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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코로나 19 이후 시대와 한국교회의 과제2024-06-11 09:54
작성자 Level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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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지은이 이도영
ㆍ출판사 새물결플러스
ㆍ작성일 2020-11-12 14:24:23

 

이도영 목사의 ‘코로나 19 이후 시대와 한국교회의 과제’(새물결플러스 간)을 읽고


“참 적절했다. 적확했다. 적정했다. 그런데…”

필자가 저자의 글을 읽고 난 소회다. 適切했다는 말은 책에 담긴 저자의 논지 평가다. 진단이 진단으로 끝나면 뭔가 헛할 텐데 글속에서 저자가 평가했던 코로나 19 이후에 대한 사회과학적, 신학적 분석과 이해가 치밀하고 치열해서 이렇게 평가해도 괜찮을 것 같다. 그가 거친 호흡을 내쉬며 생명의 고동 소리가 멈춰지지 않도록 한국교회를 향해 몸부림을 치는 눈물겨운 고투가 내 사랑하는 교회의 심장을 다시 박동하게 하는 아딧줄로 여겨졌기에 말이다. 的確했다함은 보기에는 그의 글에 좌향좌적인 냄새를 느끼게 하는 표현들이 적지 않게 등장하지만, 그 좌측으로의 기울기가 대단히 건강한 기울기라고 평가했기 때문이다. 단언건대 총신대학교라는 보수적인 기틀을 갖고 있는 학교에서 공부한 사람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저자의 불온함이 필자의 마음을 움직였기 때문이다. 필자는 그 동안 저자가 신학의 학문을 닦은 상아탑을 졸업한 참 많은 사람들과 교제했지만, 그 누구를 뽑아내 개혁적이고, 진보적인 보폭을 디디려고 노력하는 사람을 많이 본적이 없기에 그의 아슬아슬함에 소리 없는 응원을 보내고 싶어졌고 그가 피를 토했던 글감이 적확했다고 지지하는데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滴定했다함은 저자의 한국교회에 대한 팩트 체크와 군더더기 없는 포스트 코로나의 필드에서 살아내야 하는 한국교회에 대하여 너무나 풀어헤치고 싶은 것들이 차고 넘쳤지만 적어도 마지노선을 넘어서지 않으려는 절제함이 보였기 때문이다.
필자가 저자와의 만난 만남은 대단히 형식적이고, 의례적인 장소에서의 일회성 만남이었다, 그와는 일면식이 없었던 사이인데 2018년 필자의 대학원 모교인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에서 실시한 미래목회컨퍼런스의 공동 강사로 선정되어 함께 섬겼던 터라 구면이라면 구면인 그의 글이 낯설지 않았다고 표현하면 인사치레 정도는 될 듯싶다. 
‘코로나 19’
상당히 가깝게 다가온 그 무엇이다. 하필이면 ‘그 무엇’이라고 필자가 코로나 19를 정의한 것은 지금까지 해석된 여러 복음주의자들의 설명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가장 상투적인 정의가 코로나 19는 하나님의 심판 도구라는 접근이다. 그도 그럴 것이 성경적인 실례 중에 전염병의 창궐을 불러일으킨 사례들이 소개될 때, 그 근원이 하나님으로부터 유출되었다는 성경 텍스트가 공공연하게 도입되기 때문이다. 얼마 전, 유트브 상에서 이름만 대도 한국교회에서 존경의 대명사로 여겨지는 모 은퇴 목사께서 코로나 19를 정의하면서 하나님께서 한국교회에 대포를 쏘신 사건이라는 조금은 과격한 표현을 사용했는데 보수적인 관점에 있고  우향우에 놓여 있는 한국교회의 수많은 이들이 때를 만난 것처럼 이 목사의 그 한 마디에 벌떼처럼 달려들어 난도질하며 비난하고 있는 형국을 보면서 착잡한 마음 금할 길이 없었다. 역시 코로나 19는 괴물은 괴물인가 보다.
이런 차제이기에 저자가 펴낸 본서에 적극적인 지지를 보낸다. 젊은 크리스천 지성은 물론, 세속적 아류 중 상당수 많은 지적 총량을 기대하는 독자들이 있다면 그들의 머리까지도 움직이게 할 정도의 해박한 지적 접근이 저자의 이 책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자꾸 기독교내에서나 통용될 수 있는 메시지를 현대 사회의 공론의 장에 통용될 수 있는 공적 언어로 변역하지 않은 채 그대로 전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 문제점을 깊이 깨달아야 한다.” (p,43)
첫 장에 저자가 역설한 글감이다. 아, 잠시. 저자의 글을 읽다가 팀 켈러가 생각났다. 필자는 금년 초 팀 켈러가 쓴 ‘하나님을 말하다.’(두란노 간)를 만났다. 거의 400페이지에 육박하는 장서이기에 독자들에 따라 읽기가 불편할 수 있는 부담감이 있는 책이지만, 필자는 이 책을 읽고 난 뒤에, 책 뒤에 남기는 짤막한 읽기 사족을 이렇게 남겼다.

“산둥수용소 이후 내 인생의 두 번째 초고의 책이 될 듯싶다. 2020년 5월 1일 오후 2:15”

왜 이런 소회를 켈러의 책에서 느꼈을까? 주지하다시피 팀 켈러는 종교의 무덤이라고 말하는 뉴욕 리디머 커뮤니티를 바로 세운 사역자다. 주목할 것은 어떻게 그가 이런 기적 같은 일을 이룰 수 있었는가에 대하여 추적하다보면 떠오르는 것이 하나 있다. 통용되는 언어, 이해하게 하고 설득하게 하는 지성적 소통이 뉴욕커들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게 된 결정적인 요소였다는 점을 알려준다. ‘하나님을 말하다’가 바로 그 결정체처럼 보이는 그의 역작이다. 그러니 무신론적인 진화론자들이 우글거리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한 복판에서 팀 켈러는 그리스도의 마르투스로 사역을 감당하며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코로나 19 이후 시대와 한국교회의 과제’라는 저자의 본서는 대사회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 언어로 풀어헤친 개신교 목사의 탁월한 인문학적, 사회학적, 신학적 해제다. 극단적으로 우향우 되어 있는 목회자, 신자들이 이 책을 손에 들면 대단히 전형적인 좌빨(?)적인 불온문서라고 공격하겠지만, 이 정도를 극복하지 못하면 내 사랑하는 교회의 미래가 얼마나 추락할지 심히 염려스럽다.
저자는 코로나 19를 진단하는 전형적인 보수복음주의자인 존 파이퍼가 쓴 ‘코로나 바이러스와 그리스도’에 대해 거침없이 비평한다. 저자는 개혁주의자의 거장이라고 하는 파이퍼의 주장은 올바른 신학적 성찰이 이루어지지 않은 무책임한 해석이라고 강변한다.
파이퍼는 말했다. 코로나 19는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라고. 저자는 이 대목을 놓고 복음주의적인 강박증을 드러낸 것이라고 평가절하 한다.

“코로나 19는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심판의 도구라고 말하는 복음주의자들은 오직 가해자의 죄를 용서하는 십자가의 능력만 알뿐, 피해자의 탄원을 신원해주는 십자가의 능력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고, 개인적 고난 가운데 있는 신자가 실존적인 신앙고백 차원에서 발화해야 하는 말들을 사회적 재난에 그대로 대입시키는 사고방식의 오류로 나타나는 현상이며, 모든 걸 신정론적인 입장에서 말하지 않으면 안 되는 방어적 강박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p,46)

필자는 저자의 이 글속에서 왠지 모를 동질감을 느꼈다. 저들만의 리그로 전락된 기독교만의 카테고리 안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으려는 수구성과 나와는 다른 여타 다른 공동체의 소리에 눈감고 있는 크리스텐돔 식의 기독교적 게토화에 대해 한숨을 내짖는 저자의 모습이 꼭 나의 한숨과도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다.
책의 중간에 위치해 있는 코로나 19가 발생하게 된 사회과학적 진단은 독자들이 직접 독서하며 비평적 성찰을 행하기를 기대하며 생략하려고 한다. 다만 코로나 19 상황에 대해 교회가 반응해야 하는 목회신학적인 저자의 대안 제시는 눈여겨보아야 하는 대목이기에 평해본다.
저자가 코로나 19를 대처하는 목회신학의 목소리로 제시한 것은 ‘공적 언어를 통한 공론의 장’을 만들어야 한다는 점을 제시한 것이다. 이 단어에 저자가 방점을 찍은 이유는 저자가 견고하게 가지고 있는 세 가지의 교회론인 공교회성, 공공성, 그리고 공동체성을 회복하는 교회라는 모토에 기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 기독교가 세상과 엇박자를 내는 비상식적인 집단으로 전락한 이유는 수도 없이 많겠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공교회성, 공동체성, 그리고 공공성의 부재다. 그 중에 공공성의 부재는 심각한 수준이다.” (p,234)

저자가 나가는 말에 남긴 토설이다. 저자가 말한 이 대목이 빗나갔으면 하는 마음 간절했지만, 대단히 유감스럽게 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코로나 19를 통해 본 한국교회의 민낯 드러내기와 대처 능력은 전혀 공공의 유익을 위함이 아니라 기독교적인 언어와 크리스텐돔 식의 일방적 주장만을 밀어붙임으로 전혀 세상과 소통하지 않으려는 전형을 보여준 꼴이 되어 교회는 대화불가능의 집단으로 인식되는 수모를 당하고 말았다. 그 빌미의 선두에 전광훈 목사가 있었고, 근본주의적인 수구적 기독교 집단이 있었다. 전광훈 목사의 발군의 솜씨로 가일층(加一層) 보여준 수구적 근본주의에서 나타나는 교회의 기득권 정치집단으로의 쏠림 현상은 세상이 지금 무엇을 교회에 요구하는가에 대해 눈감은 행태 중에 끔찍한 압권이었다.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조에 나타난 교회의 대명제는 ‘보편적 교회’(Catholic Church)다. 보편적 교회라는 말은 곧 ‘공교회’ 라는 의미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 공교회로의 걸어감은 ‘누군가’의 교회가 아니라 ‘누구나’의 교회가 하나님의 교회라는 교회론의 적절한 정의를 교훈하고 있는 명제이다. 그렇다면 분명한 것은 교회가 ‘누군가’를 위한 교회로 치우칠 때, 이미 그 공동체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의 동력을 상실한 것인지도 모른다. 코비드 19라는 전무했던 괴물의 공격에 노출된 한국교회는 너무나도 유감스럽게 이상한 정치적 집단으로의 변색이라는 자가당착에 빠지는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범했다. 수구적 기득권을 갖고 있는 정치집단에 천착하여 기생하려는 근본주의적인 개신교의 비성서적, 비신학적 행태는 약한 자, 병든 자. 억눌린 자, 가난한 자 등과 함께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와는 전혀 관계없는 힘 있는 자들의 편에 서서 편승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아쉽고 아프다. 이 참담한 수구적인 교회주의자들을 지적하기 위해 꺼낸 든 저자의 방점이 여럿 있지만 안식일 개념 해석은 대단히 고무적인 실례라고 평가된다.

“안식일은 탐욕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지나친 노동 착취를 근절하는 사회적 제도다.” (p,75)

저자의 성찰은 적절한 안식일 신학을 기초로 한 대단히 명쾌한 해제다. 분명히 저자가 이렇게 갈파한 것은 안식은 누군가 특정한 인물을 위한 특혜의 산물이 아니라 노예나 주인이나, 가진 자나 못 가진 자나, 높은 자나 낮은 자나, 여자나 남자나 전혀 개의치 않고 모두의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임을 알게 하는 것임에 동의했기 때문이리라. 저자는 이 모두에게 주어진 안식이 불평등하게 임하게 된 기저에는 인간의 탐욕이 똬리를 틀고 있다고 보았다.
필자는 오래 전, 아브라함 죠수아 헤셀이 ‘안식일’에 대하여 진단한 글을 읽다가 밑줄 그었던 적이 있었다.

“안식일은 갈가리 찢겨진 삶을 수선하고,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 아니라 집중하는 날이다. 존엄성을 상실한 노동은 불행의 원인이고, 정신이 없는 휴식은 타락의 원천이다.” (아브라함 죠수아 헤셀, “안식”, 복 있는 사람, p,65.)
시대의 진보적 구약학자라고 평가 받는 월터 브루그만도 말한다.

“안식일은 단순한 멈춤이 아니다. 안식일은 강요와 경쟁에서 벗어나 서로를 긍휼히 여기는 연대성에 비추어 사회의 모든 삶을 다시 생각해 보는 계기다. 이러한 연대는 사람들이 좨쳐대는 탐욕이 부서져야 비로소 생각할 수 있고, 실행할 수 있다.” (월터 브루그만, “안식일은 저항이다.”,복 있는 사람,p,95.)

리젠트 칼리지의 미르바 던의 갈파에 전율한 적이 있다.

“안식일 지키기는 세상을 변화시킨다. 안식일 지키기는 우리를-칠 일마다 개인적인 ‘종교’ 영역으로 물러난 별난 사람들로서-세상과 분리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안식일 지키기는 우리를 세상과 그 필요 속으로 더 깊이 밀어 넣는다. 왜냐하면 안식일 지키기는 우리를 하나님의 가슴과 목적으로 더 깊이 이끌기 때문이다.” (미르바 던, “안식”, IVP,p,173.)

종교적 탐욕, 기득권적인 탐욕, 사회적인 탐욕 등등 일체의 탐욕을 제어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안식의 회복이라는 학자들의 교훈이 중요하게 다가오는 것은 교회가 코로나 19 이후에 반드시 새겨 실천해야 하는 공동의 선이자, 이미 이루어진 하나님 나라에 살고 있는 백성들의 행동강령이었기 때문이다. 코로나 19의 공격은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가 아니라 인간이 자행해온 탐욕의 결과로 빚어진 자충수였음을 정직하게 인정해야 한다, 아마도 저자는 성경이 말하고 있는 안식의 규례를 있는 자의 편에 섰기에 제대로 이행하지 못한 이런 교회의 일탈로 보았고, 이것으로 인해 일어난 역기능적인 결과물을 되돌리기 위해 제시한 교회가 할 수 있는 뉴딜을 p,127에 상세하게 열거하고 있다, 그 사역 실천에 최선을 다하려고 하는 고군분투의 길을 걷고 있음에 저자에게 필자 역시 박수를 보내고 싶다.

이제 북 리뷰를 마치면서 마지막 남은 하나의 화두를 언급해야 불편함이 필자에게 있다.
“참 적절했다. 적확했다. 적정했다. 그런데…”
그렇다. 그런데…
가능할까? 저자가 그토록 피를 토한 코로나 19 이후에 대한 한국교회가 반응해야 하는 기독교만의 게토화에서 벗어나 현대 사회의 공론의 장에 통용될 수 있는 공적 언어로 변역을 교회가 이루어낼 수 있을까!

대단히 안타깝지만 필자는 여운을 남겨야 할 것 같다. 한 마음으로는 저자가 제시한 충고들이 한국교회에 절절하게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충일하지만, 이제 이순(耳順)의 나이에 들어서서 목회의 후반기를 보내며 사역을 정리해야 하는 지금, 내 사랑하는 한국교회의 미래가 그렇게 될 수 있을까를 솔직하게 진단하면 할수록 왜 필자의 목소리와 몸짓은 작아지는 것일까!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난 저자의 글을 서평하면서 이렇게 부호 하나를 남겨야 할 것 같다. 그러고 싶지 않지만 말이다.

저자가 2018년 필자의 대학원 모교에서 실시한 세미나 참여한 동역자들 앞에서 역동적으로 피력했던 그 여러 소리들의 톤을 잊을 수가 없다, 자신만만해 하던 저자의 그 광야의 소리를.
저자가 실망하지 않게 내 사랑하는 한국교회의 지형의 틀이 코로나 19로 인해 꿈틀거렸으면 좋겠다. 그게 희망이니까. 아주 오래 전 보았던 너무 감동적인 영화, 쇼생크 탈출 영화의 말미에 팀 로빈스가 모건 프리먼에게 던졌던 대사를 가슴에 새기며 필자도 달려왔다.

“희망은 좋은 것이야. 사라지지 않거든”

이도영 목사의 희망이 사라지지 않는 내 사랑하는 한국교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진심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