에게 있어서 예배는 마지못해 드려주는 종교적 서비스로 전락되었습니다. 이런 자들에게 예배에 대한 사모함이란 전설에 나오는 고향에서나 읊을 법한 고리타분한 고어가 되었습니다. 펜데믹으로 인해 수없이 양산되고 있는 무늬만 그리스도인들의 양태는 예배와 삶은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정이 이러니 예배를 통해 내리시는 기름부음이라는 것을 기대나 하겠습니까? 출근부에 도장 찍듯 주일 예배를 구경하기 위해 교회에 들려주는 수많은 종교인들이 배출되는 시대가 오늘이라고 말을 해도 조금도 손색이 없는 시대가 오늘입니다. 어디 이뿐입니까? 나를 감동시키려고 재주를 부렸으니까 수고했다고 수고비조로 던지고 가는 알량한 동전닢은 마치 예수를 밀고하고 받은 은 삼십냥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너무나 분명하고 뚜렷한 것은 이렇게 망가진 자들을 포함하여 가장 정상적인 그리스도인들조차도 호모 데우스의 시대에 좌고우면 하지 않고 신앙의 경주에서 분연히 경주하도록 경성하게 해 주는 유일한 방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내 예배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너나 할 것이 없이 현대판 한센 병에 걸려 있는 우리들입니다. 이 심각한 재앙의 질병을 고침 받는 유일한 장소는 예배하는 자리입니다. 일전에 설교를 통해 말씀드렸던 것처럼 2022년, 우리 세인교회는 한센 병 환자가 깨끗해진 후에 다시 예수께 돌아오는 것이 예배라고 갈파했던 마르틴 루터의 말처럼 주께로 돌아오는 자들이 많아지는 2022년이 되기를 바랍니다. 내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다시 살아나는 유일한 방법은 예배자가 되는 것입니다. 따스한 성령님 마음으로 보네/ 내 몸을 감싸며 주어지는 평안함/ 만족함을 느끼네 사랑과 진리의 한줄기 빛 보네/ 내 몸을 감싸며 주어지는 평안함/ 그 사랑을 느끼네 부르신 곳에서 나는 예배하네/ 어떤 상황에도 나는 예배하네/ 부르신 곳에서 나는 예배하네 어떤 상황에도 나는 예배하네/ 내가 걸어갈 때 길이 되고/ 살아갈 때 삶이 되는 그 곳에서 예배하네/ 내가 걸어갈 때 길이 되고/ 살아갈 때 삶이 되는 그 곳에서 예배하네 부르신 곳에서 나는 예배하네/ 어떤 상황에도 나는 예배하네/ 부르신 곳에서 나는 예배하네 어떤 상황에도 나는 예배하네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