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4월 16일 부활절 설교 제목: 사망이 사망되다. 본문: 디모데후서 1:8-10 서론) 권미숙 집사께서 선물로 준 헝가리 출신의 작곡가인 프란츠 리스트의 피아노 연주곡 알레그로 칸타빌레를 칠레가 낳은 세계적인 피아니스트인 클라우디오 아라우의 연주로 반복해서 들었습니다. 고등학교 음악시간에 배웠던 것이 전부인 리스트의 작품들을 저의 손때 묻은 턴테이블을 통해 나오는 LP로 듣고 있노라면 왠지 모르게 아날로그 세대의 사람이기에 그런지 저는 너무 행복합니다. 프란츠 리스트는 1,800년대 중반기의 사람입니다. 김연아 선수가 벤쿠버 올림픽 쇼트 프로그램 배경음악으로 사용한 특히 유명한 작품인 ‘죽음의 무도’ 같은 명곡을 듣고 있노라면 정말로 공동묘지에서 빠져나온 혼들이 서로 뒤엉켜 춤을 추고 있는 듯 착각을 할 정도로 그 시대의 풍미와 감성을 느끼곤 합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 질문할 대목이 있습니다. 1,800년대 사람, 리스트의 음악적 감성과 천재적 작품성을 2017년을 사는 제가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엄청난 시간과 공간의 갭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그 때의 감동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단 말입니까? 그것은 음악적인 공감 때문입니다. 공감은 시공간을 초월하는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이런 차원으로 해석하다보면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인만이 경험할 수 있는 신비도 있다는 사실에 동의하게 됩니다. 그 신비 중에 가장 아름다운 신비는 오늘 우리들이 나누는 부활의 신비입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부활 신앙의 현재화로 말입니다. 우리들이 주군이신 예수께서 사망의 권세를 물리치시고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신 역사적 사건은 지금으로부터 약 21세기 전의 일입니다. 저는 21세기 전이라는 시간의 갭과 팔레스타인이라는 공간의 다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부활이 나에게 고스란히 현재화되고 있음을 수없이 느낍니다. 저는 오늘 2017년 부활주일 아침에 이 점을 우리 교우들과 나누고자 합니다. 여러분이 저에게 오늘 부활하신 주님의 사건을 시공간을 극복하고 체휼하며 느낄 수 있는 결정적인 증거를 제시하라면 오늘 본문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본론) 오늘 우리들이 읽고 있는 디모데후서는 이미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 투옥되어 있을 때 에베소에서 목회를 하고 있었던 디모데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입니다. 이 편지에는 바울이 상당히 육체적으로 곤비했던 것으로 여겨지는 여러 정황들이 담겨 있습니다. 예를 들어 그는 이미 많이 노쇠해 있었기에 로마의 가을 추위에 힘들어 했던 것 같습니다. 더불어 사랑하는 사람들과 육신적인 이별을 해야 하는 죽음 즉 순교도 직감했기에 사랑하는 양아들 디모데를 보고 싶어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가 지금 구금되어 있는 로마의 감옥에는 주치의의 역할을 했던 누가이외에는 아무도 그의 곁에 없었기에 사람으로 인한 외로움도 있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러했기에 바울은 이 편지의 말미에 이런 소회를 진솔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4:9-11절을 읽어보십시다.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두기고는 에베소로 보내었노라 네가 올 때에 내가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둔 겉옷을 가지고 오고 또 책은 특별히 가죽 종이에 쓴 것을 가져오라” 저는 바울의 이 술회를 보면서 가슴이 아립니다. 그도 인간인지라 순교를 앞두고 이런 감성적인 아픔들을 디모데에게 토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의 이러한 육체적인 곤비함은 어떤 면에서 볼 때 처절하리만큼 디모데후서에 기록되어 있는 반면, 그의 영적인 면은 정말로 21세기의 시간적인 차이를 두고 바라볼 때 이 목사를 놀라게 합니다. 왜입니까? 그의 영적인 면에서는 약함의 빈틈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본문 8절을 다시 읽어보십시다.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무슨 말입니까? 바울은 육체적으로 심히 곤고했던 상황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모데에게 두 가지를 권하고 있습니다. ① 주를 증언한 것과 주를 위하여 갇혀 있는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라. ②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이 권고는 주석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고린도전서 1:23절에서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선포한 메시지를 통해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황당무계한 믿음을 갖고 있는지 당시의 주류적인 멤버들인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의 반응에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23절을 확인해 보십시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실상이 그렇지 않습니까? 주후 1세기 십자가는 기피 형벌 1호였습니다. 십자가형은 생각하기 싫은 저주의 심벌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을 비롯한 그리스도인들이 전했던 것이 바로 그 십자가에 달린 예수이니 이런 황당함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세인트루이스 대학의 톰 라이트 교수는 “이것이 복음이다.”에서 이렇게 이 황당함을 현대적 서술로 그리고 있습니다. “그는 유대인이다. 그리고 그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 그의 이름은 예수라고 한다. 이쯤 되면 사람들은 어이가 없어 입을 벌리고 있을 것이다. 그들을 바울을 빤히 쳐다 볼 것이다. 이 바울이라는 사람이 누구든지 그는 오늘 무엇을 잘못 먹은 것이 틀림없다. 아니면 뙤약볕에 너무 오래 앉아 있었는지 모른다. 십자가형은 당시 가장 수치스러운 형벌이었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이미 그 사람은 죽었다. 어떻게 십자가에 달려 죽은 사람이 주가 될 수 있으며,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단 말인가?”(p,50) 이것이 오늘 본문의 시대적 정황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권고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주를 증언한 것과 주를 위하여 갇혀 있는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며,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한 것입니다. 말이 안 되는 것처럼 보이는 이 부담감 백배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어지는 본문을 통해 지켜야 하는 이유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본문 9절을 다시 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이제 바울이 디모데에게 무리수 천만인 것 같은 그리고 부담 백배의 십자가 복음의 증언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기꺼이 동참해야 하는 당위성을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무엇입니까? 아들 예수를 그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한 하나님께서 나 바울과 너 디모데를 구원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그 하나님이 너와 나를 불러 소명을 주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어디 이 뿐입니까? 그 구원과 소명은 영원 전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획하신 은혜였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여기까지만 해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는 충분한 근거로 충분합니다. 그런데 오늘 부활 절기에 더 강력한 이유를 본문 마지막 절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마지막 10절입니다.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그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무슨 말입니까? 이 구절에 기록되어 있는 헬라어 ‘에피파이네인’ (나타나심)은 신약성경에서 두 가지의 사건과 관련하여 쓰입니다. 하나는 성육신과 관련되어 쓰입니다.(디도서 3:4) 그리고 또 하나는 그리스도 예수의 재림과 관련하여 사용된다는 점입니다. (디도서 2:11-14) 이것을 종합한다면 본문 10절에 기록된 예수의 나타나심은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두 경우 전부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는 대단히 중요한 바울의 신학적 조명을 받을 수 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의 메시아로 오신 초림과 앞으로 심판의 주로 오실 재림의 시간적 간극 사이에 주님이 보여주신 가장 위대한 사건이 무엇입니까? 다시 사신 부활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바울에게, 디모데에게, 그리고 21세기라는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살고 있는 저와 여러분에게 보여주신 그리고 이루신 감동이 있습니다. 저는 다시 강조하고 싶습니다. 무엇이었습니까? 사망을 폐하신 것입니다.(10절 중반절) 저는 바울이 이 선언에 흥분합니다. 주님은 부활하셔서 사망을 폐하셨습니다. 유진 피터슨은 ‘메시지’에서 이 구절을 사망을 주어로 삼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사망이 패했다.” 기가 막힌 번역입니다. DBY(DARBY TRANSLATION) 영어성경은 이 대목을 아주 문학적으로 번역했습니다. “죽음을 취소(말소)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our Saviour Jesus Christ, who has annulled death.) 가톨릭과 개신교회가 함께 번역한 공동번역 성경은 이렇게 이 부분을 기록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의 권세를 없애버리시고” 저는 이런 번역에 의지하여 오늘 설교 제목을 이렇게 정해 보았습니다. “사망이 사망되다.” 저의 설교 제목은 분명한 전제가 있습니다. 주님의 부활하심이라는 전제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다시 부활하신 순간, 사망은 사망되었습니다. 우리나라 말 중에는 듣기에 따라 이렇게 말장난 같은 표현들이 있지만 곱씹으면 강력한 의미를 나타내는 장점이 있습니다. 다시 강조합니다. 주님이 부활하신 순간, 사망은 사망된 것입니다. 이것은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해서 이것을 일찍이 알았던 바울은 고린도전서 15:55-58절에서 이렇게 담대히 선포한 것입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이제 확실해졌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21세기라는 시간적 간극을 뛰어넘어 오늘 이강덕 목사가 그 부활을 나의 부활로 받아들일 수 있는 그 당위성은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난 이후, 나의 삶의 부분, 부분마다 스멀대고 올라오며 나를 짓누르고, 나를 또 죽이려고 하는 일체의 영적 사망이 사망되었음을 체휼하고 경험하기 때문임을 말입니다. 그렇다면 사망이 사망된 오늘, 우리 세인지체들이 부활의 증인으로 사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난을 승계하며 살아야 합니다. 2017년 부활절, 저는 이 방법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 썩지 아니하는 삶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본문 10절 후반절에 있는 말씀이 가슴에 남습니다. “그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주님이 부활하심으로 사망을 폐하셨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셨다면 마땅히 부활의 주님을 주군으로 모시고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오늘과 내일과 모레에 도무지 썩지 아니할 삶을 살아내는 것이야 말로 너무나 당연한 의무이지 않겠습니까? 10절에 기록되어 있는 생명이라는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영적인 구원 받은 사람들에게만 적용되어 사용되는 영원한 생명을 뜻하는 ‘조에’라는 단어로 기록되었습니다. 적어도 우리들은 ‘조에’ 라는 영생을 부여받은 백성들입니다. 이 ‘조에’ 는 썩지 않는 생명입니다. 오늘 우리들의 주변 환경에 우리들의 영혼을 썩어문드러지게 하는 것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것은 구원받은 백성들이라고 해서 피해가지 않습니다. 동일하게 이 땅에서 공격받는 공통분모입니다. 요한복음 15:5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우리가 너무 잘 아는 말씀입니다. 이 구절에서 눈 여겨 보아야 할 대목이 무엇입니까?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바로 이 대목입니다. 목회 30년을 뒤돌아보면 이 구절의 위대함을 절실하게 느낍니다. 목회의 현장에서 성도들과 함께 부대끼면서 살아온 체험자로서 간증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 어느 것 하나 주의 손길이 안 미친 것이나 곳이 없다는 은혜입니다. “주님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정답입니다. 단 위에 설 때마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내용 중에 지난 30년 동안 변하지 않은 제목이 있습니다. “말씀만이 살아남는 성도들 되게 하시옵소서!” 왜입니까? 너무 간단합니다. 썩지 않는 것은 유일하게 하나님의 말씀뿐이기 때문입니다. 김영봉 목사께서 쓰신 ‘내가 그 분 안에, 그 분이 내 안에’를 보면 재미있는 글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50대에는 잘 생긴 사람이나 못 생긴 사람이나 같고, 60대에 이르면 적게 배운 사람이나 많이 배운 사람이나 다름이 없고, 70대에 이르면 가진 사람이나 못 가진 사람이나 같고, 80대에 이르면 건강한 사람이나 아픈 사람이나 다름이 없고, 90대에 이르면 산 사람이나, 죽은 사람이나 다름이 없다.”(p,155) 말 되지 않습니까? 왜 말이 됩니까?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앞에 열거한 외모, 지식, 돈, 육체적 건강, 이 모든 것들은 반드시 썩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썩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그의 말년에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베드로전서 1:23-25절입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새벽에 남성 교우 한 명이 근래에 열심히 예배에 나와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배하고 있습니다. 지난 주간에 새벽예배 시간에 들으려고 해서 들은 것이 아니라 아주 자연스럽게 교우의 기도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는 울음과 통곡이 어우러진 채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이전에는 신실한 가장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회개합니다. 이제 그것을 깨달았습니다. 말씀을 들으면서 이제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 신실한 가장의 삶을 살겠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썩어지는 것을 위해 살았던 삶의 방향성을 바꾸어 썩지 아니하는 영원한 삶을 위해 내 삶의 방향성을 돌이키는 것이 바로 오늘 나 또한 부활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경험한 자는 썩지 아니할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살게 됩니다. 아니, 반드시 살아내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은 TD, 영성훈련, 치유 부흥회, 템파테이션, 양육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할 때 가능합니다. 나는 결코 썩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듦으로 날마다 삶 속에서 현재적 부활을 경험하는 세인 지체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결론) 이제 저는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얼마 전, 제천 여고에 하려하게 핀 목련이 일주일 만에 너무 흉하게 시든 것을 보았습니다. 청풍 호반에 벚꽃이 만발하는 시간은 길어야 열흘입니다. 저는 벚꽃이 가장 아름다울 때가 꽃잎이 떨어져 흩날릴 때라고 생각합니다. 정말로 환상적으로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떨어진 벚꽃 잎이 비가 와서 이리 쏠리고 저리 쏠리는 것을 수없이 보았는데 그것은 그렇게 아름다웠던 흔적이 아니라 쓸쓸함의 흔적처럼 자국을 남깁니다. 제 주민등록증에 들어 있는 사진은 진해에서 갱신했기에 30대 후반에 찍은 사진이 들어 있습니다. 저도 그때는 볼만했던 얼굴이었습니다. 헌데 그 사진을 지금의 몰골과 비교하면 완전히 다른 노인이 한 명 들어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입니다. 중요한 것은 앞으로 10년 뒤에 찍은 사진과 지금 사진을 비교해 보면 그래도 지금 사진은 청년이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삶이지 않겠습니까? 이기주는 ‘언어의 온도’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생 말이지.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 어찌 보면 간단해. 산타클로스를 믿다가, 믿지 않다가, 본인이 산타클로스가 되는 거야. 그게 인생이야.”(p,101) 참 의미 있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우리는 그렇게 살다가 육체적으로 그러게 늙어가다가 반드시 썩는 날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주님의 부활을 믿는 자는 내 삶의 오늘 경험하는 영적 사망은 사망되었음을 확인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부활의 현재화를 체휼합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 주어진 가장 위대한 복임을 명심하고 오늘도 승리의 부활을 경험하고 살아가는 세인 지체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