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지은이 | 한희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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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출판사 | 꽃자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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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일 | 2022-02-12 16:11: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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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 목사의 “예레미야와 함께 울다” (꽃자리, 2018년)를 읽고 예레미야 공부는 목회자들에게 적지 않은 부담이다. 오늘 목사로 살아가는 일체의 사람들은 예레미야 살아가야 하는데 그렇게 살기가 싫기 때문이다. 과연 누가 듣지도 않는 예언의 말씀을 전하고 싶겠는가! 누가 평생 눈물을 흘리며 살고 싶겠는가! 누가 과연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기는 고난의 길을 걷고 싶겠는가! 그렇다. 이렇게 말하면 너무 큰 비약일까! “나는 예레미야 안 되기라는 사명을 띠고 이 땅의 목사가 되었다.” 예레미야가 7장, 26장에서 행한 성전 설교는 죽기를 각오한 설교다. 요즈음으로 말하면 좌빨 목사로 매도되기 십상인 무서운 설교다. 37장에서 시드기야에게 一說한 예레미야의 선언은 사람이 아닌 듯싶을 정도로 비장하다. 아무리 새기고 또 새기며 둘러보아도 예레미야를 닮는다는 것은 미련하기 그지없는 실패한 목사들의 전형과도 너무 닮았다. 근데 말이다. 필자는 이 책을 읽으면서 많이 울었다. 어느 때는 흑흑대며 울었고, 또 어느 때는 흘러내리는 눈물 때문에 고개를 천장 위로 여러 차례 쳐들었다. 더불어 끊임없이 내 자아와 싸웠다. 닮아서는 안 되는 예레미야인데 왜 이렇게 닮고 싶지!의 두 마음 때문에. 언젠가 하나님께 이런 기도를 드린 적이 있었다. “하나님, 제 아들은 제가 겪은 목회의 고난을 답습하지 않도록 도와주십시오.” 기도를 드리고 났는데 곧바로 스멀대며 올라온 하나님의 음성이 선명했다. “너, 내가 평생을 응원한 목사 맞니!” 미련하기 짝이 없고 융통성이라고는 1도 없어 평생 눈물로 지새워야 했던 예레미야를 나는 왜 닮고 싶었던 걸까?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렘 20:9) ‘예레미야 다시 보기’라는 책을 집필한 친구는 그의 신학적 개관으로 20:9절을 멋들어지게 표현했다. 예레미야의 흔들림의 영성이라고. 때론 예언자도 이렇게 흔들린다고. 그러나 이 흔들림 속에 예언자는 더 깊은 주군과의 관계를 형성하는 영적 반전의 기회로 삼았다고. 어떻게 구약학자의 이 말에 대해 반론을 할 수 있겠는가! 간이 배 밖으로 나오지 않고서야 용기를 낼 수 없다. 하지만 신학자가 아닌 목사로 평생을 살아온 필자는 예언자 예레미야가 이렇게 처절한 씨름을 하게 된 ‘sitz im leben’ 을 무대로 올리면 예레미야는 흔들린 것이 아니라 필사적인 생존의 몸부림이었다고 해석하고 싶다. 이유는 바로 직전절인 20:7-8절 때문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하나이다 내가 말할 때마다 외치며 파멸과 멸망을 선포하므로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거리가 됨이니이다” 김기석 목사가 쓴 ‘끙끙대는 하나님’에 보면 이 구절에 대한 흡족한 주석이 등장한다. “‘권유하셨다’와 ‘이기셨다’는 표현은 지나칠 정도의 순화시킨 번역이다. ‘권유하셨다’고 번역한 ‘파타하’는 성경에서 여자에게 결혼 전에 성행위를 승낙하도록 설득, 유도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기셨다’고 번역된 하자크‘는 여자에게 혼외정사를 강요하는 것으로서, 그녀의 의사에 반하여 이루어지는 것을 뜻할 때 사용된다.”(김기석, “끙끙대는 하나님”, 꽃자리,p,224.) 확인할 수는 없지만 김 목사가 이렇게 해석한 자료가 아마도 차준희 교수의 ’예레미야 다시보기‘ 일 가능성이 있다. 차 교수가 해석한 것이 이렇기에 말이다. “파타하‘는 ’유혹‘ 또는 ’후리기‘(남의 것을 갑자기 빼앗거나 슬쩍 가지다.)를 뜻하고, ’하자크‘는 ’강간‘을 뜻한다. 이 두 단어가 나란히 사용되고 있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관계가 지니고 있는 복잡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즉 그것은 ’유혹의 달콤함‘과 ’강간의 난폭함‘을 나타낸다.”(차준희, “예레미야 다시보기”, 프리칭 아카데미,p,219.) 필자가 지금 말하고 싶은 점은 예레미야 닮기에 대한 접근은 그리 녹록한 일이 아님을 개진하고 싶은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레미야는 이 시대를 정직하게 살아가는 목사들이 반드시 닮아야 하는 목회자의 모델이다. 이것을 한희철 목사가 여지없이 본서를 통해 강타한다.
한 목사의 예레미야 읽기는 예레미야 예언서의 본문에 대한 신학 이론의 글이 아니다. 현장 목회자로 서 있는 저자가 얼마나 예레미야 예언서를 아름답지만 치열하게 감동적인 글로 채색시켜 주었는지를 보여주는 시금석이다. 책에 담겨 있는 그의 글 하나하나가 보물같이 엮어져 있다. 지면상 필자에게 적지 않은 여운을 남긴 두 개의 테제에 대해 나누어 본다.
“말씀을 들으며 찢어야 했던 것은 말씀을 듣는 이의 옷과 마음이었다. 그것도 주님의 말씀을 분명히 기록하기 위해 사용했던 칼로 말씀을 난도질했다. 말씀을 들으며 불태워야 할 것은 말씀 듣는 이의 죄악이었다. 그런데 여호야김은 말씀을 불태웠다.” (p,248)
예레미야가 불러주었던 신탁을 서기관이었던 바룩이 적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성전에 모인 자들에게 들려주자 불온하게 여긴 吉 예언자 미가야가 왕궁에 고발한다. 가뜩이나 주변 정세로 인해 민감했던 여호야김이 여후디를 바룩에게 보내 성전에서 읽어준 두루마리를 가져오게 하고 다시 자기 앞에서 읽게 한다. 두루마리에 적힌 말씀을 들었던 여호야김은 그 두루마리를 소도(小刀)로 잘라 화롯불에 태워버린다. 소도는 서기관들이 글을 쓸 때 쓰는 갈대 촉을 날카롭게 하거나 파피루스 판을 자를 때 쓰는 작은 칼을 의미한다. 왜 이런 방자한 일을 여호야김이 자행했나! 간단하다. 하나님의 말씀이 본인에게는 凶 예언이었기 때문이다. 목회를 한지 30년이 훌쩍 넘었다. 현장은 말 그대로 전쟁터이고, 정글이다. 이 정글 한 복판에서 목사라는 신분으로 살아가야 하는 필자가 뼈저리게 느끼는 아픔 중에 하나는 말씀 상실이다. 설상가상으로 펜데믹이 덮쳤다. 이 전무했던 재앙을 만나면서 목회 현장은 더 최악의 상황으로 악화됐다. 그 악화의 한 복판에서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은 말씀 상실을 넘는 말씀무시다. 사정이 이런 데 교회는 아무런 손을 쓰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다. 교회 안에 있는 무신론자들이 휘두르고 있는 소도에 의해 말씀이 무참히 잘려나가고 있는데도 교회는 고개를 숙이고 있다. 교회 안에 존재하는 무시무시한 여호야김들이 난장을 벌이고 있어도 말 한 마디 못하고 타협하고 있다. 싸울 신학적 여력과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싸우면 예fp미야 꼴이 나기 십상이기에 그렇다.
“대선 레이스가 한참입니다. 여야 후보로 나온 인사들을 보면 목사로서 당해야 하는 수치스러움이 극에 달해 분노를 넘어 울고 싶은 심정입니다. 여당 후보는 기독교신자라는 이름을 갖고 살지만 다닌다는 교회에 7년 동안이나 단 한 번도 출석하지 않아 제적 신자가 된 모양새고 어머니는 권사, 그 부인은 교회에서 오랜 시간 동안 반주자로 봉사했음을 자랑했지만 실상 그 당사자는 공인의 신분을 망각한 채로 공사를 구분하지 못하는 일탈들을 서슴지 않아 여론의 뭇매를 맞고 있고, 야당의 후보라는 인사는 집에 성경이 너무 많아 몇 권이 있는 모를 정도라고 자랑질하고 천주교 신자 때는 암브로시우스라는 영세 명까지 받았다고 떠벌이고 있으며, 결혼은 스님이 중매해서 했고, 후보시절이나 검찰의 총수로 있을 때 정책적인 자문은 무속적인 성향이 농후한 현대판 머털 도사가 하고 있습니다. 이 정도로 갈 때까지 다 간 세속적 랜덤 인생을 살면서도 신자 티를 내고 있는 저들의 행태를 보면서 목사로서 분노를 뛰어넘어 극도의 수치스러움을 숨길 수가 없습니다. 도대체 얼마나 교회를 우습게 여겼으면 하나님과의 전인격적인 관계란 1도 없는 자들이 신자 행세를 하고 있는가 하면 이런 자들이 대통령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까지 하는 또 다른 부류들의 기독교적인 지도자들이 즐비하니 참담함을 금할 이 없습니다.” (제천세인교회 2월 13일 주일 설교 원고 중에서)
교회 안에 여호야김들이 너무 많다. 그런 자들과 싸우려고 하지 않는 것이 교회의 아픔이다. 저자의 일갈에 마음이 아린다. “두렵다. 주님의 말씀 앞에서 가질 수 있는 인간의 거만함이 어디까지인가! 왕의 소도에 베인 듯 섬뜩하게 다가온다.”(p,248)
저자도 울었고, 필자도 울었던 한 구절 더. 예레미야 38:11-13절을 나누며 울어보자. “에벳멜렉이 사람들을 데리고 왕궁 곳간 밑 방에 들어가서 거기에서 헝겊과 낡은 옷을 가져다가 그것을 구덩이에 있는 예레미야에게 밧줄로 내리며 구스인 에벳멜렉이 예레미야에게 이르되 당신은 이 헝겊과 낡은 옷을 당신의 겨드랑이에 대고 줄을 그 아래에 대시오 예레미야가 그대로 하매 그들이 줄로 예레미야를 구덩이에서 끌어낸지라 예레미야가 시위대 뜰에 머무니라” 예레미야가 매국노라는 누명을 쓰고 말기야의 뜰에 있는 물구덩이에 던져졌다. 헌데 그 구덩이에는 마침 물이 없었다고 예언서 기자는 전한다. 저자는 예언자가 물웅덩이에 빠진 시기를 6월이라 7월경으로 산정한다. 대체적으로 이 웅덩이는 갈수기라고 할 수 있는 5-10월 사이에는 물이 차 있어야 하는 것이 마땅한데 물이 없었다고 보고하는 대목에서 저자는 울었다고 한다. 왜? 예레미야를 보호하시려는 하나님의 개입하심으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이 보고도 은혜지만 압권은 소개한 11-13절이다. 깊은 웅덩이에 빠진 예레미야는 홀로 그곳에서 빠져 나올 수 있는 방법이 전무했다. 고립무원이었던 예레미야에게 왕궁 내시였던 에벳멜렉이 분연히 도움의 도구로 일어난다. 예레미야에게 정신적인 폭력을 가했던 시드기야의 작품으로 웅덩이에 빠져 있었던 예언자를 구원한 도구로 왕의 궁정 내시가 역사의 무대에 섰다는 것은 하나님의 일하심이라는 말 외에 다른 해석이 불가능하다. 에벳멜렉은 시드기야와 목을 건 담판을 벌여 극적으로 예언자 예레미야를 구원해 주는 도움자로 사역하게 된다. 그 사역의 내용이 눈물겹다. 예레미야 38:12절을 저자는 표준 새 번역을 인용하여 소개했다. “에티오피아 사람 에벳멜렉이 예레미야에게 말하였다. "해어지고 찢어진 옷 조각들을 양쪽 겨드랑이 밑에 대고, 밧줄에 매달리십시오." 예레미야가 그대로 하였다.” 이 구절에 대한 저자의 해제를 보자. “웅덩이에 빠져 있었던 예레미야는 남아 있는 힘이 없었을 것이다. 밧줄만 잡고 올라오다가 놓칠 것이 자명했다. 낡은 옷을 허리에 두르게 하고, 그것을 밧줄로 묶는다면 따로 힘을 쓰지 않아도 도움이 될 것이다. 헝겊과 낡은 옷, 헤어지고 찢어진 옷 조각, 바로 그것이 웅덩이에 빠진 예레미야에게 전해진 하나님의 손길이었다. 하나님의 손길로 확인하는 ‘헝겊과 낡은 옷’, ‘해어지고 찢어진 옷 조각들’이라는 말 앞에 눈물을 그치기 어려웠다.” (p,271) 작년 연말, 저자의 글을 읽다가 필자도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는 순간은 예레미야도, 저자도, 필자도 공히 같았기 때문이다. 오늘 이 시대에 필요한 하나님의 사람이 누굴까? 아마도 하나님이 나를 돕고 계신다는 것을 절절하게 느끼며 고백하는 자가 아닐까 싶다.
감리교단에 속한 목사들의 지성적 영성이 부럽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김기석, 한희철과 같은 목사를 품고 있는 저 교단이 부럽다. 감리교단과 같은 웨슬리 신학을 기초로 하고 있는 성결교단도 이런 목회자가 나오면 안 될까. 작년에 쓰려 했던 숙제를 마친 것 같아 감사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