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지은이 | 박노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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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출판사 | 느린 걸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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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일 | 2023-03-06 12:24: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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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해의 “걷는 독서”(느린 걸음, 2021년 간)를 읽고 아내와 함께 양평 여행을 했다. 양평 맛 집을 검색하다가 ‘옥이네 북 카페’를 발견하고 방문했다. 은퇴하면 이런 가게를 하나 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너무 고즈넉하고 따뜻한 북 카페였다. 진열되어 있는 책들을 보다가 몇 권을 휴대폰에 담아 구입했다. 그 중에 하나, 박노해 시인의 ‘걷는 여행’이었다. 수많은 이데올로기라는 함정에 빠져 있는 자들은 저자를 빨갱이라고 낙점하지만, 난 저자의 글을 너무 좋아한다. 이렇게 말하면 또 많은 사람이 나에게 이렇게 말할 게 분명하다.“그러니까 너도 빨갱이다.” 그냥 웃자. 예수께서 가야바의 뜰로 끌려가셨을 때, 종교인들의 초기 질문에 아무런 답변을 하지 않자, 가야바가 예수께 이렇게 힐문한 기록이 마가복음에 있다. “대제사장이 가운데 일어서서 예수에게 물어 이르되 너는 아무 대답도 없느냐 이 사람들이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냐 하되 침묵하고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거늘 대제사장이 다시 물어 이르되 네가 찬송 받을 이의 아들 그리스도냐 (막 14:60-61) 난 이 구절을 개인적으로 참 좋아한다. 왜 주께서 침묵하셨을까? 단언한다. 말 같지 않아서! 수준이 안 되는 질문에는 대꾸하지 않는 게 최상이다. 故 신영복 선생이 남긴 글말에 대한 감동은 차치하고 그를 정치적 편향으로 몰고 가는 자들이 오늘 정치권력을 잡은 자들이라는 것이 암울한 뿐이다. 필자는 저자의 글들을 많이 접했다. 그가 쓴 글만 해도 적지 않다. 더불어 그의 책들에 대한 북 리뷰도 남겼다. 『사람만이 희망이다.』에서 그가 겪어야했던 인고의 고통을 고갱이로 체감했고,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에서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배웠고, 『다른 길』이라는 포토 에세이에서 사람이 같이 살아가야 하는 공생의 아름다움이 무엇인지를 배웠고, 『여기에는 아무도 없는 것만 같아요』에서 편 가르기와 승자독식의 편향이 가져다주는 재앙이 무엇인지를 깊은 체감했다. 그리고 실로 오랜만에 저자의 글을 다시 접하게 된 『걷는 독서』는 목사로 살아가는 나에게 제 2의 잠언처럼 다가왔다. 그가 남기고 있는 촌철살인들을 밑줄 그으며 또 새기고 또 새기며 읽었다. 몇 가지만 공유해 보자.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 힘을 사랑하는 자와 사랑의 힘을 가진 자”(p,94) 권력 쟁취에 묶여 있는 자들에게 내리는 죽비다. 마약에 중독된 유명 연예인이 명예 살인 당했다. 사랑이 배제된 권력에 중독된 자들은 버젓이 활개 치며 난장을 벌이고 있는 데 그들은 건재하다. 이런 이율배반이 또 어디에 있나! “정치의 본질은 약한 자 힘주고, 강한 자 바르게” (p,140) 나는 저자의 이 문장을 찬송가를 통해 수없이 고백했다. 그럼에도 작금, 이 땅은 그 반대로 가고 있다. 이렇게. “강한 자 힘주고, 약한 자 죽이고” “두려운 것은 답을 틀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물음이 사라져버리는 것이다.”(p,168) 질문하지 않는 그룹이 있다. 공동묘지에 누워 있는 시체들이다. 아니, 더 유감스러운 것은 절대 권력이 영원할 것이라는 광기에 사로잡힌 자들은 질문 자체를 허용하지 않는다. 이런 이유로 이 땅이 아우슈비츠로 전락되고 있다. 아우슈비츠의 금언은 ‘질문하지 말라’였다고 하지 않나! 또 아로새겨야 할 금언이다. “정직한 절망이 희망의 시작이다.” (p,202) 이 글을 읽다가 너무 고마워서 울컥했다. 목사로 살고 있는 나는 이런 철학적 사고를 갖고 사는 저자에게 너무 부끄럽고 부끄러워 머리를 숙였다. 얼마나 아름다운 고백인가? 정직한 절망이 희망의 시작이라니! “인생에 있어서 최대의 비극은 삶의 수단에 집착하느라 삶의 목적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p,336) 목사로 산지 31년째다. 나는 목사로 살아가야 목적에 얼마나 그 유격이 멀어졌는가를 마음을 다잡이 해본다. “오늘날의 대죄가 있다. 자유로운 탐욕, 정의로운 교만, 지혜로운 위선” (p,376) 형용사의 유혹이 크게 보인다. 그렇지 않다. 명사에 집중해야 하기에. 진짜 버려야 할 내용은 형용사가 아니라 명사다. “방향이 잘못 잡혀 있다면 빠르게 달려갈수록 빠르게 이탈한다.”(p,414) 많은 현자들이 동의한다. “속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방향이 중요하다.”고. 빠른 이탈과 탈선을 부추기는 ‘빠른’은 재앙이다. “나만 천국에 가라 하면 나는 차라리 지옥으로 갈 것입니다.” (p,536) 아주 오래 전에 충격의 충격을 받으며 읽었던 이 글을 오롯이 기억한다. “어느 날, 사람들은 라비아가 한 손에는 횃불을 들고 다른 한손에는 물통을 들고 달려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이상스런 행동을 하는 의미가 무엇인지, 어디로 가는 건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라비아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낙원에 불을 지르고, 지옥에 불을 끼얹으려고 가는 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비전을 가로 막는 두 가지 너울을 없애버리려고요.” (Essential Sufism 에서 종교인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엄청난 성찰이다. 교리가 아닌 삶이 이래야 하는 것이 종교인, 특히 기독교인의 참 모습이지 않을까 싶다. “고독은 견디는 것이 아니라 추구하는 것이다”(p,590) 사순절을 보내고 있다. 자발적 고독의 추구라는 그리스도인들의 목표를 싫어하는 시대. 불교에는 하안거, 동안거가 있고, 가톨릭에는 피정이 있는데 개신교가 무엇이 있지? 의미가 없기에 너무 분주하고, 소란스럽고, 화들짝한 것은 아닐는지 개신교만의 영성이 절실하다. “흐름을 따라가기보다는 흐름이 되어가는 사람”(p,620) 박노해 시인이 이 정도였나 싶을 정도의 감동이다. 시인의 노래와 글을 참 많이 접한 ‘나’인데 저자의 삶이 연륜이 쌓여가면서 더 푸르고 시린 깊이가 그의 내면 안에 담겨져 있는 것 같아 못내 부럽다. 나는 목사인데 저자의 영성(?)보다 못한 것은 아닐까 토로하다보니 정신이 번쩍 든다. “우리 모두는 내가 사는 존재가 아니라 살려지고 있는 존재다.” (p,640) 얼핏 보면 말장난처럼 여겨지는 문장이지만 그 안에 엄청난 성찰이 엿 보인다. 기실, 내가 존재하는 이유는 내가 잘나서가 아니다. 나를 위해 헌신해 준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나를 살려주었기에 어줍지만 지금 내가 존재하는 것인데 때론 무례하기 그지없이 감사를 모르고 지나친다. 예의 없는 자 되지 말자. “자신의 심장을 잃지 않고는 사랑하는 이의 심장을 얻을 수는 없다.” (p, 732) 목회가 이론으로 되지 않는 이유다. 지식으로 되지 않는 당위다. 목회를 하면서 참 많이 울었다. 그러기에 저자의 이 문장이 새겨지게 들린다. 바울이 고백했던 한 마디가 목사로 살아온 나에게 또 다른 절절함의 동병상련으로 다가온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빌 1:8) “나의 글이 배부른 자의 간식이 아닌 가난한 자의 양식이기를” (p,754) 작가로 선지 이제 6년이 되어간다. 졸저들을 만들어낸 아마추어 작가이지만 이 정신은 첫 출간을 할 때나 지금이나, 그리고 앞으로도 변하지 않는 내 양심선언이기도 하다. 전업 작가인 저자가 이 마음으로 달려와 준 것이 적지 않은 위로가 된다. “나의 기도는 반드시 이루어져 왔다. 기도 중에 헛된 바람은 다 사라져 버렸기에” (p,804) 가톨릭 신자인 저자의 이 고백은 절절하다. 기도가 위대한 이유는 응답 때문이 아니다. 기도의 과정은 세상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행위 중에 가장 아름답고 거룩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결국 나를 비우지 않고 드린 기도는 기도가 아니라 주문이다. 나는 얼마나 진심으로 우러나오는 기도자로 살았는지 되새긴다. “사랑하다가 죽는 것은 두려운 일이지만 사랑 없이 사는 것은 더 두려운 일이다.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p,860.) 저자는 아가의 노래로 본서를 마감한다. 그렇다. 사랑하다가 죽자. 사랑하다가 소풍 끝내자. 이 땅을 딛고 살다가 죽은 자중에서 가장 비참한 자는 사랑을 모르고 죽은 자다. 이런 의미에서 나의 주군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최고로 행복한 삶을 살다 가신 분이다.
북-리뷰를 남기려면 공부를 참 많이 해야 한다. 결국 서평 쓰기는 문학적인 작업의 절정인 셈이다. 박노해 시인의 글을 마음에 담고 북-리뷰를 쓰겠다고 마음먹으면서 다짐한 것이 있었다. 학문적으로 리뷰를 남기지 말자는 마음이었다. 왠지 그렇게 하는 것은 도리어 저자를 욕보이는 것 같아서 말이다. 해서 필자 또한 저자와 보폭을 맞추어 걸었다, 내내 걷기 독서를 해서 너무 행복했다. 저자는 적어도 빨갱이가 아니라, 글 선생님이다. 저자를 매도하지 말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