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함께

제목잘 산다는 것2024-06-11 10:19
작성자 Level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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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지은이 유진 피터슨
ㆍ출판사 복있는 사람
ㆍ작성일 2023-02-16 12:30:54

 

유진 피터슨의 “잘 산다는 것”(복 있는 사람 간, 2022년)을 읽고


목회자가 칼럼을 쓴다는 것을 평범한 일처럼 여기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목회의 언저리에 남길 만한 여백을 찾아야 하는 것도 숙제고, 또 하나 글 쓰는 연습이 되어 있지 않으면 감당하기가 쉽지 않기에 그렇다. 개 교회마다 목회의 일기를 쓰고 있는 목회가 있다면 한 가디는 분명하다.
그만큼 그는 목회자로 성실하게 살고 있다는 점이다. 
젊은 시절, 원주 단강이라는 작은 촌에서 전해져 오는 소박한 목회 단상을 접했다. 한희철 목사의 목회 칼럼이라고 할 수 있는 글을 접하면서 나 또한 도전을 받아 시작한 것이 어언 30년이 넘게 이어온 ‘목양터의 이야기 마당’이다. 지금 파일 안에 담겨 있는 글 중에 젊은 시절, 쓴 글을 보면 촌티 나고 어줍기 그지없는 글의 흔적들이 지천이지만, 그럼에도 그 안에는 사람 사는 이야기가 있고, 바울이 고백했던 눈물과 훈계와 은혜의 말씀이 담겨 있기에 다시 읽노라면 그 어떤 글들보다도 애정이 간다. 이런 이유로 인해 목양 이야기를 쓰는 것을 포기하지 않고 30년이 넘게 이어온 듯하다.
본서는 유진 피터슨이 남긴 유고 글이라는 제하가 적절할 것 같다. 그의 목양터 이야기 마당이 ‘잘 산다는 것’에 담겨 있다. 그가 목양 현장에서 20년이 넘게 교우들에게 전한 편지, 설교 원고 중의 단상들을 묶어 ‘복 있는 사람’에서 작년 말 출간한 본서를 읽다가 제일 눈에 두드러지게 보인 것은 그가 얼마나 말씀의 사람이었는가가 보였다. 책을 열면서 그는 이렇게 책머리를 뗐다.

“말씀이 첫 번째였습니다. 말씀이 다른 것보다 앞섰습니다. 우리가 모태에서 잉태되고 형태를 갖추기 전에,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그 어떤 일도 벌어지기 전에 말씀이 계셨습니다.”(p,19)

출발이 귀했다. 필자가 유진 피터슨의 글에 천착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다. 여기에서 출발한 유진은 적어도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이 대 명제에서 시작한 그의 목회신학적인 영성은 목사들을 위한 목사라는 그의 격에 맞게 본서 전체에 흐른다.

“때로 그 말씀은 우리 마음을 너무나 아프게 합니다. 그분의 말씀은 망치 같아서 우리가 좋아하는 잘못된 생각을 박살내기도 하고, 없으면 도저히 살 수 없을 것 같은 소중한 우상을 허물기도 합니다. 이런 일은 우리 영혼의 심장에 병이 생겨 하나님께 힘차게 반응하지 못하게 되는 것 같은 때 일어납니다. 우리 내면의 근육이 탄력을 잃어 질기고 거칠어지는 때 말입니다. 예수님은 가슴 아픈 말씀으로 이 상태를 치료하십니다. 내면의 딱딱함을 깨뜨리고 우리 영혼이 다시 유연하고 편안하게 반응할 수 있게 해 주십시다. 그분의 말씀은 우리를 사랑하는 자리로 불러내십니다.”(p,39.)

상식적으로 접근할 때, 이해가 되지 않는 유진의 갈파를 먹먹하게 동의하는 부분이 바로 이 대목이었다,
“가슴 아픈 말씀으로 이 상태를 치료하신다.”
따뜻하고 온유한 말씀으로 치료하는 것이 마땅할 텐데, 가슴 아픈 말씀으로 치료한다니! 그런데 참 이상하다. 그의 말이 너무 적확해서. 나 또한 목양의 현장에서 너무 많이 경험하는 일이다. 한희철 목사가 말한 대로 육체의 나약함으로 인해 걷기조차 힘든 지체들을 안을 때 조심해서 안는다. 상처가 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습관적인 매너리즘을 즐기는 자들이 신자 중에 즐비하다. 이들은 갑각으로 치장하고 있다. 웬만한 건드림으로 꿈쩍도 하지 않는다. 이들에게 비수는 가슴 아픈 말이다. 심장을 타격하지 않는 말은 의미가 없다. 이런 이유 때문에 나는 유진의 이 토로를 이해한다.
“가슴 아픈 말씀으로 이 상태를 치료하신다.”
글을 읽다가 1,000%아멘 한 글이 있다.

“감정의 동의어로 쓰이는 믿음은 무의미합니다. 죽은 단어입니다.” (p,48.)

유진은 정말로 언어 구사의 천재적 소질을 갖고 있는 목회자임에 틀림없다.
그는 연이어 폭격한다.

“하나님에 대한 개인적 헌신을 포함하지 않는 믿음은 무의미합니다. 시시한 감정이기에 그렇습니다. 믿음은 우리 삶의 모든 것을 포함하는 행위여야 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참여하게 합니다.” (위의 인용 글과 같은 페이지)

머리만의 신앙이 온전하지 않은 신앙인 것처럼, 감정으로 도배한 신앙 역시 바른 신앙이 아니다. 필자는 내 사역의 현장에서 대단히 민감하게 경계하는 것이 있다.
감정적인 신앙생활이다.
현장 사역을 하다보면 감정이 신앙인 줄 알고 살아가는 자가 너무 많다. 지난 목양의 세월 나는 이것과 투쟁한 세월이었다고 말해도 괜찮을 정도로 이 부분에 집중했다. 오늘은 천국, 내일은 지옥을 느끼는 자들의 공통분모는 감정이 신앙이라고 착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더 심각한 것은 이것을 악용하는 목양의 태도다. 감정은 그냥 감정임에도 불구하고 감정의 폭을 이용하여 교회의 물리적인 힘을 구축하는 도구로 사용하는 자들이 너무 많다. 지정의가 균형 잡히지 않은 신앙은 신앙이 아니라 기형적 산물일 뿐이다.

“성경을 인용하는 것만으로 성경에 충실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유혹을 받고 넘어지는 이들과 광야의 삶을 함께 할 때, 예수의 십자가를 지고 갈 때,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낌없이 사랑할 때, 비로소 성경에 충실한 것입니다.” (p,62)

유트브에서 김호경 박사가 인터뷰 중에 했던 말이 가슴을 쳤다.

“설교자들이 성경을 너무 양심 없이 읽는 것 같다. 조금만 더 정직하고 솔직하게 성경을 읽어도 도저히 할 수 없는 말들을 설교자들이 마구잡이로 내뱉는다. 성경의 여백을 읽도록 했으면 좋겠다.”

성경을 양심 없이 읽는다는 것이 나는 성경에 충실하다고 자부하는 자들에게서 더 많이 보이는 일면이라고 지적한 것 같아 씁쓸했다. 그렇다. 성경 인용을 한다고 해서 그가 충성스러운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볼 수 없다. 갈릴리에서 사셨던 예수의 삶과 무관한 삶을 사는 자가 전하는 말씀과 말씀 인용은 더 위험하다. 이 점에서 유진의 훈수에 나는 고개를 숙인다.
“태초에 삶이 있었다.”
성경을 읽다가 이 테제를 오롯이 발견할 수만 있어도 나는 양심 있는 목사가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오기가 든다.

“하나님을 욕구 목록의 최상단에 둘 때, 우리는 기도의 자리로 향하게 됩니다. 동시에 거기에서 그분과 인격적으로 만나게 됩니다.” (p,78)

결국 기도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삶의 목록에 올려놓지 않은 자라는 역발상의 은혜가 더 강하게 다가오게 하는 성찰이다. 그러므로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탈락시키는 교만의 극치라고 할 수 있다. 나는 내 욕구 목록에 하나님의 자리를 몇 번째에 두고 있을까?

“종교적 군중은 가장 모으기 쉬운 무리입니다.” (p,120)

몇 번을 다시 읽으며 되뇌었다. 종교적 무리의 공통분모는 예수 그리스도와 인격적인 만남을 경험해 보지 못한 자라는 점이다. 주님과 인격적인 만남을 경험하지 못한 자 중에 교회 안에 있는 자들은 다른 이들에 비해 훨씬 더 종교적이다. 감추어야 하기에 그렇다. 어찌 보면 가장 불쌍한 자들이다.
마태복음 5:1절은 의미심장하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마태의 이 기록에서 주목할 것은 ‘오클로스’와 ‘마쎄테스’를 분명하게 나누었다는 점이다. 산에 올라가서 수훈을 말씀하시던 주께 몰려들었던 상당수 많은 인원이 무리(無理)였다. 무리는 理가 없는(無) 존재들이다. 그러기에 리(理)가 없는 이들은 당연히 理에 대한 관계를 경험해 보지 못한 자들임에 틀림없다. 理가 없으니 非에 無理에 건 자들이다. 반면 제자들이 다르다. 제자의 삶은 理를 경험한 자들이다. 그러므로 理에게 본인의 삶을 건다. 종교성은 理가 없이도 흉내 낼 수 있다. 열심도 낼 수 있다. 하지만 제자는 종교성에 목을 매지 않는다. 그들이 집중하는 것은 주군이 살아낸 삶의 理다. 이것을 전제할 때 유진의 갈파는 적절하다.   
“종교적 군중은 가장 모으기 쉬운 무리입니다.”
이제 하나만 더 나누어 보자.

“그분의 목적지는 우리입니다.” (p,197)

유진의 말이 이렇게 사람을 흥분시킬 수 있나 싶어 감사하기 그지없다. 내 목적지는 내 유익이다. 유익이 있는 목적지라면 수단을 가리지 않고 달려간다. 하지만 주님의 목적지는 바로 ‘나’란다. 더 이상,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다.

“하나님은 이 땅에 나 한 사람만 있는 것처럼 여기시고 나를 사랑하신다.”

변화산상에서 벌어진 일은 이처럼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의도와는 정 반대인 듯해서 부끄럽다.
“베드로가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마 17:4)
베드로의 토로를 나는 언제나 이렇게 해석하여 교우들에게 전한다.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의 궁극적인 만족은 “베드로를 위하여”였다.
하지만 베드로의 이런 저의를 알았던 하늘의 소리는 베드로의 생각과는 전혀 달랐다.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지라 제자들이 듣고 엎드려 심히 두려워하니 예수께서 나아와 그들에게 손을 대시며 이르시되 일어나라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니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마 17:5-8)
하늘의 목적은 오직 주 예수였다. 아주 가끔 주객전도의 실상을 본다. 예수가 수단되는 어처구니없음이다. 예수는 내가 목적인데, 나는 예수가 수단이다. 이런 결례와 불경함이 또 어디에 있나. 언제나 오시는 하나님, 어디서나 오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이 바로 나에게 오신다. 이것을 알았는지 청파교회 교회 표어는 바뀌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언제나 어디서나 그리스도인”
리뷰를 마치고자 한다. 글을 쓴다는 것은 목사에게 주어진 은혜다. 글을 쓴다는 것은 생각한다는 것이고, 또 무릎을 꿇는다는 것이며, 팔이 안으로 굽은 죗성을 밖으로 뻗으려는 최소의 시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글을 쓰는 것은 목사의 운명이요, 숙명이다. 너무 감사한 것은 글 쓰는 것에 대한 빈약함을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곳곳에, 때때에 배울 수 있는 글 쓰는 이와 배울만한 가치가 있는 글 씀의 기록들을 남겨두셨다는 점이다. 유진은 나에게 그런 존재 중 한명이다. 나는 성경을 읽다가 아주 가끔 경험하는 건조함이 있으면 ‘메시지’를 편다. 독서의 빈곤함을 느끼면 서고에 꽂혀 있는 색 바란 ‘이 책을 먹으라’는 다시 꺼내 읽는다. 영성의 모자람이 느껴지면 ‘거룩한 그루터기’를 손에 쥔다. 하나님과 더 진솔히 만나고 싶을 때는 어김없이 ‘묵상하는 목회자’를 다시 편다. 이제 유진이 이 땅에 나와 같이 거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가 남긴 유고집을 묵상하다가 이런 소회에 젖어보았다. 

“잘 산다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

뉴라이프펠로우십 교회를 섬기는 리치 빌로다스의 추천사에 했던 말대로 이렇게 사는 것이 정말로 잘 사는 것이라는 동의를 한다.

“잘 산다는 것은 우리의 내면을 관리하는 것이다.” (p,10)

목사로 살면서 목사의 품위라고는 1도 보이지 않는 나를 위해 유진 피터슨은 유고 글을 남긴 것 같다. 읽으며 다시 심비에 새겼다. 

잘 살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