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 사역

제목2024년 9월 8일 (두 번째 주) 지역 셀 사역2024-09-04 14:06
작성자 Level 10

2024년 9월 8일 (두 번째 주) 지역 셀 사역

 

1. 얼음깨기 (WELCOME)

 

가을 하면 생각나는 사람은?

 

2. 찬양 (WORSHIP)

● 찬송가 424장: 아버지여 나의 맘을          ● 복음성가: 예배합니다.(완전하신 나의 주)

 

3. 말씀 읽기와 적용 (WORD)

 

​ 본문 : 요한복음 1장 43-51절

​ 제목 : 나다니엘을 통하여

 

1) 빌립이 나다니엘을 전도할 때 옳게 전한 것과 그릇 되게 전한 것은 무엇일까요?  

⓵ 옳게 전한 것

⓶ 그릇 되게 전한 것  

2) 본문 51절이 시사하는 영적 교훈은 무엇일까요?

51절 소개

야곱과 연관하여 말해 봅시다.

헤롯 성전과 연관하여 말해 봅시다.

3) 적용하기


성전과 교회의 교회론적인 해석을 통해 세인 교회가 받아야 할 은혜는?

레마를 내게 적용해 보기

5가지 기도 제목을 합심하여 기도하자. 

4) 사역하기

 셀 예배 순서 

 

※ 찬양하기 : 찬송가 부르기

※ 얼음 깨기 나누기 

※ 찬양하기 : 복음성가 부르기

※ 예배기도 : 맡은 이 

※ 말씀 증거와 문제 내용 나누기 

※ 적용하기

※ 기도제목 중보하기 

※ 헌금 봉헌

※ 헌금 기도: 셀 리더

※ 피선교지 중보하기: 다 같이 

※ 폐회 : 주기도문 

​ 교제하기 

 

주간 사역하기

 

1) 5가지 합심 기도 하기

하나님, 세인 교회는 성전이 아니라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 세인 교회는 주님만 예배하는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 나 스스로가 보이는 교회가 아닌, 주님이 거하시는 보이지 않는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 세인 교회 가을 사역이 승리하게 하옵소서.

하나님, 세인 교회 속해 있는 교우들의 공동체가 승리하게 하옵소서.


2) 지역 셀이 건강하게 재 활성화되도록 리더와 인턴들이 최선을 다해 노력하기

3) 하반기에 태신자 구원하기 위해 전심하기

4) 환우들을 위해 치유 중보 

 

● 설교요약 (SUMMARY)

본론) 예수께서 요단강 주변인 애논 골짜기에서 세례를 베풀던 사역을 마치고 이윽고 갈릴리 지역으로 사역의 동선을 옮기게 되었음을 본문 43절이 밝히고 있습니다. 갈릴리로 가는 어간, 예수님이 사람을 만나게 되었는데 바로 훗날 예수님과 이런저런 스토리를 남겼던 빌립이었습니다. 빌립을 만난 주님은 다른 설명 없이 그에게 나를 따르라고 명했다고 보고합니다.

그러자 빌립이 주님을 따랐다는 것은 본문 텍스트가 아니라, 여타 다른 복음서에 빌립이 제자가 되었음을 보고하고 있기에 그가 예수님이 던지신 말 한마디에 곧바로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음을 이해하는 것은 그리 해석이 아닙니다. 본문을 조금 더 깊게 접근해 본다면 빌립은 이미 예수께서 불러 제자 삼은 두 명, 안드레와 베드로와 같은 동네였던 벳세다 사람이었다고 복음서 저자는 보고합니다. 주석에 의하면 안드레와 베드로의 고향인 가버나움과 벳세다는 불과 20리 정도의 거리였기에 아마도 요한복음 기자가 빌립을 베드로, 안드레와 고향이 같은 동향 사람이라고 보고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가 설교를 통해 주목하고자 하는 나다나엘에 대한 이해는 조금은 더 심오해야 할 것 같습니다.

본문 내용을 조금 더 나아가 보십시다. 예수께서 부르자 예수를 따른 빌립이 전도한 기사가 이어 등장합니다. 빌립이 친한 관계였던 나다나엘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이렇게 전도했습니다. 본문 45입니다.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전한 전도의 내용은 구약에서 여러 선지자가 선포한 바로 그이. 즉 메시아를 만났다는 나름 명확한 내용이었습니다. ‘우리가 만났다고 표현한 복수 일인칭 대명사를 쓴 이유는 아마도 주님을 따르기로 한 자들 중에는 빌립을 비롯한 또 다른 익명의 제자들이 있을 것이라는 예상을 하게 합니다. 그들이 갖고 있는 공통의 분모는 구약에서 예언한 메시아가 우리들이 만난 분이라는 점이었습니다. 빌립이 전한 메시지는 나름 적확한 내용이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가 유감입니다. 미가 예언자의 말을 믿지 못했던 유감입니다.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전한 예수에 대한 정보 중에 미가 예언을 믿지 못했다는 증거가 있습니다. 내가 만난 메시아는 나사렛에 살고 있는 목수 요셉의 아들이었다는 증언이었습니다. 빌립의 이 증언은 미가 예언서 5:2절을 알지 못했든지, 아니면 알았어도 그것을 믿지 않았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예언서 미가 5:2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메시아는 베들레헴에 탄생할 것이라는 분명한 예언자의 고지가 있었는데도 빌립은 예수를 나사렛 출신이라고 전한 점입니다. 대단히 착각입니다. 이런 전언을 받은 나다나엘은 추측건대 나사렛이라는 빌립의 말에 귀를 닫은 것이 분명합니다. 이 말은 나다나엘은 메시아 탄생이 나사렛이 아닌 베들레헴 출신 중에 나올 것이라는 미가 예언자의 신탁을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고 또 그것을 믿고 있었기에 빌립의 말에 대해 손사래를 친 것입니다.

본문 46절 전반절입니다.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이 구절이 담고 있는 유다 지역 공동체의 역학 구도에 대해 학자들 중의 일부는 이렇게 해석하기도 합니다.

학자들은 나다나엘이 가나 출신이므로(21:2) 두 이웃하고 있는 도시들 사이의 경쟁이 이런 속언을 만들어 냈다고 제안했는데 설득력은 없다.” (C.K, 바레트, 국제성서주석-요한복음, 한국신학연구소, 287)

바레트는 동의하지 않았지만, 여타 다른 신학자들은 이런 주장에 대해 무게감을 두었다는 반증이기도 하기에 한편 유다 공동체 지역 간에 존재하던 미묘한 기류가 나다나엘이 나사렛을 폄훼한 이유가 된다고 접근할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하지만 저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이런 지리적인 갈등 때문이 아니라, 전술했던 것처럼 나다나엘은 메시아 탄생의 분명한 신앙적 입장을 예언자 미가의 신탁에 두고 있었기에 빌립의 말을 냉소적으로 받은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에 동의합니다. 불편해진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곧바로 항변하듯 방어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46절 하반절입니다.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

오히려 이것이 더 정직해 보이는 발언입니다. 메시아 예수를 말로는 설명하기가 충분하지 않으니 직접 그분을 만나보라는 권면이었습니다. 아마도 이런 청에 동의하여 나다나엘은 밑져야 본전이지 하는 마음으로 빌립과 함께 예수께 갑니다. 이어지는 본문 4749을 읽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이 본문 해석도 녹록하지 않은 게 사실이지만, 가장 복음적인 차원에서 접근해 보겠습니다. 부연한다면 이렇습니다. 예수께서 나다나엘의 방문을 받으셨습니다. 나다나엘이 메시아에 대해 반신반의하거나 혹은 아예 인정하지 않는 마음이었음을 앞에서 나누었습니다. 이것을 아셨는지 주께서 이렇게 나다나엘을 평가합니다.

참 이스라엘 사람이다. 간사함이 없는 사람이다.” 이 해석은 문자적으로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특별한 이해를 도와줄 만한 정황이 본문 안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당시 시대적 정황을 두루 포함하여 이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고민하다가 가장 복음적으로 이 부분을 해석한 옥한흠 목사의 설명을 교우들에게 소개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경청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나다나엘은 무엇 때문에 무화과나무 아래에 갔을까요? 성경에 보면 무화과나무는 여러 가지 사실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 본문을 해석하는 학자들의 공통적인 견해는 나다나엘이 기도하기 위해 무화과나무 아래로 갔다고 말합니다. 나다나엘은 피가 끓는 젊은이였습니다. 사회적 불의를 보고 탄식하는 젊은이였습니다. 이스라엘이 날로 썩어가고 영적으로 부패해 가는 것을 보고 가슴을 치는 젊은이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의의 왕 메시아가 속히 오기를 늘 마음으로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틈만 나면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기도하기를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나다나엘은 가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아무도 없는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흐느끼고 기도하며 부르짖는 젊은이였습니다.” (옥한흠, 요한이 전한 복음, 두란노, 96-97)

어떤 냉소적인 신학자는 이런 해석이 매우 위험한 자의적인 해석이라고 비핀하기도 하지만, 제가 옥한흠 목사의 해석을 소개한 이유는 그럴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동의했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나다나엘을 평가하시면서 붙여주었던 간사함이 없는 사람이라고 번역한 간사함을 뜻하는 헬라어 돌로스는 문자적으로 미끼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미끼는 함정을 판다는 의미입니다. 대상자를 속여 구렁에 빠지게 할 때 쓰는 도구가 미끼입니다. 주님은 나다나엘이 갖고 있었던 유다 공동체를 향한 신실한 마음은 겉치레나 미끼와 같은 허례가 없는 진정성이 있는 태도라는 것을 인정했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주께서 이렇게 나다나엘을 평가하자 나다나엘은 주께 닫혀 있던 마음을 열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주님께 신앙고백을 합니다. 49입니다.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이런 신앙 고백을 받은 주께서 나다나엘에게 도마를 연상하게 하는 멘트를 남기셨습니다. 마지막 본문 구절 5051을 나누어 보십시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유진 피터슨의 메시지번역으로 이 구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앉아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고 해서 믿는 것이냐?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이 일이 끝나기 전에,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인자 위에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마지막 구절은 영적 감동의 압권입니다. 눈치채셨겠지만 이 구절은 야곱이 밧단아람으로 도망갈 때 벧엘에서 만난 하나님을 연상하게 하는 구절입니다.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난 야곱이 뭐라 고백했습니까? 창세기 28:1617을 읽으며 복기하겠습니다.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이 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야곱이 고백했습니다. 지금 자기가 하나님을 만난 벧엘이 하나님의 집이라는 사실을 명백하게 고백합니다. 장소로써 지정된 하나님의 집 곧 성전을 벧엘이라고 설정한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 마지막 절에서 예수께서 대단히 중요한 신학적 교훈을 남겨 주셨습니다. 나다나엘에게 이렇게 선언하신 것입니다.

성전은 벧엘이 아니다. 성전은 헤롯 성전이 아니다. 성전은 바로 나 예수다.” 이 선언은 오늘 수요예배에 주시는 가장 결정적인 레마이기도 합니다. 나다나엘을 통하여 오늘 우리에게 알려 주시는 은혜가 무엇일까요?

 

예수만이 내 삶의 예배자가 되는 장소가 교회임을 알려줍니다.

 

헤롯이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46년에 걸쳐 만든 휘황찬란한 헤롯 성전에 대해서 주께서 선언한 메시지는 의미심장합니다. 마가복음 13:12입니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가실 때에 제자 중 하나가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소서 이 돌들이 어떠하며 이 건물들이 어떠하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하시니라

왜 주님은 헤롯 성전에 대해 이렇게 저주하셨습니까? 주후 70년에 있을 예루살렘 함락을 내다보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해석은 역사적, 시대적 정황을 근거한 해석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집인 성전이 하나님의 집으로서 역할을 감당하지 않고 강도의 굴혈로 변질시켰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2:1416은 단호하게 성전 종교 몰락 이유를 밝힙니다.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비둘기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마태복음 21:13도 고발합니다.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결국 하나님의 집을 하나님이 거주하시는 장소가 아닌 강도의 굴혈로 만든 이유로 인해서 성전은 무너질 것이라고 경고하신 것입니다. 이 말을 역으로 해석하면 이렇게 접근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집은 사람이 지은 집이 아니라, 예수께서 머리 되신 곳만이 성전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적용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경배받지 못하는 장소,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여타 다른 것이 예배 되는 장소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다는 교훈입니다. 예수만이 예배의 대상이어야 하며, 예수만이 높임을 받아야 하는 유일한 주님이심을 나다나엘에게 선언하신 주의 말씀으로 다시 한번 배우게 됩니다. 우리는 교회를 사랑해야 합니다. 왜 사랑해야 합니까? 교회가 예배의 대상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예수님의 머리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를 아끼고 잘 보전해야 합니다. 교회에 모여 예배하는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인격적인 만남을 경험하는 장소가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에티오피아 여왕의 국고를 맡은 내시에게 말씀의 진의를 해석해 줄 수 없었던 헤롯 성전에 하나님이 계실 리 만무입니다. 작고 허름하고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시골 교회 예배당에서 우리 신앙의 부모님들은 새벽에 눈물을 흘리며 가정, 국가를 위해 중보했습니다 그곳에 침잠해서 작은 기도를 듣기 위해 머무셨던 하나님이 계신 그곳이 바로 오늘의 교회이자 하나님의 집입니다. 오늘 하나님이 찾으시는 곳은 헤롯 성전이 아니라, 예수만 섬기는 교회입니다.

 

결론) 저는 이제 설교를 맺으려고 합니다. 나다나엘을 통해 큰 울림을 주신 말씀 다시 한번 읽고 기도하겠습니다.

51입니다.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가 예배하는 유일한 주군이십니다. 고개를 다른 곳으로 돌리지 마십시다. 주님만 예배하는 세인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