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2일 수요 기도회 설교 제목: 기본기를 찾습니다. (2) 본문: 누가복음 5:1-11 서론) 모 트로트 가수가 음주 운전 후 사고를 낸 뒤에 뺑소니까지 쳐서 가수 생활의 종지부를 찍어야 하는 구속의 기로에 섰습니다. 뺑소니도 나쁜 범죄지만 대중들을 더 분노하게 만든 것은 사고 이후에 자신의 죄를 막기에 급급하여 운전자 바꿔치기, 음주 운전 부인 등등 거짓으로 일관한 태도 때문입니다. 공인이고, 대중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 대형 사고를 칠 때마다 저는 직업의식 때문에, 그 사람의 종교부터 확인합니다. 불행하게도 불길한 예감은 언제나 적중합니다. 그는 기독교인입니다. ‘새롭게 하소서’라는 19세 때 CBS 장수 간증 프로그램에 나와 신앙고백을 하며 자신이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를 다짐하는 공적 선언까지 한 대중인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불우했던 시절을 이기게 하시고 자신의 인생을 바꾸신 분이기에 하나님을 결코 실망시키는 자가 되지 않겠다는 각오는 온데 간데 없어지고 수많은 사람에게 공분을 사게 만드는 장본인이 되었고, 특히 그가 높였던 하나님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어둠의 사람으로 변질됨으로 인해서 그의 삶의 최대 위기를 맞이하게 된 기사를 보면서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그는 왜 이렇게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상실하고, 어둠의 자리에서 머문 세속의 사람으로 변질되었을까요? 기본기가 흔들렸기 때문입니다. 초심이 변질되었기 때문입니다. 빛의 자녀였다가 어둠의 자녀로 전락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신앙의 기본기 장착은 중요합니다.
본론) 마가복음 1:16〜20절을 읽겠습니다.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곧 그물을 버려두고 따르니라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그들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곧 부르시니 그 아버지 세베대를 품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 저는 이 구절을 만날 때마다 짜릿한 감동을 받습니다. 마가복음은 누가복음보다 이전 작품입니다. 그러기에 이런 해석이 가능합니다. 누가복음의 저자가 오늘 본문 1-11절을 기록했을 때, 전적으로 참고했을 가능성이 있는 선재적 자료가 바로 마가복음 1:16〜20절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제일 먼저 기록된 마가복음의 보고를 살펴보면 중요한 의미가 다가옵니다. 16절을 다시 한번 보십시다.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예수님께서 갈릴리를 두루 다니셨습니다. 그렇게 갈릴리를 두루 다니시던 주님께서 어느 한 지역에 머물게 되셨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시선에 누군가가 주목되어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바로 시몬이라는 어부와 안드레라는 그의 형제였습니다. 이 기사를 소개한 마가는 곧바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이번에는 그물을 깁고 있는 또 다른 형제를 보았음도 소개합니다. 세베대의 아들들인 야고보와 요한이었습니다. 이들도 주님은 부르셨고 그들도 주님을 따랐다고 본문에서 말씀합니다. 20절을 다시 봅니다. “곧 부르시니 그 아버지 세베대를 품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 왜 예수님께서 이 형제들에 대하여 주목하게 되었는지에 대하여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16절에서 마가는 예수님이 보신 두 형제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이 구절이 참 중요합니다.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갈릴리의 어부 출신인 베드로, 안드레, 요한, 야고보라는 이름을 떠올리는 고정관념이 무식한 어부 정도입니다. 하지만 로버트 귤리히(Guelich)는 자신의 마가복음 주석에서 이 구절을 혁명적인 해석으로 주석합니다. “예수 시대의 어부들은 일반적으로 단순하고 무식하고 하층류에 속하는 노동자들로 풍자하여 설명함으로써 그들에 대한 설명을 그릇되게 알려준다. 어업은 팔레스타인의 주요 식량 중의 하나를 공급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고기를 잡는 일은 팔레스타인을 포함한 그리스-로마 세계에서 매우 인기 있는 직업이었다. 성경에서 말하는 일반적인 어부의 像은 고용된 일꾼이ᄅᆞ는 이미지에 가깝지만, 이들 네 제자들은 배와 고기를 잡는 장비를 소유하고 경영하는 또 다른 계층에 속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고기를 잡는 일에 고용된 노동자라기보다는 경영자에 가깝다.”(로버트 귤리히, 『WBC 마가복음 주석』, 솔로몬, 172쪽) 귤리히 교수가 이렇게 해석한 것은 근거가 있기 때문입니다. 세베대의 아들들이 예수님의 부르심(calling)에 응답하면서 그들이 포기한 것을 마가는 놓치지 않고 기록하고 있는데 마가복음 1:20절이 그것을 알려주는 자료입니다. “곧 부르시니 그 아버지 세베대를 품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 야고보와 요한은 아버지를 버렸다고 표현합니다. 문자로 이해하면 불효막심한 자들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부분을 함께 기록한 내용을 보면 또 다른 것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품꾼들과 함께”(with the hired servants)라는 대목입니다. 아들들은 아버지를 보호하고 있었던 품꾼들에게 부친을 의탁하고 자신들은 예수를 따랐다고 말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세배대의 집안은 고용인을 둘 정도로 부유층에 해당하는 계층이었다는 말입니다. 세베대의 아들 형제는 갈릴리 바닷가에서 어업을 통하여 부를 축적하고 있었던 경영인에 가깝다는 것을 증언해 주고 있는 대목입니다. 자, 여기에서 이런 추론이 가능해집니다. 대체로 경영자가 노동자보다도 경제적으로 풍요롭다는 것은 일반 상식입니다. 경제적으로 풍요롭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여유를 가질 수 있다는 말도 됩니다. 그런데 시몬과 베드로가 어떻게 했습니까? 우리나라 성경에는 단순히 바다에서 그물을 던지고 있음을 표현하고 있어 깊이 해석하기가 쉽지는 않지만, 영어 성경 NIV를 비롯하여 많은 성경에서는 이들이 호수 안쪽으로 들어가 그물을 던졌음을 (casting a net into the lake.) 묘사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그들은 경영자였지만 현장에서 자신들에게 맡겨진 고기를 잡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었음을 마가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세베대의 아들인 야고보와 요한도 경영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직접 그 힘이 든 그물을 깁고 있을 정도로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 대하여 최선을 다했다는 말입니다. 이제 지금까지 설명한 마가복음 1:16〜20절의 병행 구절인 오늘 본문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1〜3절을 읽겠습니다. “무리가 몰려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새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호숫가에 배 두 척이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 예수께서 한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아마도 갈릴리 가버나움의 남쪽이었던 게네사렛 근처에서 베드로를 비롯한 여러 명의 어부가 고기를 잡는 것을 주께서 보셨습니다. 2절을 보니까 호숫가에 배 두 척이 있었는데, 이윽고 주님은 그 두 배 중에서 시몬 베드로의 배에 올라타신 뒤에 그물을 씻고 있는 베드로에게 다짜고짜 호수 육지에서 배를 조금 뗄 것을 명하신 뒤에, 그 배 안에 설교를 시작하셨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 정황을 설명하고 있는 2〜3절의 메시지를 통해 지난 수요일에 이어 두 번째 성도가 갖추어야 할 기본기를 찾아내 보려고 합니다. ※ 성도라면 모름지기 갖추고 있어야 할 기본기는 성실성입니다. 노동자는 고용인이 정한 대로 일을 해야 하는 의무가 있습니다. 하지만 고용인의 시간은 자유롭습니다. 고용인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시간을 활용해도 되는 위치의 사람입니다. 로버트 귤리히의 의하면 베드로, 야고보와 요한은 갈릴리의 게네사렛 지역에서 제법 괜찮은 어부의 지위에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베드로는 밤이 맞도록 고기를 잡지 않아도 되는 자리를 차지한 어부였고, 야고보와 요한은 제법 괜찮은 부를 누리고 있는 아버지의 아들들이기에 꼭 목을 걸고 고기를 잡을 필요가 굳이 없는 이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본문의 정황에 따르면 베드로와 그 일행은 예수님이 찾아오신 그날의 수확이 전혀 없었다는 것을 전제할 때, 시쳇말로 공친 날이었는데도 그들은 자신들이 해야 할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본문에 기록된 이들이 했던 최선이 무엇이었을까요? 본문을 참고할 때 두 가지 행동이 눈에 띕니다. ⓵ 밤이 새도록 고기를 잡으려고 했던 정황 ⓶ 허탕 친 날이었지만 육지에 올라와 그물을 씻고 있었던 정황 이 두 가지의 상황을 전제할 때 베드로에게서 찾을 수 있는 정황이 하나 있습니다. 아무리 힘이 들고 낙망한 상황이라고 할지라도 자신이 기본적으로 해야 할 일에 대해 철저히 감당하려고 했던 성실성이 그에게 있었다는 생각입니다. 세베대의 아들들은 베드로와는 동선이 다른 게네사렛 호수 기슭에 있었습니다. 주님이 베드로를 부르신 뒤에 다시 장소를 옮기셔서 본 것은 야고보와 요한도 끊어진 그물을 깁는 모습을 보고 그들도 부르셨다는 점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을 통해 볼 수 있는 정황도 성실성입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사역을 성실하게 감당하는 자에게 하나님이 그다음 사역을 맡기십니다. 하나님은 작은 일에 충성한 자에게 큰일을 맡기십니다. 화요일 새벽 예배 묵상 일과 자료 텍스트는 열왕기상 19:11-21절이었습니다. 호렙산으로 피신해서 하나님께 죽기를 간구하며 깊은 우울증에 빠져 있었던 엘리야에게 주님이 오셔서 그를 위로하시고 세 가지의 명령을 하달하심으로서 소위 말하는 두 번째 미션을 주신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 가지 하달 명령을 열왕기상 19:15-16절은 보고합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길을 돌이켜 광야를 통하여 다메섹에 가서 이르거든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의 왕이 되게 하고 너는 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고 또 아벨므홀라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 ⓐ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서 아람의 왕이 되게 하라 ⓑ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서 북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라 ⓒ 엘리사에게 기름 부어 선지자가 되게 하라 하나님으로부터 하명을 받은 엘리야는 이 일에 순종합니다. 특히 엘리야가 세 번째 명령을 수행하는 장면을 이렇게 보고합니다. 열왕기상 19:19-21절을 읽습니다. “엘리야가 거기서 떠나 사밧의 아들 엘리사를 만나니 그가 열두 겨릿소를 앞세우고 밭을 가는데 자기는 열두째 겨릿소와 함께 있더라 엘리야가 그리로 건너가서 겉옷을 그의 위에 던졌더니 그가 소를 버리고 엘리야에게로 달려가서 이르되 청하건대 나를 내 부모와 입맞추게 하소서 그리한 후에 내가 당신을 따르리이다 엘리야가 그에게 이르되 돌아가라 내가 네게 어떻게 행하였느냐 하니라 엘리사가 그를 떠나 돌아가서 한 겨릿소를 가져다가 잡고 소의 기구를 불살라 그 고기를 삶아 백성에게 주어 먹게 하고 일어나 엘리야를 따르며 수종 들었더라” 새벽 예배 시간에는 주어진 시간의 한계가 있어 교우들과 나누지 못했지만, 이 구절을 묵상하면서 참 귀한 은혜를 받았습니다. 엘리사의 직업은 농부였습니다. 엘리사가 밭은 갈고 있는 어느 날, 엘리야가 방문했습니다. 엘리야는 자신이 입고 있었던 겉옷을 엘리사에게 던져줍니다. 선지자가 갖고 있는 리더십과 하나님이 허락하신 권위의 이양을 의미하는 행위입니다. 이 내용을 이해하는 것을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텍스트에서 나를 전율하게 만드는 메시지는 ‘열 두 겨릿소(24마리의 소)를 앞세우고 밭을 가는데’라는 구절입니다. 엘리야에게 지명하라고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상자 엘리사는 농부였지만 그냥 농부가 아니었습니다. 엘리사는 자기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성실함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랬기에 엘리사는 선지자로 부름을 받은 이후에는 또 다른 자신의 인생에 주어진 야훼의 미션에 최선을 다하기 위해 뒤를 돌아보지 않기 위한 결단으로 열 두 겨릿소와 농기구들을 불태워 버린 것입니다. 사도행전 22:3절을 소개합니다.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라” 예루살렘으로 순교 여행을 떠난 바울이 자기를 붙잡아 송사하여 죽이려는 유대인들 앞에서 자신이 사울에서 바울로 변화된 간증 거리를 선포하면서 이렇게 선언합니다. “나는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라” 유진 피터슨은 ‘메시지’에서 이렇게 이 구절을 번역했습니다. “그가 말을 이었다. 나는 길리기아의 다소에서 태어난 선량한 유대인입니다. 여기 예루살렘에서 교육받았고, 랍비 가말리엘의 엄격한 지도아래 우리 종교의 전통을 철저히 배웠습니다. 그리고 지금 여러분처럼 나도 항상 열정적으로 하나님 편에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선택하신 이유는 바울이 갖고 있었던 성실함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이 갖고 있었던 성실함을 무기로 그를 만들어 쓰신 것입니다. 성도가 갖추고 있어야 하는 것은 성실함입니다. 결론) 저는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누가 성실한 그리스도인입니까? 본인의 얍삽한 재주를 믿고 머리를 굴리는 자가 아니라, 자신에게 맡겨진 일들에 대하여 최선을 다하는 자입니다. 성도의 기본기는 성실성입니다. 고린도전서 4:1-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충성은 성실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헌신 된 자의 태도입니다. 다음 달에 『신-사사 시대에 읽는 사사기Ⅱ』가 출간될 예정입니다. 들어가는 말에 담긴 한 문장을 읽어드리고 설교를 맺겠습니다. “현장 목회자가 거침없이 비평, 성찰한 『신 사사 시대에 읽는 사사기 Ⅱ』를 출간하기 위해 1년 6개월이라는 시간, 필자는 오전 내내 서재에서 공부하며 씨름했다. 학술 학위가 없는 저자의 글은 역시 허접해! 라는 수모를 받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고도 근시 시력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은 책 읽기만큼은 견딜만하기에 학문적 접근을 시도한 사사기 주석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이강덕, 『신-사사 시대에 읽는 사사기Ⅱ』, 들어가는 말에서) 성실함은 집중력이며, 계산하지 않는 순결함이기도 합니다. 나는 우리 세인 지체들 모두에게 성실함이라는 기본기를 갖추는 데에 부족함이 없는 은혜가 임하기를 바랍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시작됐네 시작됐네 우리 주님의 능력이 나의 삶을 다스리고 새롭게 하네 자유하네 죄와 사망으로부터 나의 삶은 변하고 난 충만하네 시작됐네 우리 주님의 능력이 나의 삶을 다스리고 새롭게 하네 자유하네 죄와 사망으로부터 나의 삶은 변하고 난 충만하네 은혜로다 주의 은혜 한량없는 주의 은혜 은혜로다 주의 은혜 변함없는 신실하신 주의 은혜 합심 기도 1) 하나님, 성실한 그리스도인 되기를 원합니다. 2) 하나님, 계산하지 않는 그리스도인 되게 하옵소서. 3) 하나님, 내 유불리에 따라 사는 이가 아니라, 하나님의 기쁨을 목적으로 살게 하옵소서. 4) 하나님, 수요 예배가 또 다른 성령 폭발의 진원지가 되게 하옵소서. 5) 하나님, 우리 교회에 부흥의 물꼬가 터지게 하옵소서. 그 선봉에 내가 서게 하옵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