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바람 편지 / 이해인
산에서 불어오는 가을바람은 단풍나무 빛깔입니다.
어떻게 모든 사람을 골고루 다 사랑할 수 있을까 고민에 빠져 있는 나에게 사랑에 빠진 소녀처럼 붉은 뺨을 지닌 바람이 내게 와서 말합니다.
'무어든 너무 잘하겠다고 욕심부리지 마세요. 사람들의 눈을 잘 들여다보면 그가 원하는 것을 알 수 있고 사랑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답니다!'
그래서 이 가을엔 '사랑한다'는 말을 함부로 쓰지 않고 아껴두기로 합니다. 나를 의심하고 오해하고 힘들게 하는 한 사람에게 성을 내고 변명하기 보다 침묵 속에서 그를 위해 기도하며 끝까지 우정과 신뢰의 눈길을 보낼 수 있을 때, 진정 용서하기 힘들었던 한 사람을 내가 환히 웃게 해 주고 그에게 화홰의 악수를 청할 수 있을 때 나는 비로소 사랑이란 단어를 자신 있게 쓸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제 내가 사랑하는 당신에게서 불어오는 가을바람은 어떤 빛깔일까요? 담백한 물빛? 은은한 달빛? 아니면 향기롭게 익어가는 탱자빛? 터질듯한 석류빛? 무슨 빛깔이라도 좋으니 아름답게 가꾸시고 행복하시고 제게도 좀 보내주실래요?
우리 모두 바람 속에 좀 더 넓어지고 좀 더 깊어져서 이 가을이 끝날 때 쯤은 즐거움만 있겠지요..
<이해인 수녀님의 "가을바람 편지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