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 사역

제목2016.04.17 셀 사역2024-04-22 16:13
작성자 Level 10


얼음 깨기 (WELCOME)
돌로 만든 조형물 중에서 가장 웅장하거나 아름답게 기억하는 건축물을 나누어 보기  

 
경배와 찬양 (WORSHOP)

● 예수 따라가며 복음 순종하면 (찬송가 449장) 
● 예수 그 이름 (복음 찬송)
  

 
말씀읽기와 적용 (WORD)
● 제목: 산돌 (Living Stone)
● 본문: 베드로전서 2:4-8
1) 본문에서 베드로가 말한 내용과 이사야의 예언을 종합하면 돌의 상징이 무엇임을 알 수 있나요?
●  베드로의 선언(본문 4-7절 참고):

●  이사야의 예언(이사야 28:16절 참고):  

2) 베드로가 권한 산돌이신 예수께 대하여 우리들이 행할 일은 무엇이었나요?
● 예수께 나아가는 삶(4절 참고):

●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거치는 돌이나 반석이 되지 않는 것(8절 참고):  

3) 로고스를 레마 化(화) 하기
● 완벽하지 않은 이 땅의 가시적(보이는) 교회에 대하여 비난하는 것으로 말씀 순종의 부담감 비껴가기 인정하고 고백하기.

● 핖토(엎드림을 진정성이 있게 하기): 내려놓기  

 
사역하기 (WORK)
1) 오순절 릴레이 기도회
  ① 기간: 3월 28일(월)~ 5월 14일(토)까지
  ② 시간: 오전 9시~ 오후 9시까지 (1시간씩 담당)
    (기도를 마친 후 다음 지체에게 문자 남기기)
  ③ 장소: 교회 혹은 개인의 상황에 따라
2) 중보기도
  ① 춘계대심방을 위하여(김현미 셀을 위하여)
  ② 임직 예배를 위하여
  ③ 환우들을 위하여(최정희 집사, 안동철 형제 등등)
3) 헌금
4) 광고: 4월 표어 실천하기(재래시장에서 장보기)
5) 폐회: 주기도
  

 
설교요약 (SUMMARY)
2016년 4월 17일 주일 오후 예배 설교 (베드로전서 14번째 강해)
본문 : 베드로전서 2:4-8
제목 : 산 돌(Living Stone)

  베드로는 주님의 인자하심을 맛보고,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먹으며 성숙한 주님의 사람들로 선 자들은 신앙의 집을 지어가는 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돌을 기초로 삼아야 함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4-5절에서 베드로는 이렇게 역설하고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이 구절에서 발견하는 첫 번째 은혜입니다.

1) 산돌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들의 신앙의 집을 세우는 데 가장 중요한 주춧돌임을 배웁니다.
  베드로는 4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① 사람에게 버린바 된 존재이셨다. ② 하나님이 보배로운 산돌로 만드셨다.”고 표현했습니다. 베드로의 이 해석을 조금 더 깊이 있게 해석해 보면 주님이 사람의 모습을 하시고 이 땅에 오셨으나 사람들은 그를 인정하거나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하였습니다. 사도 요한이 이를 증언한 성경구절이 요한복음 1:3-5절과 요한복음 1:9-11절입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예수께서 참 빛으로 오셨지만 그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 자체가 어둠이었고 빛을 싫어했기 때문입니다. 결국은 사람들에 의해 버린바 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렇게 죽으신 예수님이 전부였다면 우리 모두 불행할 것입니다. 사람에게 버린바 된 것으로 예수님의 일생이 끝이 났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본문에서 역설로 선포한 희망의 메시지는 버린바 된 예수를 하나님께서 산돌이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이 역설은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이었습니다. 예언자 이사야는 주전 750여 년 전에 이미 멸망을 하게 될 비운에 처해 있는 남 유다의 지도자들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이미 행하셨던 뜻을 전했었습니다. 시온에 세운 기초석이 있다는 예언은 다름 아닌 솔로몬 성전의 기초 석을 의미한 것처럼 보입니다. 예언자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시온에 세워 놓으신 기초 석은 이스라엘이 나의 택한 백성임을 상징하는 돌이었는데 그의 후손들이 그 언약의 돌을 무시하고 각종 우상 숭배와 죄악을 자행함으로 스스로 멸망의 길을 자초하고 있는 것을 보고 선민으로서의 신앙적 의식을 다시 회복할 것을 종용하며 선포하였던 말씀이 바로 이사야 28:16절입니다.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초 돌이라 그것을 믿는 이는 다급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
  베드로가 700-800년 전의 오래된 예언자의 메시지를 다시 선포함은 시온에 세운 한 돌, 즉 기초 석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확신함으로 역설하기 위해서입니다. 마치 분열왕국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그랬던 것처럼 이스라엘은 참 빛으로 오신 기초 석이신 예수님을 거절하고 버렸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역설은 사람들이 버린 그 돌, 천덕꾸러기 신세가 된 그 돌을 하나님께서 보배로운 산돌이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유진 피터슨은 메시지에서 그 산 돌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살아 있는 돌, 곧 생명의 근원을 맞이하십시오.” 즉 산돌의 의미는 우리를 구원하여 주신 생명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2) 주춧돌이신 예수께서 나의 생명의 근원이시기에 그 분에게로 나아가야 합니다.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돌이신 예수께 나아가”(본문 4절). 주님이 산돌 되심이 은혜입니다. 주님이 생명의 근원되시기에 그 분께 나아가야 한다고 베드로는 역설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무엇인지 정의해 주고 있는 히브리서 11:6절을 보면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했습니다. 곧 믿음이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고 우리들의 발을 내미는 것이며 내 신앙의 부족함을 알고 그 분에게 손을 건네는 것입니다. 이것을 종합하면 “내 자아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자아로 내 삶을 맡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가는 것, 하나님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머무는 것, 바로 이것이 믿음입니다.
  누가복음 5:12-13절의 기사는 단순하지만 중요한 교훈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께서 한 동네에 계실 때에 온 몸에 나병 들린 사람이 있어 예수를 보고 엎드려 구하여 이르되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니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나병이 곧 떠나니라”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계실 때 한센 병에 걸린 한 환자가 주님을 찾아와서 본인의 질병을 고쳐달라고 청하자 주님이 그 환자의 소원을 들으시고 응답하셔서 그의 질병이 고침을 받았다는 기사입니다. 이 기사에서 주목해 보아야 하는 구절이 12절입니다. “예수께서 한 동네에 계실 때에 온 몸에 나병 들린 사람이 있어 예수를 보고 엎드려 구하여 이르되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니”
  여기에 기록된 ‘엎드려’라는 단어는 헬라어 ‘페손’의 번역입니다. 이 단어의 원형은 ‘핖토’인데 이 단어의 원뜻이 ‘높은 자리에서 낮은 자리로 내려온다.’ 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믿음이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라고 했는데 그 나아감의 대전제가 나의 높은 자아, 교만, 아집, 독선이라는 높은 장에서 내려와 주님께로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분 앞에서 내 자아를 버리고, 겸손해 지고, 내 아집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주님께 거리적인 간격을 가까이 하는 정도가 아니라 주님께 나아간다는 것은 주님에게로 내 삶의 전폭을 맡긴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시작은 내 것을 완전히, 부분적으로가 아니라 완전히 내려놓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전제하지 않는 자는 아무리 외형적으로 폼을 잡고, 입술로 고백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유사품이지 진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내 자아를 포기할 때 비로소 주님에게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3) 산돌이신 주님에게로 나아가는 자가 거룩한 제사장입니다.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본문 5절). 산돌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내 신앙의 집에 주춧돌로 세워진 자들은 그 분께 나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렇게 나아가는 자들은 주님으로부터 거룩한 제사장으로 인침 받게 됩니다. 우리 모두가 이 주인공들이 되십시다.

4) 산돌이신 예수께 나아가는 자는 거치는 돌이 되지 않습니다.
“또한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었다 하였느니라 그들이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그들을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본문 8절). 산돌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주추를 세우지 않은 자들은 반드시 거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돌이 되는 결과를 얻는다고 베드로는 경고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걸림돌이라는 말입니다. 또 하나 걸리게 하는 바위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 걸림돌과 걸리게 하는 바위가 되는 원인은 산돌이신 예수께 나아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본문에서 베드로는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것’이라고 단적으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선포한 이유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7:26-27절의 산상수훈을 보면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주님의 말씀을 믿는 것만큼이나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바로 믿은 말씀에 따라 행하는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거치는 돌, 넘어지게 하는 반석이 되게 하는 자들의 특징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부담감을 외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다른 부정적 기제를 찾아내 시비 거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공동체의 걸림돌이 되는 일을 하고 있다면 그것은 교회의 외형적인 문제, 목회자의 인간적인 단점, 교회공동체 지체들의 세속성에 실망하여 내가 그렇게 하는 것이라는 합리화로 변장한 가장 치사한 불신앙임을 잊지 명심해야 합니다. 그것은 그렇게 하는 자들의 심리 속에 말씀대로 사는 것에 대한 거부 혹은 부담이라는 불신앙이 똬리를 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로 볼 때 신앙과 불신앙의 차이는 단 한 가지입니다. 말씀에 대한 순종과 불순종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를 건져주신 것처럼 우리도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에게로 가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에게 가서 내 것을 내려놓기로 결단해야 합니다. 그것은 말씀에 대한 순종입니다. 산돌이신 예수께 믿음으로 나아가십시다. 그것만이 내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으로부터 나의 부족함을 인정받고 승리하는 영적 비결임을 명심하고 그 주님께 내 인생을 맡기십시다. 주님은 건축자들이 버린 돌 취급을 받으셨지만 머릿돌이 되신 저와 여러분의 유일한 생명의 근원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