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0월 13일 (두 번째 주) 지역 셀 사역
1. 얼음깨기 (WELCOME) 나의 장단점 진솔하게 나누어 보기 2. 찬양 (WORSHIP)
● 찬송가 214장: 나 주의 도움 받고자 ● 복음성가: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니
3. 말씀 읽기와 적용 (WORD) ● 본문 : 요한복음 2장 13-22절 ● 제목 : 왜 이 지경이 되었을까? (2) 1) 헤롯 성전에 장사하는 이들이 우후죽순 생기게 된 이유는?
⓵ 구약 율법 ⓶ 제사를 드리는 자들의 입장 ③ 상생의 콜라보
2) 상생의 콜라보에 대해 예수께서 보이신 반응과 행위는? ① 예레미야 7장 11절 참고 ② 본문에 제시된 4개의 동사를 참고
3) 적용하기
⓵ 예수께서 분노하신 이유를 내게 적용시키자. ⓶ 예수께서 분노하신 이유를 교회에 적용해 보자. ③ 다잡이해야 하는 신앙의 길은? ④ 기도 제목 합심하여 기도하기
4) 사역하기 셀 예배 순서 ※ 찬양하기 : 찬송가 부르기 ※ 얼음 깨기 나누기 ※ 찬양하기 : 복음성가 부르기 ※ 예배기도 : 맡은 이 ※ 말씀 증거와 문제 내용 나누기 ※ 적용하기 ※ 기도제목 중보하기 ※ 헌금 봉헌 ※ 헌금 기도: 셀 리더 ※ 피선교지 중보하기: 다 같이 ※ 폐회 : 주기도문 ※ 교제하기 주간 사역하기 1) 합심 기도 하기
① 주님, 말씀에서 변질되지 않는 그리스도인 되게 하옵소서. ② 주님, 부담과 안락함을 벗어버리고 주의 명령대로 살게 하옵소서. ③ 이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살육과 전쟁이 그치게 하옵소서. ④ 세인 교회가 하나님이 일하시는 도구 되게 하옵소서. ⑤ 지역 셀이 성령으로 충만한 소그룹이 되게 하옵소서. ⑥ 새 신자들이 연착륙하게 하옵소서. 2) 대 심방이 은혜로운 사역이 되도록 기도로 준비하기 3) 하반기에 태신자 구원하기 위해 전심하기: 12월에 전도 축제 4) 환우들을 위해 치유 중보 5) 자녀들이 주님과 전인격적으로 만날 수 있도록
● 설교요약 (SUMMARY)
본론) 본문에 보면 성전에서 세 종류의 사람들이 있었다고 보고합니다. ① 소와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이었습니다. ② 돈 바꾸는 자들이었습니다. ③ 성전에서 그 행위를 용인해 주고 자릿세를 받는 성전 관리자들이었습니다. 오늘 수요예배 설교를 통해서 첫 번째 사람들을 추적해 보겠습니다. 본문 14〜16절을 읽겠습니다.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비둘기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헤롯 성전 안에 왜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상인들이 있었을까요?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 생명처럼 소중히 여기는 율법을 근거해 본다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려면 흠이 없는 소나 양이나 비둘기 새끼를 제물로 드려야 했습니다. 레위기 22:18〜20절입니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과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말하여 이르라 이스라엘 자손이나 그 중에 거류하는 자가 서원 제물이나 자원 제물로 번제와 더불어 여호와께 예물로 드리려거든 기쁘게 받으심이 되도록 소나 양이나 염소의 흠 없는 수컷으로 드릴지니 흠 있는 것은 무엇이나 너희가 드리지 말 것은 그것이 기쁘게 받으심이 되지 못할 것임이니라” 예루살렘에서 사는 사람들은 별문제가 없었겠지만, 지방에 사는 자들은 이 율법 조항이 곤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제물을 가지고 올라오다가 제물이 흠이 생기는 일을 다반사로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제물들이 병이 생기거나 흠이 생기면 제물의 가치가 없어지는 것은 물론, 제사를 드릴 때 제물로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지방에 사는 이들은 예루살렘에 올라와 제물을 구입하는 것이 경제적으로도 유익이며, 직접 제물을 데리고 이동시켜야 하는 번거로움을 겪지 않을 수 있는 유리함과 편리함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는 방법이었습니다. 이런 인과관계 때문에 성전에는 제물을 파는 자들이 생겼고, 이런 장사치들은 우후죽순으로 생겨났습니다. 결국, 제물을 드려야 하는 백성들과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이들이 경제적 유익이 맞아떨어진 결과물이 성전에 제물을 파는 자들이 탄생한 이유였습니다. 이들의 행위에 대해 주님이 보이신 반응을 본문 15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요한복음 저자는 주께서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었다고 보고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그 노끈으로 주께서 그들에게 폭력을 가했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다만 주님이 노끈을 만드신 행위를 제 석사논문 지도 교수이셨던 故 강희천 교수께서 이렇게 심리적으로 해석했던 기억이 생생한데, 주목할만해서 소개합니다, “주님은 노끈을 만드시면서 당신이 느끼고 있었던 분노를 완화, 조절하셨다.” 참 설득력이 있는 해석입니다. 왜 그럴까요? 노끈으로 장사치들의 육체에 린치를 가하는 폭력을 가하셨다는 메시지가 복음서에 등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만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셨다는 기록은 장사하는 자들에게 정서적 공포를 주기에 충분했다고 해석하는 것이 본문 정황으로 그럴듯해 보입니다. 노끈을 만드신 주님의 권위만으로 아버지 하나님의 집을 장사하는 장소로 만들었고, 강도의 소굴로 만든 자들에게 판을 바꾸는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공포를 주기에 충분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주님은 장사하는 자들에게 말이 아니라, 그렇게 만든 채찍을 들고 행동으로 당신의 분노를 표현하십니다. 네 가지 동사가 눈에 들어옵니다. 내쫓으셨다(에크발로), 쏟으셨다(엑케오), 엎으셨다(아나트레포), 가져가라 (아이로) 시제 자체가 4개 동사 전부 공히 현재 직설법 능동태라는 구조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이 단어들은 주께서 거룩한 하나님의 집에서 자행되고 있는 행태가 너무 엄청난 범죄이기에 그것을 멈추게 하는 물리적 행동이 현장에서 동시에 이루어졌다는 것을 보고하는 단어들입니다. 그만큼 사안이 중대했기에 예수님의 돌발적인 행동이 있었던 성전의 긴장감도 백배였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주께서는 왜 평상시에 보이던 성품이었던 온유하고, 민망히 여기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아닌, 매우 단호하고 엄격한 물리적 행동을 가했던 것일까요? ※ 야훼 신앙에 대한 변질 때문이었습니다. 주께서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셨고(에크발로), 뒤집어엎으시면서(아나트레포)하셨던 말씀에 주목해야 합니다. 16절입니다.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16절의 병행 구절인 마가복음 11:17절에서 마가 기자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장사하는 집으로 성전을 변질시킨 것은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변질시킨 것이라고 주께서 질타하셨음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이 표현은 단순히 마가의 독창적인 표현이 아니었습니다. 구약 예언서인 예레미야 7:11절의 말씀을 마가가 인용한 것으로 기록합니다.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둑의 소굴로 보이느냐 보라 나 곧 내가 그것을 보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예레미야 시대의 참극은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이 싫어하는 일만 추구하다가 안식일이 되면 성전에 몰려들어 하나님이 내 죄를 용서해 주실 것이라는 해괴망측한 논리로 무장한 변질이었습니다. 한희철 목사의 변을 들어보십시다. “예레미야 당시에도 마찬가지였다. 주님의 백성들은 주님이 싫어하는 일만 하고 있다. 도둑질하고, 사람을 죽이고, 음행하고, 거짓으로 맹세하고, 부자가 된다면 얼마든지 바알을 섬기고, 알지도 못하는 다른 신을 섬겼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그것보다 더 큰 문제가 있었다. 그렇게 살면서도 주님의 성전에 들어와서는 주님 앞에 서서 말하기를 “우리는 구원을 얻었나이다”라고 했던 것이다. 성전 밖에서 어떤 삶을 살았든지 성전 안에 들어오기만 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주님 앞에서 그들 스스로 선언한 것이다. 주님의 선물인 구원을 자기 스스로 선언했다. 성전을 찾았다는 그 단순한 이유 하나만으로 말이다. 주님 앞에 그런 모습은 성전을 도둑의 소굴로 만드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한희철, 『예레미야와 함께 울다』, 꽃자리, 122쪽) 그렇습니다. 무서운 성찰입니다. 예레미야 시대나 오늘 2024년 이 땅에 세워진 교회의 현실을 보면서 정작 아프고 또 아픈 것은 삶의 형태와 질은 전혀 변하지 않으면서도, 교회 안에 있으면 나는 구원받았다고 자축하는 이들이 모여 있는 교회 공동체의 지체들을 보면서 야훼 하나님께서 질타하실 메시지는 본문에 있는 그대로 내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지 말라는 호통일 것은 자명합니다. 왜 목회자와 신자들이 야훼 신앙을 야훼 신앙으로 계승시키지 못하고 변질시키는 것일까요? 야훼 신앙이 불편하기 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야훼 신앙이 부담스럽기 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야훼 신앙에 눈감으면 불편함과 부담스러움이 일거에 사라질 텐데 그러지도 못합니다. 왜 과감하게 하나님과 단절하지 못합니까?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일견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역사를 움직이고 있는 주관자라는 사실을 특별 계시와 자연 계시를 통해 부여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과감히 단절할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야훼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살아가기는 21세기에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압니다. 그래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불편함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으로 현대 크리스천들이 택한 방법은 교묘하게 편리함으로 하나님의 신앙을 변질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마치 이렇게 말입니다. 출애굽기 32:4〜6절을 되새기십시오.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금 고리를 받아부어서 조각칼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 하는지라 아론이 보고 그 앞에 제단을 쌓고 이에 아론이 공포하여 이르되 내일은 여호와의 절일이니라 하니 이튿날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 번제를 드리며 화목제를 드리고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더라” 시내 산에 머물고있는 이스라엘 총회가 모세를 기다리다가 지쳐 그의 형 아론에게 하나님을 만들라고 압박하자, 아론은 그 압박에 굴복해 송아지 형상을 만들어 냅니다. 그리고 그들은 선포하고 행동합니다. 이 송아지가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낸 우리의 신이라고 천명합니다. 공동체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그날을 야훼께서 제정하신 절기는 거절하고 새로운 절일로 재제정하고 그날 번제도 드리고 화목제도 드리는 난장을 벌입니다. 이들이 만든 우상은 송아지였습니다. 송아지(에겔)를 야훼 하나님으로 둔갑시킨 이유는 말 잘 듣는 신으로 추락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총회는 부담스러운 하나님을 과감히 버리고 스스로 마음껏 조종할 수 있는 안락하고 편리한 신으로 야훼를 격하시킨 것입니다. 전형적인 변질입니다. 이요한 목사가 어제 설교 원고를 제가 보냈습니다. 수능을 앞둔 수험생 부모 기도회가 있는데 그날 설교할 원고를 보냈습니다. 아버지에게 설교 원고 컨펌을 받겠다고 보낸 일부를 소개합니다. “사랑하는 학부모 여러분, 저는 여러분들에게 기도회를 시작하며 세 가지의 약속을 함께 나누고 시작하고자 합니다. 첫 번째, 기도회에 참여했다는 자기만족을 내려놓기. 두 번째, 이 시간을 통해 나의 자녀가 보다 나아질 거야! 라는 기대심리 버리기. 마지막으로 5주간 진행하는 기도회 시간을 통해 ‘부모’이기 이전에 본래의 ‘나’, 내가 변화되는 시간일 것을 소망하고 기대하기” (이요한 목사 설교 원고에서) 설교 원고의 마지막은 이렇게 갈무리되었습니다. “사랑하는 학부모 여러분, 아니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된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모여서 기도해야 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변화하지 않는 나의 현실에 부끄러워서, 그저 자기만족을 위한 도구로 예배를 전락시키는 우리의 모습을 보며 가슴을 치고 탄식하실 하나님 앞에 회개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단지 부모이기 때문에 기도회에 나온 것이 아니라, 이 시간 하나님께서 우리의 민낯을 낱낱이 드러내시길 소망합니다. 이 자리에 모인 우리 공동체 속에서 가슴을 치고 옷을 찢으며 자복했던 느헤미야 8장에 보고된 수문 앞 광장에서의 회개가 일어나길 소망합니다. 아이의 미래와 삶의 변화를 두고 기도하기 이전에 주님 앞에 무릎 꿇고 내가 죄인입니다.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나의 삶이 이전으로 돌아가지 못하도록 이끌어 주옵소서.”(위의 원고에서) 미가 예언자는 아하스 치세에 완전히 망가졌던 남 유다의 영적 실체를 고발하며 이렇게 강하게 역설했습니다. 미가 6:6〜8절입니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하나님이 진심으로 원하시고, 또 원하시는 제물은 가증스럽게 변질시킨 으리으리한 제물이 아니라, 변화된 내 몸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기를 원하시는 삶입니다. 이것이 불편하다고 비틀면 그것이 바로 변질입니다. 이것이 부담된다고 비틀면 그것이 곧 변질입니다. 처음 부름을 받던 모세가 부름을 회피하기 위해 시내 산에서 야훼께 이렇게 불만을 제기했습니다. 강대국의 통치자 바로가 내게 너를 보낸 자가 누구냐고 물으면 나는 뭐라고 답해야 합니까? 야훼께서 모세에게 주신 답이 출애굽기 3;14절입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그렇습니다. 야훼 하나님은 “예흐예 아쉐르 예흐예” 야훼이십니다. 야훼 하나님은 야훼 하나님이시지 다른 것으로 변형시킬 존재가 아닙니다. 누구에 의해서 좌지우지되는 약한 하나님, 우유부단한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이런 하나님을 내 편리에 맞게 뜯어고치는 것은 불신앙을 뛰어넘어 죄악을 범하는 것입니다. 신앙인에게 가장 나쁜 우상숭배와 죄악은 야훼 신앙을 변질시키는 것입니다. 결론) 오스왈드 챔버스의 외침이 메아리치는 수요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이용하여 안정과 기쁨을 얻기를 원할 뿐이지, 우리의 삶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실현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오스왈드 챔버스, 『주님은 나의 최고봉』, 토기장이, 7월 10일 일기에서) 사랑하는 세인 교회 교우 여러분!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원하심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따라가는 자입니다. 토를 달지 않고 말씀 그대로 실천하며 살아가는 이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가장 나쁜 신앙의 범죄는 나에게 유리하게 말씀을 변질시키는 행위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시며 선포하십니다. “예흐예 아쉐르 예흐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