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예배

제목2025년 1월 30일 수요예배 설교 (요한복음 26번째 강해): 수가 성(城)에도 2025-01-30 11:50
작성자 Level 10

2025130일 수요예배 설교 (요한복음 26번째 강해)

 

본문: 요한복음 4:114

제목: 수가 성()에도

 

서론)

 

연휴 기간, 텔레비전에 방송했던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우연히 보게 되었는데 한 장면에서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제목이 마스터 송창식이라는 프로그램이었습니다.

노래하는 광인, 천재 등등의 수식어가 붙어 있는 송창식씨에 대한 삶을 조명해 준 프로그램이었습니다.

프로그램의 첫머리에 아주 인상 깊은 그의 삶의 한 부분을 작가가 소개합니다.

매일 약 46분 정도 하는 연습이 있습니다. 기타를 치는 기본기 연습입니다. 이제 내 나이가 78세인데, 사람들이 내가 하루에 46분 동안 기본기 연습을 한다고 하면 믿지 못하겠지만, 나는 가수로 이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없다고 생각하기에 빼놓지 않고 기타를 치는 기본기 연습을 합니다.”

그의 이 말속에서 그가 왜 50년 동안 대중들에게 잊혀지지 않는 가수로 존재할 수 있었는지, 그리고 사람들이 왜 그를 가리켜 천재라고 말하는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기본기 훈련보다 더 중요하고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歌人 송창식 씨의 말을 대입하고 싶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신앙의 기본기 연습이다.”

그렇습니다.

영적 기본기에서 이탈하지 않는 것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더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성도가 갖추어야 할 영적 기본기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갖고 계셨던 마음이며 삶의 내용일 것입니다.

성도가 지녀야 할 영적 기본기는 예수께서 보여주신 삶의 내용을 닮아가려는 모습입니다.

 

본론)

 

오늘 본문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사마리아 수가성에 사는 한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서 자신의 인생이 변화 받은 내용을 기록한 기사입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지방으로 가시는 여정에 사마리아 지방을 들어가시게 되었습니다.

본문에는 자세히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원래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과는 절대로 교제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분열 왕국 시대에 북 왕국 이스라엘 백성들이 앗수르에 의해서 멸망 당했는데 유대인의 지조를 지키지 못하고 앗수르라는 이방 민족과 혼합하여 잡종이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자존심에 먹칠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혼혈 민족이었던 사마리아인들하고는 절대로 상종하지 않는 것이 유대인들의 법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의 고서를 보면 이런 기도가 나옵니다.

하나님 아버지여 하나님이 이 세상 사람들을 부활시키실 때 사마리아 사람들은 한 명도 일어나지 못하게 하옵소서

이 정도의 혐오감으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싫어했습니다.

이렇게 악연이라고 생각한 사마리아 성으로 주님께서 들어가신 것입니다.

원래 지정학적으로 당시에 예루살렘에서 북쪽에 있는 갈릴리로 가려면 세 가지의 길이 있었습니다.

 

지중해 연안을 따라서 사마리아를 우회하여 가는 방법

요단강을 건너서 사마리아를 돌아가는 방법

사마리아를 관통해서 갈릴리로 가는 방법

 

이 중에서 일반적인 유대인들이라면 반드시 첫 번째나 두 번째를 선택하지 세 번째의 방법을 택하지 않습니다.

절대로 사마리아인들과는 상종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그들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현실적으로 말하자면 갈릴리로 가려면 세 번째 방법이 제일 시간이 절약되는 방법입니다.

그럼에도 유대인들은 전혀 경제적, 물리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고 손해를 보는 쪽인 첫 번째, 두 번째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절대로 사마리아인들과는 섞이지 않겠다는 유대인들의 민족주의적인 배타주의를 여지없이 보여주는 단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차원에서 볼 때, 주님이 사마리아 성으로 직접 들어가신 것은 혁명적인 일이었고, 파격 그 자체였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자신의 동족인 유대인들이 극도로 싫어하는 그 길을 왜 택하신 것일까요?

오늘 요한복음 26번째 강해를 통해 두 가지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1. 세속의 방향성을 뒤집기 위해서였습니다.

 

본문 34절을 다시 봅시다.

유대를 떠나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

여기에서 주목할 단어는 하겠는지라입니다.

영어 성경 4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He had to go through samaria on the way.

그는 노정에 사마리아를 거쳐 가야만 했다.”

주님은 불편한 것을 피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최종 목적지는 갈릴리였지만, 그 갈릴리로 가는 노정 중에 유대인들이 무척이나 불편해하고 부담스러워했던 사마리아라는 땅을 거쳐 가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한 것입니다.

왜 유대인들이 꺼리는 그곳 사마리아로 주님은 반드시 들어가야겠다는 의지를 표명하셨을까요?

세속적 경향 혹은 세속의 방향과는 결을 같이 하지 않겠다는 주님의 의지를 보이신 것입니다.

주님이 이렇게 단호한 결심을 보인 이유는 주님이 생각하는 생각과 세상이 생각하는 생각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예언자 이사야가 대변했던 야훼의 메시지가 기억나십니까?

이사야 55:89절을 소개합니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마태복음 57장을 산상수훈이라고 합니다.

주께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산에서 강론하실 때 빼어난 언어로 선언하셨다고 해서 붙여진 별칭입니다.

산상수훈에 기록된 예수님의 표현 중에 대단히 주목할 만한 상용구가 있습니다.

맨 처음에 기록된 대표적인 실례를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마태복음 5:2122절입니다.

옛사람에게 말한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이 표현입니다.

너희가 (율법에서)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표현이 여러 차례 등장합니다.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예수께서는 율법의 판을 뒤집으셨습니다.

왜 이런 혁명적이고 파격적인 행동을 보이셨습니까?

주님은 율법의 완성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주님이 세상을 이겼지, 세상이 주님을 이기지 못했다는 말을 담보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어제 설 명절 추도 예배를 드릴 때 아내와 함께 보았던 말씀이 예레미야 36장이었습니다.

제가 하고 있는 성서 일과 묵상 텍스트가 공교롭게 연휴 기간, 예레미야 36장이었는데 추도 예배에서 함께 나누어도 괜찮겠다 싶어 보았습니다.

제 묵상 노트에 기록한 글을 먼저 소개합니다.

야훼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한 예레미야 36장은 주전 605년이다. 그러니까 바벨론이 신흥 강대국으로 부상하여 앗수르를 정복하고 애굽의 바로 느고 정권과 주변 정세의 패권을 다투던 갈그미스 전투가 벌어진 그 해였다. 승리는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에게 돌아갔다. 전쟁의 결과에 따라 약소국 남 유대의 운명도 바람에 흔들리던 바로 그때에 예레미야에게 야훼의 말씀이 임했다. 36장이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지만, 예레미야에게 임한 야훼의 말씀을 추론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예레미야 사역 23년간, 선포되었던 다바르를 글로 기록하여 유다에게 경고하라는 것과 바벨론에 대항하면 멸망이라는 운명에 처하게 될 것이라는 선포였을 것이다. 하나님을 등진 지 이미 오래였고, 친 바벨론이 아닌, 친 애굽 정책을 펴던 여호야김에게는 예레미야가 기록한 율법은 눈엣가시였을 것이 자명하다. 기록된 두루마리 말씀을 여호야김과 고관들 손에 들어갔고, 그 말씀이 오늘로 말하면 국무회의 격인 고관 회의 장소에서 낭독되었다. 듣고 있던 여호야김은 분노했고, 칼로 두루마리를 잘라서 화롯불에 태운 뒤에 바룩과 예레미야 체포 명령을 내린다. 하지만 야훼께서 이 두 사람의 신병을 숨기시고 보호하셨다고 오늘 성서 일과는 보고했다. 묵상의 깊음이 내게 임했다. 칼로 베어 불에 태운다고 야훼의 말씀이 사라지는가! 그런 말씀이라면 애초부터 말씀이 아니다. 야훼의 말씀은 물리적으로 없앤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야훼의 말씀이 영원한 거다. 베드로가 그래서 이렇게 말한 메시지는 적절하다.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베드로전서 1:22-23)

불에 태워진 예레미야에 의해 선포된 야훼의 말씀 그대로 유다는 멸망했고, 두루마리를 태운 여호야김은 바벨론 포로로 끌려와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지만 죽임을 당하고 예루살렘 성밖에 시신이 던져지는 비극적 죽음을 맞이했다. 야훼의 말씀을 경멸하는 자를 하나님도 경멸하신다.”

하나님은 세속의 세력과 공중 권세 잡은 자들에게 지지 않으십니다.

세상의 방향과 같은 방향으로 걷지 않으십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세상이 보여주는 ’(to go against the grain)과는 다른 입니다.

결국 유대인들이 극도로 피하고 신경질적으로 경멸하는 사마리아로 주께서 들어가신 것은 세속의 방향성을 뒤집기 위해서였음을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2. 그곳에 구원받아야 하는 영혼이 있음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수가성에 있는 야곱의 우물가에 구원을 받아야 하는 여인이 올 것임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주께서 수가라는 동네에 야곱이라는 우물가에 도착하셨던 시간을 본문 6절에서 6(정오)쯤이라고 기록했는데, 바로 그 시간에 사마리아 여인 한 명이 그곳에 물을 길으러 온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물을 조금 달라고 청하십니다.

본문 7절입니다.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예수님의 말을 들은 이 여인은 정색하면서 당시에 유대인과 사마리아 사람은 서로 상종하지 않는 풍습이 있는데 어떻게 유대인인 당신이 나에게 물을 달라고 청하느냐고 기분 나쁜 내색을 보이는 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여인의 도발적인 반응에 주님은 당황하지 않고 10절에서 이렇게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답하는 예수님의 반응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직감한 여인은 그런 생수를 먹는 방법이 있으면 내게도 알려달라고 직설합니다.

여인의 이 요구에 주님은 우리가 이미 너무 익숙하게 알고 있는 이 유명한 말씀을 남기십니다.

본문 1314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주님이 여인에게 무슨 말씀을 하신 걸까요?

액면 그대로 부연한다면 시쳇말로 복음을 제시하고 전도한 것입니다.

물론입니다.

주님은 여인에게 생명의 복음을 소개하고 제시하신 것입니다.

주님이 사마리아로 들어가신 것은 거기에 구원받아야 할 영혼이 있음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해야 하는 궁극적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교회가 존재하는 그 땅에 구원받아야 할 영혼이 단 한 명이라도 있다면 교회는 그 땅에서 그 영혼을 위해 전심해야 합니다.

주님은 공생애 기간, 단 한 명의 영혼 구원에 올인하셨습니다.

마가복음 5장을 보면 주께서 거라사 지방으로 사역 동선을 옮겨 그곳에 방문하셨고, 그곳에서 흉악한 귀신 들린 자를 고치신 기사를 만나게 됩니다.

거라사는 유대인들에게는 금단의 땅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라면 가지 말아야 할 땅이었다는 말입니다.

그곳은 부정한 짐승인 돼지를 먹는 이방인들의 땅이었습니다.

그곳은 무덤들이 산재 되어 있는 귀신들의 땅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방문하기 전까지의 상황을 보면 갈릴리 서쪽 지역에서 수 많은 기적들을 일으키시며 승승장구하셨습니다.

이런 이유로 갈릴리 서쪽은 예수님이 마음만 먹으면 어떤 일도 하실 수 있는 토양이 이루어진 땅이었습니다.

세속적 출세 가도를 달릴 수 있는 만반의 준비가 다 갖추어진 땅이라는 말입니다.

인간적인 시각으로 따져보면 주님과 제자들은 이곳을 떠날 이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곳을 떠나 호수 반대로 가자고 명령하셨습니다,

마가복음 4:35절입니다.

그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우리가 이미 아는 것처럼 주님이 명령을 하시니까 할 수 없이 순종하는 제자들이 항해하는 갈릴리 호수 동쪽으로 가는 어간 심각한 풍랑으로 인해 죽음의 위기까지 맛보게 됩니다.

세속적 관점에서 볼 때, 제자들에게 거라사 행은 이래저래 세상 말로 재수가 없는 여행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이러한 마음을 모를 리 만무입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바로 거라사를 향하여 거처를 옮기신 것입니다.

왜 이 엄청나고 무모한 일을 주님이 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귀신 들려 고통 속에서 헤매고 있는 단 한 명의 영혼이 그곳에 있음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마치 사마리아 수가성에 구원받아야 할 한 명의 영혼이 있었던 것을 알고 계셨던 주님의 마음과 일맥상통합니다.

예수께서 거라사에 가신 이유는 귀신 들린 자를 살려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귀신 들린 자를 해방시켜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아무도 할 수 없었기에 그냥 놔두면 평생을 레기온 귀신에 붙들려 망가져 죽을 영혼을 구원해 주시기 위하여 그 엄청난 사역을 감당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만이 갖고 계신 영혼 사랑의 냄새요 색깔이요 정체성입니다.

단 한 명의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한 예수님의 행보였다는 말입니다.

교회가 무엇을 하는 곳입니까?

아니 교회의 존재 목적이 무엇입니까?

영혼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요한복음 10:10절에서 이렇게 선포하셨습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이뿐만 아니라 누가복음 15:7, 1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10)

 

결론)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앙의 기본기를 지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세속의 방향과 다른 그 반대 방향으로 올라가는 것이 신앙인이 지녀야 기본기입니다.

구원받아야 할 영혼에게 초점을 놓지 않는 것이야말로 성도가 가져야 할 신앙의 기본기입니다.

수가성에 올라가신 주님의 의도입니다.

연휴가 끝나가고 있습니다.

새로운 2월을 준비해야 하는 1월의 마지막에 있습니다.

영적 기본기를 다시 세워나가는 세인 교우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우물가의 여인처럼 난 구했네/헛되고 헛된 것들을/그때 주님 하신 말씀/내 샘에 와 생수를 마셔라/, 주님 채우소서/나의 잔을 높이 듭니다/하늘 양식 내게 채워 주소서/넘치도록 채워 주소서.

많고 많은 사람들이 찾았었네/주 안에 감추인 보배/세상 것과 난 비길 수 없네/, 주님 채우소서/나의 잔을 높이 듭니다/하늘 양식 내게 채워 주소서/넘치도록 채워 주소서.

내 친구여 거기서 돌아오라/내 주의 넓은 품으로/우리 주님 너를 반겨/그 넓은 품에 안아주시리/, 주님 채우소서/나의 잔을 높이 듭니다/하 늘양식 내게 채워 주소서/넘치도록 채워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