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 사역

제목2016.03.27 셀 사역2024-04-22 16:11
작성자 Level 10

 

얼음 깨기 (WELCOME)
성경의 본문(텍스트)와 상황(콘텍스트)이 너무나도 아름답게 일치된 경험이 있으면 함께 나누기.  

 
경배와 찬양 (WORSHOP)

● 주님께 영광 다시 사신 주 (찬송가 165장)
● 주 하나님 독생자 예수 (복음성가)
  

 
말씀읽기와 적용 (WORD)
● 제목 : 오늘, 나의 부활을 경험하라
● 본문 : 요한복음 11:17-26
1) 마르다가 예수님께 대하여 갖고 있었던 개인적인 섭섭함을 두 가지로 말해보자.
● 요한복음 11:21-

● 요한복음 11:22-  

2) 예수께서 마르다에게 요구한 부활 신앙의 요체는 무엇인가?
● 요한복음 11:25-26절 참고

● 설교 제목 참고  

3) 2016년에 주님의 부활을 연결하기 위해 해야 하는 신앙적 내용들을 말해보자.
● 예 1)
● 예 2)
● 예 3)  

 
사역하기 (WORK)
1) 오순절 릴레이 기도회
  ① 기간: 3월 28일(월)~ 5월 14일(토)까지
  ② 시간: 오전 9시~ 오후 9시까지 (1시간씩 담당)
    (기도를 마친 후 다음 지체에게 문자 남기기)
  ③ 장소: 교회 혹은 개인의 상황에 따라
2) 대심방 일정 스케쥴 조정 및 확정하기
3) 임직 예배를 위한 준비사항 점검하기
4) 4월의 표어 실천하기
5) 치유기도: 최정희 집사, 안동철 형제 등등 환우들을 위한 중보
6) 헌금
7) 광고
8) 폐회: 주기도
  

 
설교요약 (SUMMARY)
2016년 3월 27일 부활주일 설교

본문 : 요한복음 11:17-26
제목 : 오늘, 나의 부활을 경험하라

약 2,000년 전, 베다니라는 지역에 살고 있었던 예수님의 친구인 나사로 가족을 중심으로 일어난 일이 2016년 오늘 나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지 살펴봅시다.

주님은 베다니에 살고 있었던 친구인 나사로를 특별히 사랑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요 11:5절). 이렇게 주님의 특별한 은혜를 받고 있는 나사로의 가정에 기둥 같은 존재이며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에게 있어서는 아버지와 같은 오라버니 나사로가 중병이 들었고 결국은 숨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주목할 것은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에게 나사로의 중병이 별로 걱정스럽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살고 있는 베다니에서 하루 길도 안 되는 곳인 요단 강 근처에 예수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즉 주님 만 오신다면 오라버니의 병 정도는 금방 고칠 수 있다는 것을 여동생들이 믿었다는 의미입니다. 여동생들은 오라버니가 중병에 걸려 있었지만 당황하지 않고 사람들을 보내서 예수님의 방문을 요청했고 당연히 예수께서 전갈을 받으면 일사천리로 자기들에게 달려오셔서 오라비를 고쳐줄 것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상황은 달랐습니다. 예수께서 전갈을 받고 거절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1:4-7절에서 오빠는 죽을병에 걸린 것이 아니니 호들갑떨지 말라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그리고는 예수께서 이틀을 더 요단에서 머무셨고 그리고 난 뒤에는 베다니로 들어가신 것이 아니라 요단으로 동선을 옮기셨습니다(본문 17절).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 예수께서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의 급한 요청을 받으셨지만 그 요청을 받으신 이후 4일이 지나서야 베다니에 도착을 하셨는데 나사로는 이미 죽어 장사를 지낸 지 4일이 된 상태였습니다.
마르다가 보낸 사람들이 예수께서 계신 곳에 오는 데 걸린 시간 하루, 예수께서 요단에 더 머무신 시간 하루, 그리고 베다니로 예수께서 가신 시간 하루 총 4일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자매들의 요청을 받은 지 96시간 만에 베다니에 들어오신 셈이 된 것입니다.
4일 만에 베다니에 들어온 예수를 마르다가 만났습니다(본문 21-22절).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마르다의 이 고백을 그냥 문자 그대로 주님이 오라버니 옆에 계셨더라면 이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믿음이 그녀에게 있었던 것에 대한 토로라고 해석하는 것이 통례입니다. 그러나 이 구절 속에 마르다의 서운함이 보입니다. “왜 이제 왔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들을 사랑하는 것이 맞느냐는 것입니다. 당신 때문에 내 오라비가 죽었으니 지금이라도 책임을 지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베다니에 들어오셨는데 마르다만 마중을 나갔지 마리아는 보이지 않습니다. 아마도 마리아는 자신이 예수님께 했던 행동들을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추측됩니다(향유를 붓고 자신의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김). 세속적 관점으로 이해하자면 충분히 두 자매의 서운함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두 자매의 심리적인 섭섭함을 모르실리 없습니다. 마리아의 냉대와 마르다의 요청을 받으신 주님은 마르다에게 이윽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23절) 이렇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선포를 들은 마르다가 오늘 23절에서 이렇게 막연한 고백을 합니다.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그러자 주님이 마르다에게 다시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이 본문을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번역으로 보면 “마지막 날까지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지금 이 순간에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겠고, 누구든지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네가 이것을 믿느냐”입니다.
유진 피터슨은 지금 마르다에게 예수께서 당신이 부활이라고 선포하신 대명제가 담고 있는 가장 중요한 레마는 주님의 부활은 과거의 시제로부터 현재의 시제까지 전혀 변함이 없이 현재진행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교훈입니다. 다시 말해 주님의 부활은 진행 중인 역사 그 자체라는 강력한 도전입니다. 주님의 이 말씀을 결코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다. 주후 33년 즈음의 어느 날, 팔레스타인의 척박한 땅이었던 예루살렘 근처의 해골의 골짜기라고 이름 지어진 스산한 골고다 언덕에서 피와 물을 다 쏟으시고 영혼이 돌아가셨던 예수님께서 2016년의 어떤 한 부류들의 영역에서 여전히 지금도 살아나고 계신다는 이 사실을 말입니다. 믿을 것을 믿으라고 항변하는 사람들에게 주님의 부활 사건은 자연과학적인 사건이 아니기에 또한 과학적 논리와 방법으로 증명하라는 것은 그들의 요구사항의 시작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논쟁을 피합니다. 신앙의 사건은 논리적인 것을 뛰어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후 1세기 초반에 있었던 주님의 부활 사건을 2016년의 현재적 사건으로 해석하려는 것은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믿습니다.’를 강요함으로 믿음을 종용하지는 않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현재진행의 사건으로 인정하라고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근거가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부활이 오늘 우리에게 여전히 살아서 움직이는 부활로 믿으라고 종용하는 것을 상황중심적인 해석으로 접근하면, ● 주님께서는 오늘도 나를 매일 살아나게 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열왕기상 1:4절 말씀은 다윗의 거듭남을 말해 주는 성경구절입니다. “이 처녀는 심히 아름다워 그가 왕을 받들어 시중들었으나 왕이 잠자리는 같이 하지 아니하였더라” 이전 그의 인생은 참 부적절했던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나 열왕기상 1장의 아비삭에 대한 기록을 통해 역사가는 다윗이 비록 한 순간이기는 하지만 자신의 정욕을 채우기 위해 치명적인 범죄를 지었던 그래서 영적으로 싸늘하게 죽었던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으로의 회귀를 통해 이후, 그 스스로 다시 영적 죽음에서 부활한 인생을 마지막에 감당했음을 열왕기 기자는 후대의 독자들인 우리에게 보고해 주고 있습니다. 젊은 시절, 영적으로 싸늘하게 죽어 있었던 다윗이 말년에 분명히 새롭게 살아나는 인생을 살았다는 사실은 범죄 한 다윗을 다시 살리신 주군이신 하나님은 오늘 우리도 다시 살리셔서 당신의 도구로 사용하시는 나의 하나님이심을 역설하기 위해서입니다.
마태복음 4장과 요한복음 21장에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해주시겠다고 주님은 베드로에게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사람 낚는 어부의 일을 포기하고 갈릴리 디베랴로 가서 그가 버렸던 배를 다시 타며 고기를 낚는 어부의 모습으로 돌아갔습니다. 베드로에게 있어서 주님에게서 멀찍이 있는 것과 하나님 곁으로의 그 중간 지대에 있던 것이 다름 아닌 배였습니다. 배를 놓고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한 우리는 여전히 경계선 그리스도인으로 살 수 밖에 없는 기회주의자가 됩니다. 그렇지 않으려면 타고 있던 배, 이용하던 배, 그것을 불 질러야 합니다. 타고 다시 옛날로 돌아갈 수 있는 배를 성령의 불로 소멸시키는 것이야 말로 내가 경계선 신앙인으로 전락되지 않는 방법인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3,000년 전의 다윗의 이야기,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의 베드로의 이야기를 통해서 주님은 그 때의 주님이 아니라 2016년의 주님으로 여전히 살아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이 일이 가능한 것은 주님이 무덤을 보전하며 누워 계신 것이 아니고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부활하신 주님은 오늘도 살아계심으로 오늘 2016년 말씀으로 우리에게 권고하심으로 너도 계속해서 부활신앙으로 승리하라고 강력하게 요청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부활하셔서 살아계심으로 이 일이 일어나는 것만큼 확실한 부활의 증거가 없습니다. 내가 오늘도 수없이 많은 세상의 질고와 유혹과 공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쓰러지지 않고 이렇게 하나님의 사람으로 견고히 설 수 있었던 것이 그 증거입니다. 만에 하나 주님이 부활하시지 못했다면 여기에 이렇게 존재할 수 있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데 골고다 언덕에서 죽으신 주님께서 사망권세를 이기고 다시 사셔서 오늘, 지금 바로 여기에서도 살아계셔서 나와 함께 하고 계신다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이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바울은 부활 신앙에서 완전히 와해된 한심한 고린도교회의 명목적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이렇게 선포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아니하셨으리라”(
고린도전서 15:12-15절).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일은 많은 일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을 날마다 당신의 현장에서 느끼고 만나는 것입니다. 마크 부캐년 목사가 ‘열렬함’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목회자 생활을 하면서 새로운 투자를 할 테니 기도해달라는 신자는 수없이 보았지만, 올바른 신앙생활의 지침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달라고 진지하게 요청하는 신자들을 만나보지 못했다.” 이 지경이 된 까닭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이 오늘, 나에게 현재의 현장에서 단절되었기 때문입니다.
2000년 전에 이루신 주님의 부활을 2016년의 부활로 잇고 있는 사람은 부활의 주님을 삶에서 만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2,000년 전에 있었던 주님의 부활과 그의 능력은 2016년 오늘도 여전히 ON-AIR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