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3일 (네 번째 주) 지역 셀 사역 1. 얼음깨기 (WELCOME) 여름 음식 중에 최애 식품과 레시피 나누기 2. 찬양 (WORSHIP)
● 찬송가 94장: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 복음성가: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
3. 말씀 읽기와 적용 (WORD) ● 본문 : 요한복음 1장 1절 ● 제목 : 요한복음 강해를 시작하면서 1) 주후 1세기 '로고스'에 대한 이해는?
⓵ 영지주의자 ⓶ 헬레니즘 철학자 ⓷ 기독교인
2) 요한복음의 교훈을 다음 성경 구절을 통해 적용해 보자. ⓵ 마태복음 17장 –변화 산상 기사 ⓶ 마태복음 21장 – 시각 장애인 치유 사건 ⓷ 적용
3) 적용하기
⓵ 나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⓶ 나는 예수에 관한 것에 관심을 두고 있는가? 예수에게 관심을 두고 있는가? ⓷ 기도 제목을 합심하여 기도하자.
4) 사역하기 셀 예배 순서 ※ 찬양하기 : 찬송가 부르기 ※ 얼음 깨기 나누기 ※ 찬양하기 : 복음성가 부르기 ※ 예배기도 : 맡은 이 ※ 말씀 증거와 문제 내용 나누기 ※ 적용하기 ※ 기도제목 중보하기 ※ 헌금 봉헌 ※ 헌금 기도: 셀 리더 ※ 피선교지 중보하기: 다 같이 ※ 폐회 : 주기도문 ※ 교제하기 주간 사역하기 1. 5가지 합심기도 하기 ⓵ 하나님, 주 예수 그리스도만 원합니다. ⓶ 하나님, 주 예수 그리스도만 보게 하옵소서. ⓷ 하나님, 요한복음 강해를 통해 이전보다 더 월등한 신앙의 성숙을 주십시오. ⓸ 하나님, 수요예배에 빠지지 않도록 상황을 만들어 주십시오.
⓹ 듣는 우리, 전하는 목회자가 은혜의 물결에 빠지게 하옵소서. 2. 셀에서 섬기는 태신자를 전반기에는 결실 맺도록 최선을 다하기 3. 맥추감사주일 사역 점검하고 준비하기 4. 불침번 기도 사역에 방관하지 않기 5. 22일 봉사에 솔선수범하기 ● 설교요약 (SUMMARY)
서론) 현장 목회자로 서서 교우들과 함께 부대끼며 주께서 위탁한 영혼들을 살찌우기 위해 몸부림치는 정상적인 목사들에게 설교 섬기기 영역으로 들어가면 꼭 섭렵하고 마스터하고 싶은 로망이 있습니다. 구약 성경으로 예를 들자면 창세기, 사사기, 욥기, 시편, 예레미야 예언서로 축약할 수 있습니다. 신약 성경으로 좁히면 마가복음, 요한복음, 사도행전, 로마서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이 식으로 접근할 때 제 목회 정년 기간 내에 저는 구약 성경은 시편과 예레미야가 남아있고, 신약 성경은 전부를 섭렵했습니다. 그런데도 왜 다시 요한복음을 수면 위로 올렸는지를 말씀드린다면 제가 가지고 있는 요한복음 강해 파일의 첫 페이지 일자를 확인해 보니 2005년 3월 9일 수요예배부터 진행했던 파일이었습니다. 약 두 달 전부터 수요예배 설교 텍스트를 무엇으로 정할까를 고민하다가 요한복음으로 택한 이유는 19년 전에 담임목사가 갖고 있었던 요한복음 이해에 대한 허접함을 확인하고 교우들에게 송구한 마음이 들어 속죄하겠다는 마음이 일 순위였고, 두 번째로는 어언 20년이 지난 뒤이기에 조금은 더 성숙한 요한복음 이해와 해석을 통해 교우들에게 보상해 드리고 싶다는 거룩한 오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용기가 다시 요한복음을 공부하게 한 이유입니다. 앞으로 몇 년이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최선을 다해보려 합니다. 네 가지의 복음서 중에 마가복음은 가장 권위가 있는 복음서이기에 2009년부터 2014년까지 교우들과 공부하며 최선을 다했던 것처럼 오늘 수요 저녁 예배부터 또 다른 목회자들의 로망을 질 높은 준비를 통해 교우들에게 제공해 드리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성령께서 도우실 줄로 믿고 함께 기도하며 달려가기를 바랍니다. 본론) 통상 복음서를 연구하다 보면 요한복음에서 멈칫 할 때가 많습니다. 교우들은 잘 모를 수 있겠지만, 요한복음 앞에 순서로 열거된 세 복음서의 언어보다 요한복음은 그 낯설기가 그지없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단적인 실례가 오늘 읽은 본문 1절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이 구절에 세 번에 걸쳐 반복적으로 소개된 단어가 ‘말씀’입니다. 헬라어 원어 성경에 이 단어는 ‘로고스’라고 적혀 있습니다. ‘로고스’라는 단어가 여타 다른 복음서인 공관복음서에는 대단히 낯선 단어입니다. 왜냐하면 주후 1세기 ‘로고스’라는 단어는 헬레니즘의 영향 하에 있었던 모든 지역에서 ‘이성’을 의미하는 단어로 굳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주후 1세기 팔레스타인 지역 물론, 헬레니즘이 만연해 있었던 갈라디아나 마케도니아 지역에 침투하여 막강한 세력을 이루며 기독교회를 위태롭게 했던 영지주의자들이 최고의 가치로 여겼던 ‘지식’이라는 단어가 바로 ‘로고스’라는 단어로도 통용되었기에 교회 공동체에서는 환영받지 못하고 경계하는 단어가 ‘로고스’였다는 점을 감안할 때 요한복음 저자의 ‘로고스’ 도입은 대단한 파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요한복음 저자는 대단히 용감하게 기독교의 정수이자 생명과는 같은 단어인 ‘말씀’이라는 단어를 ‘로고스’로 사용한 것은 대단한 용기였습니다. 그렇다면 요한복음 저자는 왜 이렇게 민감한 도전을 했을까요? 더더군다나 요한복음의 편집 연도를 학자들은 주후 1세기 말까지로 소급하는데 이때가 가장 영지주의가 극점을 달리던 때라는 사실을 전제할 때 요한복음 집필은 이단과 맞짱 승부를 낸 것과도 같은 일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저자는 왜 이런 긴장감이 있는 시도를 했을까요? ※ 말씀 그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우월성을 선포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요한복음서가 작성된 때로 추측되는 주후 1세기 후반의 종교적 상태를 신약학자 C.K. 바레트는 이렇게 요약 했습니다. “복음서가 작성된 시기의 시대적 배경은 매우 복잡하다. 그 배경들에 대해서는 분명한 선을 긋기가 어렵다. 그리스도 이후 1-2세기에 사람들과 사상들은 빠른 속도로 밀려 멀리까지 교류되었으며, 제의들과 철학들은 함께 뒤섞여서 서로 영향을 주는 절충주의(syncretism)의 시대였다. 지중해 지역의 주변 세계 옛 종교들은 많은 경우 회의주의로 말미암아 해체되었다. 그러나 보다 많은 새로운 신앙들이 동방으로부터 흘러들어왔고, 그것들 점점 더 종교적으로 되어가 후기 그리스철학에 어느 정도 근거하면서 스스로 확립시켜 가고 있었다.” (C.K, 바레트, 『국제성서주석-요한복음』, 한국신학연구소, 51쪽) 무슨 말입니까? 팔레스타인을 비롯한 지중해 지역은 종교와 철학의 춘추전국시대를 방불하는 시대였다는 해석입니다. 영지주의 이단주의자들은 믿음의 최고 가치를 ‘지식’이라고 매도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폄훼했습니다. 로마 황제 숭배자들은 로마 종교가 가장 뛰어난 종교이기에 로마 황제인 시저만이 구주라고 강제하였습니다. 지중해 지역의 뛰어난 철학자들은 인간을 가장 인간 되게 하며 결국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가치가 ‘로고스’ 즉 인간이 갖고 있는 ‘이성’이라고 선언하며 기독교 신앙을 일축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영적 춘추 전국 시대를 이루고 있었던 주후 1세기에 요한복음 저자는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말씀의 선재성을 분명히 선포한 요한복음 저자의 의도가 엿보입니다. 후에 다시 살피겠지만 요한복음 1:14절은 태초에 선재했던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임을 천명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종합한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초에 존재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분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같이 계셨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같이 계셨던 주 예수 그리스도는 이성보다 앞서 계신 분이었고, 철학보다 미리 계신 분이었고, 국가 권력이 생겨나기 전부터 ‘말씀’ 즉 ‘로고스’로 천지창조의 동역자로 계셨던 하나님이셨습니다. 요한복음의 저자는 주후 1세기를 들썩였던 일체 사상, 철학, 이단의 사상을 단 한마디도 일거에 정리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예수 그리스도보다 뛰어난 이 땅에 존재나 사상, 철학, 권력은 존재하지 않음을 분명히 선언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오늘 수요일부터 요한복음 여행을 다시 떠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보다 뛰어난 이 땅에 피조물은 존재하지 않음을 함께 느끼고 체휼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마태복음 17:8절은 요한복음 공부의 목적을 알려주는 구절입니다.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 변화산상에서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이 보았던 것은 변형되어 보이신 예수님의 외형이었습니다. 즉 ‘여기 있는 곳이 좋사오니’의 제 현상들이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보는 이에 따라 감각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 즉 미각적, 시각적, 청각적, 육감적으로 다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한 가지는 동일합니다. 예수가 아니라 예수에 관한 것에 대한 동경이었습니다. 어떤 신학자가 이렇게 선언했던 것을 책에서 읽었던 적이 있습니다. “교회가 약해지고, 성도가 약해진 것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바라보지 않고 십자가에 집중했기 때문이다.” 참 의미 있는 발언입니다. 그 어떤 경우에도 예수의 외형에 현혹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 어떤 경우에도 예수 같은 것에 함몰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 어떤 경우에도 ‘about Jesus’가 우리의 관심이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관심은 Jesus 그 자체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지난 2021-2022년까지 히브리서 공부를 했습니다. 나누었던 감동이 무엇이었습니까? 1장은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천사들보다 뛰어나신 분이다. 3장은 말합니다. 모세보다 뛰어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4장은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제사장들보다 우월하신 분이시다. 7장은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대제사장의 상징인 멜기세덱과 같은 위상의 존재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수신자들에게 역설했습니다. 그러므로 가장 뛰어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성경의 내증 한 대목만 더 나누어 보십시다. 마태복음 20:29-33절을 읽습니다. “그들이 여리고에서 떠나 갈 때에 큰 무리가 예수를 따르더라 맹인 두 사람이 길 가에 앉았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함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니 무리가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지라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들을 불러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이르되 주여 우리의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 여리고에서 있었던 바디매오와 또 다른 익명의 시각 장애인을 고친 기적의 기사입니다. 제자들이 목도하고 있었던 것은 예수의 사역이었고 권위였습니다. 즉 about 였습니다. 하지만 시각 장애인이 집중하며 목도한 것은 다윗의 자손이자 주이신 예수였습니다. 예수가 가장 뛰어난 주군이심을 믿는 자는 ‘예수에 관한’ 것에 관심 갖지 않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요한복음을 여행하면서 이 놀라운 은혜가 가일층 가속화되기를 바랍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로고스를 압도하는 로고스이셨습니다. 그분은 태초에 계셨던 하나님이셨습니다. 결론) 빌리 그래함 목사 부흥 선교단 찬양 사역자인 베벌 세어가 노래했습니다. 나는 은금보다 예수를 더 좋아합니다. 나는 부유함의 사람이 되느니 차라리 그분의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나는 집이나 땅보다는 예수님을 갖고 싶습니다. 차라리 못 박히신 그분의 손에 이끌리겠습니다. 난 그 어떤 것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하고 싶습니다. 이 찬양의 고백이 요한복음 여행 내내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찬송가 94장을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