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방

제목차별이 아닌 성별로2025-02-24 08:08
작성자 Level 10

 

2025224일 월요일 성서 일과 묵상

 

차별이 아닌 성별로

 

오늘의 성서 일과

 

 

시편 38, 창세기 33:1-17, 고린도전서 11:2-16

 

 

꽃물 (말씀 새기기)

 

고린도전서 11:3-7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무릇 남자로서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요 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이는 머리를 민 것과 다름이 없음이라 만일 여자가 머리를 가리지 않거든 깎을 것이요 만일 깎거나 미는 것이 여자에게 부끄러움이 되거든 가릴지니라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그 머리를 마땅히 가리지 않거니와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

 

마중물 (말씀 묵상)

 

바울은 갈라디아서 3:27-28절에서 이렇게 썼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주후 1세기 그리스-로마 문화권에서 볼 때 대단히 혁명적인 발언이 아닐 수 없다. 참 멋 있는 발언이며 성찰이라고 생각해 동의했다. 차별이 용인하지 않는 바울의 용기에 박수까지 보냈다. 그런데 오늘 성서 일과는 갈라디아교회 공동체에 보낸 편지를 전제할 때 매우 실망스럽다. 차별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바울의 장담이 무색해 질 정도로 차별적 발언처럼 보이는 게 오늘 성서 일과기 때문이다. 차별 정도가 아니라 오늘 성서 일과를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바울은 여성 폄훼에 가까운 발언이니 말이다. 바울의 변질일까? 무슨 일이 있는 건가?

미국 에즈베리 신학교 신약학 교수인 크렉 S, 키너 박사의 고린도전서 11:39절의 해석을 읽었다.

주후 1세기 고대 그리스, 로마의 문화 중에 여성의 은둔이라는 배경을 근거했다는 해석이 보였다.

이집트의 유명한 역사 사상가인 필로의 글을 인용한다.

여성에게 가장 좋은 것은 집 안에 머물러 있는 것과 가사 일과 관련 없는 일을 피하는 것이며, 격리되어 남아 있는 것이다.” (크렉 S, 키너, 바울과 여성, p,52)

이런 문화적, 사회적 배경을 갖고 있었던 고린도 지역도 예외는 아니었기에, 이 지역의 여성들은 외출하는 것을 좋아하였고 또 그것을 매우 부적절한 행위로 보았기에 외부에 나가서 기도나 예언과도 같은 종교적인 행위를 할 때에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지 못하도록 베일을 쓰고 하라는 압박이었다는 것이 첫 번째 해석이다.

고린도 지역에서 여성들이 머리를 풀어 헤치고 다니는 예외가 있었는데 그것은 창녀들과 이교의 신을 섬기는 여 사제들이 하는 행위였기에 그들과 같은 그룹으로 보이지 않도록 강제했다는 해석이다.

여성 신학자 엘리자베스 쉬슬러 피오렌자는 고린도 교회의 여성들이 머리를 풀어 헤치고 예배에 참석하는 것을 고대 이교였던 이시스 제의와 연결하여 해석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피오렌자는 이시스를 섬기던 여사제들은 보통 이마에 띠를 두르고 어깨에 모발이 흩어지게 하는 긴 머리를 가졌다는 것을 고고학적 기반을 근거로 제시하였는데 키렉 교수도 이에 동의했다. 또 하나는 창녀들의 머리 모양이었다. 고린도 지역의 창녀들 역시 머리를 풀어 헤쳐 남성들을 유혹하였는데 이런 일이 하나의 사회적인 틀이 되어버렸기에 일반 여성들에게 머리를 가리라고 한 것이 시대의 통례였다는 해석이다.

같은 맥락에서 주후 1세기 여성들의 머리는 정욕을 불러일으키는 아름다움의 대명사였기에 이것을 근원적으로 막는 행위로 바울이 본문을 기록했다는 이해다.

키너 교수가 제시한 자료에 의하면 주후 1세기 머리에 아무 것도 쓰지 않는 여성이 남자를 유혹하는 방법으로 여겼기에 이런 일을 행하는 여자는 결혼 계약서에 명시된 위자료도 받지 못하고 강제 이혼을 당했고, 더 심하게는 간통한 여자들에게는 반드시 머리를 풀어 헤치고 다니도록 함으로써 말 그대로 그것이 나다나엘 호돈의 주홍 글씨와 같은 치욕의 상징이 되게 했다는 것이 오늘 성서 일과의 주석적 해석이다. 이런 근거와 이유로 인해 바울은 어쩔 수 없이 교회 질서와 여성들로 인한 공동체의 와해를 방지하기 위해 본문의 룰(rule)을 정하였고 이 룰이 남성 우월적인 표현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는 것이 키너 교수의 지론이다. 설득력이 있어 나 또한 본문 해석의 주된 자료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렇다면 오늘 성서 일과를 어떻게 현대적으로 받아들여야 할까? 적어도 내겐 이렇다. 교회 공동체는 결코 차별이 존재해서는 안 되지만, 공동체의 질서를 위해 엄격한 성별 됨은 존재해야 한다. 비평적 성찰을 각오하고 내가 해석한 오늘 성서 일과의 결론이다.

두레박 (질문)

 

목사로 교회를 섬기며 차별하는 일을 혹시 하고 있지는 않은가?

 

손 우물 (한 줄 기도)

 

하나님, 내가 섬기는 교회에 차별은 자리를 잡지 못하게 하시고, 거룩한 성별이 있게 하옵소서.

 

나비물 (말씀의 실천)

 

섬기는 공동체가 모두가 주 안에서 하나임을 인식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자.

 

하늘바라기 (중보기도)

 

주님, 이 땅에서 차별이 사라지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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