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5월 6일 수요 예배 설교 (욥기 78번째 강해) 본문: 욥기 36:1-16 제목: 완벽하지 않아도 됩니다. 서론) 제가 근래 많이 쓰는 단어 중에 ‘여백(餘白)’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한자 단어는 다음과 같은 단어가 합쳐진 단어입니다. 남을 餘에 흰 白입니다. 풀면 이렇습니다.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캔버스에 어떤 그림을 그리며 표현했습니다. 그림이 그려진 영역 외의 흰 백지 상태가 바로 여백입니다. 그런데 그 그림이 아름답거나 사는 것은 채워진 공간이 아니라 여백 문이라고 많은 미학자들이 해석합니다. 노자가 쓴 도덕경 11장을 보면 다음의 문장이 나옵니다. 有之爲以利 無之以爲用 (유지위이리 무지이위용) 번역하면 마음에 새겨야 하는 교훈입니다. “있는 것의 이로움은 비움의 쓰임이 있기 때문이다.” 그 만큼 여백이 중요하다는 것을 상징하고 있는 문장입니다. 젊은 시절, 목사는 완벽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신앙적인 차원에서 바늘로 찌르면 피 한 방울도 나지 않는 빈틈없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각인하며 살았던 것 같습니다. 물론 목사가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빈틈이 있는 삶을 살아서야 되겠습니까? 이 부분에 있어서 젊었을 그때나 이제 육십 나이에 들어선 지금이나 그런 마음은 매일반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나이에 들어서서 느끼는 감성적인 아쉬움이 있습니다. 그것은 여백의 미입니다. 도덕경에서 말한 대로 “있는 것의 이로움은 비움의 쓰임이 있기 때문이다.”라는 말 그대로 비움 즉 여백이라는 공간이 보이는 목회가 많이 부족했구나 하는 생각을 진하게 하는 게 근래의 제 마음입니다. 이 말을 이렇게 표현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틀리는 것이 있어야 맞는 것에 대한 더 정확한 공부를 할 수 있고, 빈틈이 보여야 그 빈틈에서 숨을 쉴 수 있는 것인데 그냥 목사는 성도들에게 완벽함을 보여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 사로 잡혀 그렇게 여백이 없이 달려온 것에 대한 아쉬움이 정말로 많이 남는다고. 어제 신학교 동기와 사석에서 만남을 가졌습니다. 만나자마자 친구 왈 제게 이런 말을 던졌습니다. “이 목사, 코로나 19사태를 보내면서 네 생각이 많이 났다. 분명히 자연적으로, 천재지변으로 일어난 사건인데도 두 달 여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상황 속에 처하면서 동기들 중에 네가 제일 많이 힘들어 할 것 같아서 마음이 많이 쓰였다.” 이 말을 듣는데 이 말이 위로로 들리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조금 여유를 갖고 살라는 질타처럼 들려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순간, 내가 여백이 별로 없는 목사구나 하는 자괴감이 들어 조금은 힘들었습니다. 친구가 한 마디를 또 한 마디를 던졌는데 이렇게 정곡을 찔렀습니다. “이 목사, 많은 책을 읽고 있는 거 아는데, 이제부터는 시를 더 많이 읽으면 어떨까? 이 목사의 논리적 접근은 거의 완벽한데 그 논리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힘들어할 수도 있어! 시를 읽고 더 할 수 있으면 시를 쓰면 좋을 것 같다.” 어제 친구와의 만남을 통해 참 많은 생각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본론) 책에서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지나침을 피하는 사람이다.” (김기석, “버릴수록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들”, 비아토르, p,191.) 저자는 이 글을 되 뇌이고 이렇게 부연했습니다. “흑백으로 가르는 데 익숙한 사람이 아니라, 서로 다른 것을 품어 안을 줄 아는 넉넉한 사람입니다. 그런 마음이 있는 곳에서 생명이 살아납니다. 날마다 처리해야 할 일이 힘겹더라도, 누군가를 품으려고 마음을 여는 순간 예기치 않았던 생명의 힘이 우리에게 생겨납니다. 이게 바로 생명을 살리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위의 책, 같은 페이지.) 본문 36장과 37장은 엘리후가 욥에게 날린 네 번째 즉 마지막 연설의 장입니다. 이제 몇 주 동안 살피겠지만 엘리후의 마지막 연설을 접하면서 제일 먼저 드는 생각이 이것이었습니다. “틀린 말보다 맞는 말이 더 많아 보이는 데 감동은 없다.” 왜 이런 생각이 들었을까? 저는 32-35장까지 직설하고 있는 엘리후의 1-3번째 연설 중에 상당수 귀를 기울여야 하는 대목이 있음을 이미 교우들과 나누었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인간의 욕심에 따라 이렇게 저렇게 흔들리지 않는 자존자라는 사실, 하나님은 정의라는 속성을 갖고 계신 존재라는 것, 고난이라는 것이 반드시 인과응보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심판뿐만이 아니라 견고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이라는 것 등등이 그렇습니다. 나름 엘리후가 갖고 있었던 젊은이로서의 지성적인 성찰은 어느 부분에서 칭찬 받을 만한 구석이 있음을 저는 인정하고 동의합니다. 그런데도 이런 칭찬받을 만한 지성인인 엘리후에게 느껴지는 불편함이 있습니다. 신앙적 여백의 불편함입니다. 본문 1-2절을 보겠습니다. “엘리후가 말을 이어 이르되 나를 잠깐 용납하라 내가 그대에게 보이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을 위하여 아직도 할 말이 있음이라” 우리가 보는 성경에는 ‘하나님을 위하여’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표준 새 번역 성경에는 ‘위하여’라는 단어를 원어에 아주 가깝게 번역했습니다. “조금만 더 참고 들으시기 바랍니다. 아직도 하나님을 대신하여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대신하여’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엘리후의 이 발언은 대단히 조심해야 하는 위험스러운 표현입니다. 엘리후는 지금 연배가 높은 욥에게 어느새 하나님의 대변자로 서서 그를 가르치고 있는 모양새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예언자(나비)를 해석할 때 조심해야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구약에서 예언을 하는 예언자는 철저하게 ‘預言’하는 사람이었다는 점입니다. 預言(substitute for telling)을 한다는 것은 앞에 있는 것을 豫言(fore-telling)한다는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하나님이 맡기신 것만 대신 말하는 사람이었다는 말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하나님이 맡기신 것이 아니면 절대로 입 밖으로 어떤 말도 내뱉지 않았다는 철저한 대언(代言)의 의미를 포함하는 말이며 그만큼 겸손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헌데 오늘 본문 2절을 보면 분명히 엘리후는 ‘대신하여’라는 의미를 사용하여 표현하고 있는데 문제는 그 대신이 진짜 자기가 하나님 대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리에서 하나님처럼 말하는 모양새를 갖고 있다는 인상이 강하다는 점에서 뜨악합니다. 우격다짐으로 엘리후를 코너로 몰고 가려는 설교자의 해석이 아닙니다. 본문 3-4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내가 먼 데서 지식을 얻고 나를 지으신 이에게 의를 돌려보내리라 진실로 내 말은 거짓이 아니라 온전한 지식을 가진 이가 그대와 함께 있느니라” 이 구절은 웬만한 신학적 토대가 있는 자로 하여금 읽을 때 아연실색하게 하는 망언 중에 망언입니다. ‘나를 지으신 이에게 의를 돌려보내라’ 이 말을 깊이 생각해보면 이런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엘리후에게 ‘의’를 가르쳐주셨고, 알려주셨기에 하나님은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당신의 의를 말씀하시지 않는 분이라는 기막힌 망발이 담겨 있습니다. 만에 하나 엘리후의 이 말을 곧이곧대로 이해한다면 엘리후는 하나님을 식물인간처럼 침대에 누여놓고 대신 자신이 수렴청정 하는 셈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불경이 또 어디에 있습니까? 앞서 35:5-7절에서 하나님은 사람에 의해 좌우되는 존재가 아니라고 천명했던 엘리후는 지금 자기가 아니고서는 하나님은 당신의 의로움조차도 밝히실 수 없는 무능력한 존재라는 것을 강조하는 말에 대적하는 자기모순에 빠진 것이 된 셈입니다. 그래서 최형묵 목사는 ‘반전의 희망 욥’에서 이런 엘리후의 태도를 다음과 같이 비평했습니다. “엘리후는 마치 자신이 하나님의 대변인이 된 듯이 자신만만하게 말한다. (중략) 그는 신학적 오만에 빠진 것은 아닐까?” (p,228) 이어지는 본문 5-12절까지를 살펴보십시다. 엘리후의 언변은 거침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능하시나 아무도 멸시하지 아니하시며 그의 지혜가 무궁하사 악인을 살려두지 아니하시며 고난 받는 자에게 공의를 베푸시며 그의 눈을 의인에게서 떼지 아니하시고 그를 왕들과 함께 왕좌에 앉히사 영원토록 존귀하게 하시며 혹시 그들이 족쇄에 매이거나 환난의 줄에 얽혔으면 그들의 소행과 악행과 자신들의 교만한 행위를 알게 하시고 그들의 귀를 열어 교훈을 듣게 하시며 명하여 죄악에서 돌이키게 하시나니 만일 그들이 순종하여 섬기면 형통한 날을 보내며 즐거운 해를 지낼 것이요 만일 그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면 칼에 망하며 지식 없이 죽을 것이니라” 별로 비평적인 성찰을 하지 않고 이 구절을 읽으면 대단히 은혜롭게 들리는 구절입니다. 하나님은 능하신 권능으로 아무도 멸시하지 않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그 능력으로 악인을 살려두지 아니하시며 고난 받는 자에게 공의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눈을 의인에게서 떼지 아니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의인들이 행여 악한 자들의 길로 들어서지 않도록 그들의 귀를 열어 교훈을 듣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의인들에게 명하여 죄악에서 돌이키게 하시나니 만일 그들이 순종하여 섬기면 형통한 날을 보내며 즐거운 해를 지낼 것이요 만일 그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면 칼에 망하며 지식 없이 죽을 것임을 경성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어떠십니까? 누가 감히 엘리후의 말에 이견을 내거나 토를 달겠습니까? 너무 완벽해 보이는 엘리후의 지성적인 지적에 혀를 내두를 정도로 동의하게 만들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완벽해 보이는 엘리후의 강력한 멘트에도 왠지 모를 불편함이 담겨 있음을 저는 느낍니다. 어떤 면에서 그렇습니까? 이 거침없는 엘리후의 언변이 철저하게 욥을 향하여 던지는 비수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대상자가 욥이라는 데에서 불편함이 있습니다. 본문 13-14절에 접근해 보십시다. “마음이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은 분노를 쌓으며 하나님이 속박할지라도 도움을 구하지 아니하나니 그들의 몸은 젊어서 죽으며 그들의 생명은 남창과 함께 있도다 하나님은 곤고한 자를 그 곤고에서 구원하시며 학대당할 즈음에 그의 귀를 여시나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대를 환난에서 이끌어 내사 좁지 않고 넉넉한 곳으로 옮기려 하셨은즉 무릇 그대의 상에는 기름진 것이 놓이리라” 13절에 언급된 ‘마음이 경건하지 않은 자’가 누구입니까? 욥입니다. 엘리후의 입장에서 볼 때 이 욥은 하나님이 경고하시는 음성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자입니다. 심지어 가능하면 쓰지 말아야 하는 단어까지 동원하여 욥을 압박합니다. 욥이 남창(男娼)과 함께 어울리는 부패한 죄인임을 서늘하게 공격합니다. 그러면서 엘리후는 이렇게 욥을 난도질한 후에 아주 점잖게 하나님의 자리에서 다음과 같이 구원의 방법을 소개하며 타이르기 까지 합니다. 마지막 구절입니다. 15-16절 본문입니다. “하나님은 곤고한 자를 그 곤고에서 구원하시며 학대 당할 즈음에 그의 귀를 여시나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대를 환난에서 이끌어 내사 좁지 않고 넉넉한 곳으로 옮기려 하셨은즉 무릇 그대의 상에는 기름진 것이 놓이리라” 우리는 여기까지 본문을 함께 공부했습니다. 다시 한 번 종합해 보겠습니다. 너무나 빈틈이 없어 보이는 젊은 지성, 엘리후의 강변은 거침이 없어 보입니다. 하나님이라는 존재에 대한 강력한 해설은 빈틈이 없어 보입니다. 해서 누구라도 손들고 항복해야 하는 기승전결이 뚜렷해 보입니다. 그러나 설교자인 저는 엘리후의 언변에 왠지 모를 불편함이 느껴져 두 손 들고 항복할 수 없습니다. 성경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며, 해석하는 설교자의 입장에서 지지보다는 유감스러움이 있다는 속내를 밝히고 싶습니다. 이 마음 때문입니다. ※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들이 갖고 있는 연약함을 보시는 분이지 완벽함을 요구하는 분이 아니시라는 은혜가 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연약함을 보시는 분이지 우리들이 율법적으로 완벽해지기를 기대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내가 넘어질 때 손 내미시는 분이지, 매몰차게 뿌리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내가 죄악으로 인해 넘어지고 쓰러질 때 아파하시고 눈물을 흘리시는 분이시지, 당장에 분을 못 이기셔서 그런 우리들을 지옥의 구렁이로 던지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래서 바울도 이런 하나님의 심정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로마서 8:26절입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엘리후는 욥이 행했다고 확신한 죄악에 눈을 부릅뜨고 쳐다보기는 했지만, 욥을 향하여 하나님이 기대하시고 기다리시는 따뜻한 안아주심에는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신앙공동체를 어떻게 가나안까지 가는 과정을 인도하셨는지를 다시 복기하는 설교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1:30-31절입니다. “너희보다 먼저 가시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 목전에서 모든 일을 행하신 것 같이 이제도 너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며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걸어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이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 하나” 본문에서 엘리후가 던진 승부수는 도리어 본인에게는 패착이 된 듯해 보입니다. 거의 완벽한 수준에 가깝게 해석한 하나님 정의가 도리어 하나님이 일하시는 여백을 제한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서울 강북에 위치한 모 교회에서 자행된 리더 훈련을 빙자한 폭력행위가 일파만파가 되어 세간을 휘젓고 있습니다. 도무지 상식적이지 않은 훈련으로 하나님의 사람을 만들어간다는 발상 자체가 할 말을 잃게 만드는 일을 또 교회 안에서 경험하면서 안타깝기가 그지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리를 꿰찬 자들의 망동 때문에 자행된 일입니다.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리웨이원이 쓴 ‘인생에 가장 중요한 7인을 만나라’에 보면 이런 글이 있습니다. “내가 기억해야 하는 할 사실은 ‘내가 누구를 아느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단느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누가 나를 아느냐’다”(p,195.)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이렇게 결론을 맺어 보십시다. 내가 누구를 알려고 하는 것은 잘못하면 내가 하나님의 자리를 꿰차는 월권을 저지를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도리어 저와 여러분이 주목하고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연약한 나를 알주시면 족하다는 은혜입니다. 이것 하나면 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의 연약함이라는 여백에 관심을 갖고 계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에게 결코 완벽한 것을 요구하시거나 종용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언제나 내 손을 잡아 주시며 일어나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내 신앙의 부족하고 연약한 여백을 알고 계시는 주님의 손 붙들고 날마다 일어서서 승리하는 세인 지체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