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지은이 | 김기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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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출판사 | 꽃자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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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일 | 2023-07-20 16:41: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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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말씀 등불 밝히고”(꽃자리, 2023년 간)를 읽은 뒤 나누는 두 번째 이야기 결혼을 앞둔 여인이 친구로부터 그 사람과 결혼하기로 결심한 이유에 대해 질문을 받았다. 그 여인이 이렇게 대답했다.
“그 사람과 함께 살면 내가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야” (Because I really conceived that I could be a better person with him)
시대의 지성으로 살고 간 故 신영복 선생은 이 이야기를 전하면서 글 끝을 이렇게 맺었다.
“이러한 태도는 우리 시대의 수많은 우상을 깨뜨리고 인간의 진실을 꿰뚫어보는 뛰어난 통찰이며 양심이라고 느껴집니다.” (신영복,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돌베개, 350)
내가 김기석 목사의 글을 가까이 하는 이유는 그의 글과 동행하면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저자의 글을 가까이 하기 시작한 지가 벌써 십 수 년이 되었다. 그의 글들에 대한 독서에서 빠진 것은 내가 알지 못해서라면 어쩔 수는 없겠지만, 없다. 또 한 가지, 그의 설교를 듣는 일은 내 일상 중에 하나다. 일주일이라는 시간에 유일하게 듣는 설교다. 목사가 또 다른 목사의 설교를 지속적으로 듣는다는 것은 그에게 중독(?)되어 있지 않는 한, 거의 불가능하다. 헌데 필자는 이 불가능한 일을 십 수 년 이어오고 있다. 나는 왜 김기석에게 천착하는 것일까를 꽤 많이 생각해 보았다. 대단히 비판적인 성찰을 하면서 그에게 나는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스펙트럼을 갖고 있어서 그런가 물었다. 그런데 결론은 버킹검이다. 그렇지 않다. 왜 나는 그의 블랙홀에 빠져 있는 것일까? 이유야 여러 가지이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다. 그와 동행하면 적어도 나쁜 목사는 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다. 2018년에 『시골목사의 김기석 글 톺아보기』를 출간하고 어줍지 않게 섬기는 교회에서 북 콘서트를 진행했던 적이 있었다. 당시 부족한 사람의 책을 출간해 준 동연출판사 대표이신 김영호 장로께서 논찬자로 참여하여 기조 발언을 했는데 멘붕 그 자체였다.
“제가 다니는 교회의 담임목사의 책을 톺아보기 한 저자의 북 콘서트에서 논찬자로 발언하는 것이 대단히 쑥스럽지만 나는 내가 섬기는 교회 담임목사인 김기석 목사에 대해 이것만은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적어도 우리 교회 담임목사님은 거짓말은 하지 않습니다.”
장내가 고요해졌다. 그리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같이 참석한 동기 목사들을 비롯하여 여타 목사들은 졸지에 타격 당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김기석 목사는 적지 않은 敵이 자연스럽게 만들어져있다. 물론 당사자가 인위적으로 그 무언가를 반응해서 만든 적은 아니지만, 대단히 많은 사람들에 의해 곱지 않은 시선으로 강탈당하고 있는 사람이 김기석 목사다. 그러기에 그를 팔로잉 하는 나 또한 경계를 당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김 목사의 글과 삶에 대해서 분리되고 싶지 않다. 저자는 나보다 5년 정도 삶의 선배다. 후배가 본받을 만한 선배를 따라가는 것이 뭐 그리 큰 죄인가 싶어 그냥 그렇게 버티기로 했다. 버틴다고 말했지만 어찌 버팀의 이유가 가벼울 수 있겠는가! 결코 경(輕)하지 않다. 왜? 이번에 두 번째로 이야기하는 글들과 그 말한 이의 삶이 답이다. 두 번째 이야기는 324-617쪽의 북 리뷰다. 이번 파트의 대부분은 예언서다. 신약성경의 앞부분에 해당하는 4 복음서와 역사서인 사도행전, 바울의 서신중에 그 분량이 여타 다른 서신에 비해 월등한 로마서, 고린도전후서에 대한 이야기 나눔이다. 필자가 리뷰를 하고 있는 이번 파트는 많은 목회자들에게 비관심의 대상들은 소 예언서가 그 주류를 이룬다. 한국교화 강단에서 소 예언서는 많이 배제되어 있다. 설교자들에에 기피당하고 있는 셈이다. 내 설교 파일을 들춰보았다. 어줍지 않지만 2015년에 스바냐 강해를 끝으로 12 소 예언서 말씀 사역을 마쳤다. 거의 대부분 ‘특새’를 통해 일주일 동안 살핀 결과물이다. 이렇듯 소 예언서 사역을 마친 지가 벌써 8년이라는 세월이 지나고 있지만, 당시 말씀 준비 과정 때마다 설교자인 필자를 괴롭힌 화두가 있었다.
吉 예언자와 凶 예언자에 대한 정체성 재고였다.
정경 안에 등장하는 일체의 예언자가 다 그렇다고 몰아붙일 수는 없지만 거의 대부분의 예언자들은 그들의 정체성이 길 예언자들이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최초의 문서 예언자였던 호세아로부터 마지막 예언의 소리를 담았던 주전 5세기 후반 예언서인 말라기에 이르기까지 시대의 전반은 야훼를 알았지만 야훼 하나님을 그 얄팍한 앎으로 비켜나가던 영적 암흑기였기에 그들과 맞서야 했던 예언자의 소리는 吉이 아닌 凶일 수밖에 없었다. 필자도 12 소 예언서 강해 사역을 진행하는 동안 정말 부인하고 싶었지만 부인할 수 없었던 테제가 한국교회의 영적 자화상과 내 사랑하는 한국 사회에 대한 조망이 예언자들이 선포해야 했던 영적 상태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유사성에 대한 도전이었다. 그러기에 설교를 해야 하는 설교자로서 이 사역을 감당하는 대 전제는 흉 예언의 소리를 전해야 한다는 당위였다. 이것이 매우 힘든 일이었고 고통스러운 행군이었다. 필자도 많이 흔들렸던 12소 예언서의 ‘나비’들을 김기석 목사는 흉 예언자의 소리로 전하기를 주저하지 않은 선배라는 점은 나를 당혹하게 만들고 비참하게 만드는 일이지만 그 반면, 아이러니하게도 나를 매료시키는 결정적 원인이다. ‘꾸짖을 용기’라는 제하의 미가 설교는 내게 벼락이었다. 저자는 미가 2:1-2절을 소환한다. “그들이 침상에서 죄를 꾀하며 악을 꾸미고 날이 밝으면 그 손에 힘이 있으므로 그것을 행하는 자는 화 있을진저 밭들을 탐하여 빼앗고 집들을 탐하여 차지하니 그들이 남자와 그의 집과 사람과 그의 산업을 강탈하도다” 주전 8세기 후반의 유다는 북쪽 이스라엘의 멸망이라는 대단히 충격적인 사건을 목도한 시기다. 선민공동체로 그 자부심이 있었고, 이희학 교수의 지론에 의하면 우리가 신명기사가들에 의해 세뇌당한 탓에 항상 선입견으로 갖고 있는 패악한 집단 북 왕국 이스라엘이라고 치부하는 것은 무지한 일처럼 여겨질 정도로 북쪽은 나름 잘 나갔다.
“오므리가 왕권을 탈취한 후 그와 그의 후손들이 통치했던 약 40년간은 북 왕국 이스라엘 역사에서 최고의 정치적 안정기와 국가적 부흥의 시기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희학, 『북 이스라엘의 역사와 종교』, 프리칭 아카데미, 76.)
세속적 스펙트럼으로 볼 때 꽤 괜찮았던 이스라엘이 멸망을 당한 시기는 주전 8세기 후반이다. 미가는 바로 이때 유다를 중심으로 사역했던 예언자였기에 유다의 영적 상태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북 이스라엘의 패망 원인이 야훼 신앙과의 결별이라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다의 지도층은 그 멸망의 이유를 닮아가고 있는 것에 대한 비판이었다. 유다 내에 일체의 吉 예언자들은 유다의 대세들이 광풍처럼 휘몰고 있는 반 야훼적인 악함에 분노하기는커녕 동조했다. 도진개진이요, 오십보백보였다. 이 참담한 현실을 목도한 미가는 계란으로 바위치기를 감행한다. 준엄한 꾸짖음이었다. 김 목사는 미가의 꾸짖음에 박수를 보낸다. 아브라함 요수아 헤셀의 말을 차용하며 응원한다.
“예언자는 철저히 느끼는 사람이다. 하나님은 그의 영혼에 무거운 짐을 지워주셨고, 그는 고개를 숙여 인간의 무모한 탐욕에 망연자실해 있다. 하나님은 예언자의 말을 통해 분노하신다. 예언자들의 주장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엉거주춤하여 알쏭달쏭한 법이 없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의 가슴에서 쏟아져 나와 인간의 가슴속으로 뚫고 들어가려는 듯 강요하고 앞으로 밀어 붙인다.” (아브라함 요수아 헤셀, 『예언자들』, 삼인, 37-38, 본서 426, 재인용)
미가가 그랬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미가는 시대의 패역함에 대해 준엄한 꾸짖음을 선포할 수 있었다고 저자는 역설한다. 저자가 이렇게 미가 예언서를 이렇게 설명한 이유는 단 한가지다. 한국교회가 미가 시대와 닮았기 때문이다. 김 목사는 미가 예언서에서 미가 2:1-2절을 소개했지만 나는 12예언서 전체에서 예언서 전체를 대변할 만한 구절을 선택하라면 6:6-8절을 주저 없이 추천하고 싶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몇 년 전에, 한세대학교 영산신학대학원 채플에서 설교를 할 기회가 있어 이 구절을 본문 삼아 설교했던 적이 있다. 무시무시한 보수신학은 물론 성령 운동의 산실이라고 할 수 있는 신학교의 신대원 학생들이 모여 있는 호랑이 글에서 이렇게 전한 기억이 오롯이 있다.
“야훼께서 원하는 제물은 예배하는 자의 품위를 폼 나게 해 주는 송아지, 숫양, 기름, 맏아들과 같은 외형적 괴물이 아닙니다. 그분이 원하시는 제물은 미슈파트(정의를 행하고), 헤세드(인자를 사랑하며), 짜나(겸손이 행함)와 같은 신앙의 본질을 사수하는 바로 당신이다. 지역교회에서 전도사님이라고 호칭 받고 있는 여러분, 폼잡지 말고 예수 잘 믿기 바랍니다.”
종교개혁주일에 선포한 말라기 1:9-11절 저자의 설교는 압권이다. 몇 년 전에 발표한 『최근 한국교회의 예언서 설교』라는 논문집에서 저자인 차준희 교수는 20대 한국교회에서 가장 많이 본문으로 택해진 예언서가 이사야서임을 밝혔다.(차준희, 『최근 한국교회의 예언서 설교』, 대한기독교서회, 31-36). 이사야 본문 설교가 대세를 이루고 있는 한국 대형 교회의 강단 현상 안에서 차 교수의 논문 안에 내가 찾았던 것은 말라기를 본문으로 해석한 교회가 있었는가에 대한 성찰이었다. 대단히 유감스럽게 한국의 대표적인 부흥사인 전주 바울교회가 유일한 교회였는데, 설교본문은 말라기 3:10-12절이었음을 보고하고 있다.(125) 얼마나 소 예언서가 설교자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되고 있는지를 보여 주는 단면이다. 더불어 재론하지만 한국교회의 대표적 부흥사가 담임하는 교회에서 전해진 말라기 3:10-12절 설교가 어떤 의미에서 설교되었을지는 필자는 나름 추론할 수 있을 것 같다. 대표적인 십일조에 관한 텍스트이기에 말이다. 말라기서가 주는 메시지 중에 가장 중요한 핵심 가치를 김 목사는 이렇게 역설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까닭은 남들과 구별되기 위해서도 아니고, 구원에 대한 배타적 특권을 누리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사람다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힘을 의지하여 우리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욕망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다른 이들과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마음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몸을 가진 사람은 누구나 자기를 세상의 중심에 놓으려는 구심력의 지배를 받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우리를 타자들의 세계와 하나님의 마음을 향해 나아가도록 이끌어주는 원심력입니다. 구심력이 중심이라면 원심력은 은총입니다.” (500-501)
아멘, 아멘 했다. 말라기 시대에 왜곡되어도 한참 왜곡되어 있었던 지도계층들(예언자, 정지지도자 등등)의 표피적, 종교적, 형식적 유대 신앙에 대해 사정없이 내리친 죽비다. 하지만 이게 어디 주전 5세기 유다만의 일탈이자 왜곡이랴. 오늘 한국교회가 경청해야 울림이기도 하다. 지금은 비상시국이다. 검찰공화국의 나락으로 빠져 들어간 나라는 말 할 것도 없고, 펜데믹 이후, 궐석신자들의 창궐을 비롯하여 편리주의와 안일주의가 아무렇지 않은 것으로 인식되어 있는 한국교회는 지금 비상이다. 그러기에 목회자들의 태도와 자세는 더 더욱 신학적으로 올바른 방향성의 키를 놓쳐서는 안 되는 21세기 말라기 시대다. 사정이 이런데 류호준 박사의 일갈은 대단히 아프다.
“본연의 임무에서 일탈한 목회자들, 종로 5가를 배회하며 뷔페 식사에 영혼을 판 정치꾼 목사들, 삼삼오오 모여 먹을거리와 볼거리에 탁월한 지각을 갖고 있는 목회자들, 진지하게 설교 준비를 하는 대신 인터넷 서핑의 신공력을 가지고 표절에 능란함을 보여주는 목사, 성서 문자주의의 근본주의적 신앙으로 독선적 설교를 자행하는 설교자들, 교세와 교단을 발판 삼아 개인의 명예와 영리영달을 추구하는 어리석은 지도자들이 소위 하나님의 도성을 알려진 예루살렘과 우리 교회와 교단 안에 널려 있다는 것입니다.” (류호준, 『교회에게 하고픈 말』,두란노, pp,117-118)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어야 할 때다. 김 목사는 마태복음 8장을 기초로 하여 종의 질병을 고침 받은 백부장의 믿음을 전개한다. 백부장에게 있었던 믿음을 소개하던 저자는 다음과 같은 믿음의 정의를 펼친다.
“믿음은 51%의 가능성을 신뢰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눈에는 가능성이 없어 보여도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믿음은 한가한 확률놀이가 아닙니다. 마음에 절실함이 없다면 믿음도 없습니다.” (524)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통상의 믿음 이야기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저자가 이렇게 밝힌 뒤에 시사(示唆) 한 무위당 장일순 선생의 내레이션은 믿음의 큰 그림을 볼 수 있게 해 주기에 큰 감동으로 다가온다. 군고구마 장수가 포장마차에 쓴 촌스럽기 그지없는 ‘군고구마’ 글자를 보면서 “저게 진짜야!”, “저 글씨에 담겨 있는 생명력이 있는 글씨가 진짜지!” 라고 외치는 일성에서 진짜 믿음이 무엇인지를 토로하고 있는 저자의 설교는 살아 있다. 그래서 저자가 밝힌 이 문장은 광휘의 글이다.
“하나님은 신학자들의 정교한 이론을 통해 이해할 수 있는 분이 아니라, 정직하고 절실한 이들의 마음에 다가오시는 분이십니다.” (525)
하인의 질병을 고친 백부장의 마음이 이러했음을 주지시키고, 이것이 바로 진실한 믿음임을 개진한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글이 또 길어졌다. 함께 공유하고 싶은 메시지가 지천이지만 독자들이 저자의 글을 직접 접해보기를 소망해 보며 하나의 설교 텍스트를 다루고 두 번 째 이야기를 마치려고 한다. 로마서는 두 단락으로 나누어진다. 1-11장은 교리요 12-16장은 교리에 따른 삶이다. 그러기에 12장의 서언은 매우 중요하다. 필자의 설교 파일을 열어보니 로마서 강해를 2009년에 74개의 꼭지로 사역을 마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설교 파일 마지막에 이렇게 사족을 담아두었다. “하나님, 지렁이 같은 종이 로마서를 마치다니요. 그저 은혜요 은혜입니다. 마친 설교 원고의 삶이 이율배반이 되지 않도록 치열하게 살게 하옵소서. 2009년 9월 19일 예비일에”
무려 14년이 흘렀다. 설교 원고를 훑어보니 엉망진창이다. 이걸 설교라고 교우들에게 전했으니 하는 마음이 드니 부끄럽기 그지없었다. 12장 파일을 폈다. ‘구원 그 다음은?’이라는 제목으로 6주 동안 말씀을 전했다. 6주 동안의 설교 動線은 ‘말이 아닌 삶’에 구별됨에 있었다. 저자는 필자가 치열하게 6주 동안 전했던 메시지의 테제를 단 한 줄로 정의했다.
“자본주의가 작동하는 원리는 간단합니다. 남들과 구별되는 존재가 되라고 말합니다.”(596)
그렇다. 희소성의 주인공이 되라고 강력하게 부추긴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이 살아가는 세상은 남들과 구별되는 희소성을 차지하여 주인공이 되는 세상이 아니다. 도리어 ‘함께 함’의 세상이다. 함께 경탄하는 세상이다. 세상의 인력에 속절없이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생명과 평화의 부름에 응답하며 살아가는 세상이라고 저자는 역설한다. 이게 삶이다. 이게 그리스도인들에게 명령하신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는 진정한 뜻이다. 참과 거짓, 빛과 어둠이 뒤섞인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갖고 살아가야 하는 영적 분별력이다.
시인 박노해는 자신의 시집에서 이렇게 일갈했다.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 힘을 사랑하는 자와 사랑의 힘을 가진 자”(박노해, 『걷는 독서』, 느린 걸음, 94.)
김 목사의 글말들을 만나면서 다시 한 번 시인의 충고를 심비에 새기기로 했다. 이 땅에서 목사라는 직을 마치고 주님 앞에 설 때, 다른 건 몰라도 이렇게 꼭 보고하고 싶다.
“주님, 사랑의 힘을 갖고 살아보려고 치열했습니다.” 이 보고를 드리려면 적어도 저자와 함께 놀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 같습니다.
“두 번 없는 삶, 미소를 짓고, 어깨동무하며 서로에게 스며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기쁨과 감사, 찬양과 불굴의 용기로 시간을 채워 가십시오. 감사하고 기뻐하는 마음이야말로 우리 마음이 우울에 침륜되지 않도록 하는 치료제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며 그것을 가시화하며 사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역사의 꿈을 이루어 가시려 하십시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감싸고 있으니 주저하지 말고 힘차게 걸어가십시다.” (617)
김기석 목사가 나와 같은 하늘에서 한국교회를 위해 뿜어내고 있는 숨비 소리를 나 또한 듣고 있어 행복하다. 이 행복한 마음으로 갖고 두 번째 이야기를 마감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