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지은이 | 한희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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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출판사 | 겨자나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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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일 | 2021-10-28 14:25: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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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고운 눈 내려 고운 땅 되다’(겨자나무 간, 2020)를 읽고 洛書(1)
“형도 울고 싶을 때가 있어?/응/언제?/아무 때나/형은 언제나 웃었잖아?/응/근데 언제 울고 싶단 말야?/세 번 웃기 위해 두 번은 울었어.”(한희철, “내가 선 이곳은”,소망사,p,11.)
“세 번 웃기 위해 두 번은 울었어.” 이 대목에서 나도 울었다. 이 글이 나올 당시 원주 단강이라는 시골에서 목회하던 한희철 목사가 목양의 현장에서 남긴 그림 같은 글들을 수록한 목양일기 중에 하나다. 이렇게 기억하고 있는 저자를 한 동안 잊고 살았는데 페이스북 친구인 한종호 목사가 소개하는 짤에서 다시 한 목사를 만났다. 11월에 읽으려고 신청한 그의 책들이 미리 도착하여 제일 먼저 손에 든 책이 지금 리뷰를 쓰고 있는 ‘고운 눈 내려 고운 땅 되다’다. 참 오랜만에 만난 저자인데 눈물 나게 감사한 것은 환경도 바뀌고, 연륜도 쌓였는데 단강에서 만났던 그때의 투명한 아름다움이 저자에게 그대로 남아 있음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결코 쉽지 않을 현상(?)을 발견해서일까 싶다. 저자가 만난 시평(詩評)을 읽으면서 눈물 나게 반가웠다. 왜? 목사로 살고 있는 내가 또 아름다운 목사의 여백을 갖고 여전히 살고 있는 글벗이자 동역자임을 재삼 확인해서 일게다. ‘늙은 개가 짖으면 내다 봐야 한다.’(꽃자리 간)는 저자의 옛글 나들이를 두 번째 손에 잡으려고 하는데 이미 흥분하고 있다. 거기에 담겨 있는 그의 미학이 기대되기에. ‘예레미야와 함께 울다’(꽃자리 간)도 세 번째로 담으려고 한다. 그곳에는 나를 울게 하는 또 무언가가 있겠지! 독서하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황홀함의 기대감이 궁금하지 않느냐고 막 자랑하고 싶다. 고갱이로 들어가 보자.
“다리를 빨리 지나가는 사람은 다리를 외롭게 하는 사람이네” (이성선의 다리 중에서, p,154.)
“하느님/ 가령 이런 시는/ 다시 한 번 공 들여 옮겨 적는 것만으로도/ 새로 시 한 벌 지은 셈 쳐주실 수 없을까요”(p,156)
저자가 이 시를 처음 만났을 때 얼마나 흥분했을지 충분히 짐작하고 남음이 있다. 그리 두꺼운 책이 아닌데, 도대체 무엇을 끄집어 소개해야할까를 고민하게 하는 저자의 글을 접하면서 너무 행복하고 행복했던 이유는 저자가 목사라는 동질의 감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설명하면 부족하다. 목사로 살아가는 그가 맑은 눈을 갖고 있는 사람이기에 나를 더 사로잡았다고 말하는 것이 적절하다.
“내 너무 별을 쳐다보아/별들은 더럽혀지지 않았을까/내 너무 하늘을 쳐다보아/하늘은 더럽혀지지 않았을까”(이성선의 별을 보아 인용, p,14)
저자는 이 시를 직업의식을 갖고 이렇게 패러디했다.
“내 너무 주님을 쳐다보아/주님은 더럽혀지지 않았을까/내 너무 주님의 이름을 불러/주님의 이름 더럽혀지지 않았을까” (p,15)
세상에, 이런 청량함을 갖고 있는 목사가 있다니! 주님의 이름을 들먹이며 파는 자가 수두룩한데,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자가 지천인데, 혹시나 내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상업적인 것은 아닐까, 직업적인 것은 아닐까 노심초사하는 목사가 있다니 천연기념물이다.
“거친 들에 씨 뿌린 자는 들을 잊기 어렵나니/어찌 견딜 수 있는 곳을 가려 아직도 너희 집이라 하랴” (황동규의 悲歌 제5가 중에서 p,22)
저자는 현직 목사다. 그러니 이 시를 접하면서 멈춘 것은 당연하다. 그가 대단히 정상적이고, 이성적이며, 상식적인 목사이기에 이 시어를 그냥 간과할 수 없었으리라. 목회가 바로 거친 들에 씨를 뿌리는 일이기에 말이다. 다시 서평 처음에 인용했던 저자의 낙서가 오버랩이 된다.
“형도 울고 싶을 때가 있어?/응/언제?/아무 때나/형은 언제나 웃었잖아?/응/근데 언제 울고 싶단 말야?/세 번 웃기 위해 두 번은 울었어.”
두 번 울지 않는 목사가 어떻게 목사이겠나! 세 번째 웃는 감격을 어떻게 이론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양희은 씨가 부른 상록수의 가사 끝말이 그냥 태어날 리 만무다.
“끝내 이기리라”
느릿느릿한 달팽이의 이동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행위를 오늘의 성서라고 표현한 정현종 시인의 시어를 보고 저자는 이렇게 갈음했다.
“걸음을 멈추고 경이와 설렘으로 엎드려 들여다보면 비로소 보이는 것이 있다. 그때 보이는 것은 오늘의 성서다. 엎드려 들여다보지 않으면 모두가 어제의 성서일 뿐이다.”(p,53)
“사막에서는 소문이 자라지 않습니다.”(p,130) 김수우 시인의 시어다. 저자는 이 시문을 다음과 같이 풀었다.
“사막은 소문이 자라지 않는 곳이다. 오늘 우리의 삶이 사막이 되고 만 것은 무성한 소문이 자라기 때문이다. 내남없이 제 넓이 두 배의 말을 내뱉는다. 진정한 사막에선 바오밥도 바람에 실어온 말까지 삼켜 뿌리처럼, 발목만, 침묵만 길어진 뿐이다.”(pp,132-133.)
침묵하지 못하는 조급함이 얼마나 천박한 일인지를 고발하는 저자의 서릿발이 예사롭지 않다. 설교를 말하는 목사가 얼마나 무거운 침묵 끝에 한 마디의 말을 내뱉어야하는지 점잖게 그러나 무서운 권위로 알려준다.
오늘 오전 시간에 만난 한희철 목사의 시평을 읽으면서 청량한 음료를 마신 것 같아 너무 행복했다. 두 번째, 세 번째 책에서 한희철은 또 어떻게 나를 울릴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