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인앨범

제목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2024-06-04 09:59
작성자 Level 10
이경규의 힐링캠프 중 홍석천편을 보았습니다

프로그램 말미에 홍석천씨가 신에거도 버림받는 사람인가라고 독백하였습니다

과연 동성애자는 하나님께 버림 받았을까요?
그도 어렸을 땐  교회를 다닌거 같습니다

그가 커밍아웃을 하고 교회에  갔을때  그는 말합니다.
주변 사람들의 눈초리가
쟤는 왜 여기 왔지??라는 눈이었다고

동성애가 성경에 죄라고 분명히 나와있지만
과연 예수님께선 그를 버리셨을까요??

간음한 여인을 안으시며 너희 중 죄없는 사람만 돌로 치라 말씀하셨던 그분이??

간음한 여인에서 동성애자로 바뀌었다고??

제가 믿는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지
편협과 아집과 포용력없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홍석천씨가 교회에 발을 내딛었을때
하나님이 그를 드럽고 불결하게 보셨을꺼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누구인가

하나님의 사역은 우리들의 인간적인 마음이 담긴 눈초리에도 제한되실 수 있음을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신 주님의 말씀을 이 밤 다시한번 묵상하게 되는것 같습니다


이강덕 13-02-22 17:23
아들, 잘 지내지?
글 잘 읽었다.
제일 먼저 성경 해석의 스펙트럼을 고정화된 틀로 보지 않고 오늘의 시대에 맞게 해석하려고 한 점에 대해서 아빠가 대견하게 생각한다. 그리고 앞으로 계속해서 성경을 읽고 현장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하여 고민하고 또 고민하는 삶을 살기를 기대한다. 강상중 교수가 ‘고민하는 힘’에서 인용한 ‘호머 사케르’의 나신(裸身)은 힘있는 자들에 어쩔 수 없이 유린되어 불가피하데 당하는 경우도 있지만 반대로 고민하지 않을 때 일어나는 비극 중에 하나이기에 아빠는 아들이 계속해서 그렇게 사유함의 투쟁이 있기를 기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아빠가 아들에게 댓글을 쓰는 이유가 있단다. 그것은 일부분의 편협된 성찰과 사유함을 통해 한 사건을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이다. 특히 목회자로 헌신한 사람은 더 더욱 그렇다.
홍석천을 이야기했지?
그가 호머인데 그를 교회에서 포용하는 것이 폭넓은 의미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며 예수께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통해 하셨던 ‘너도 가서 그와 같이 행하라’는 촌철살인에 대한 순종함이 아니겠느냐? 고 말이다. 
아빠는 생각이 조금 다르단다. 성경에서 동성애를 다루고 있는 이야기는 여러 군데에 존재한다. 제일 먼저 떠올리는 것이 아마도 소돔과 고모라의 이야기이지 않겠니? 소돔과 고모라의 상황을 보면서 동성애는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죄악임을 통상적으로 인정하는 것은 보수나 진보의 영역에서 거의 일치하는 공통분모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동성애에 대한 이해를 그렇게 일회적으로 해석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빠도 반대한다. 그 이유는 동성애에 대한 성경 기록의 삶의 자리(Sitz im Leben)는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바울이 말하고 있는 로마서의 기록이 대표적인 예일 것 같다.
아들도 잘 아는 것처럼 바울이 로마서 1:27절에서 선명히 기록하고 있는 기록에 대한 해석은 주목할 만하다.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
바울의 선언은 동성애자들에 대한 비판의 날을 세운 것임에 틀림이 없다. 그래서 아빠느 도리어 바울을 존경하지만 2의 아쉬움을 이 대목에서 항상 느낀단다. 바울이 이렇게 날선 모습으로 비판하고 있는 AD 1세기의 로마라는 삶의 자리는 여성들에 대한 최소한의 권리가 보장되지 않던 시대였단다. 이런 이유로 여성들은 물건취급을 받고 단지 후세를 생산하는 기계처럼 여겼고 남성들의 오만한 편력들이 상당히 심해 아내가 아닌 다른 여자들을 탐닉했고 여성 인권이 무차별적으로 짓밟히던 시대였기에 여성들은 이에 대한 방편으로 성적인 해소를 위해 동성애라는 방법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시기였단다. 로마서에 기록된 레즈비언에 대한 해석은 그렇기에 접근 방법이 소돔성의 호머나 레즈비언들의 접근 방법과는 분명히 구별되어야 한다고 아빠는 믿는다.
사랑하는 아들.
신학대학 2학년의 신학적인 레벨을 갖고 있는 아들에게 너무 큰 신학적 담론들을 이해하기를 바라는 것 같아 아빠가 미안하다.
그러나 얼굴 책이나 교회 홈페이지는 공개하는 SNS 이고 또 교회의 얼굴이나 보니 아빠가 교통정리는 해야 한다는 사명감에 급하게 글을 쓰는 것을 이해해라.
로마서의 삶의 자리에 있었던 레즈비언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심정은 아마도 아들이 생각하는 바로 그런 사랑의 하나님이실 것이라고 아빠도 믿는다.
그러나 아들아, 구별하자.
아무리 동성애자들이 성적인 차별을 받는 소수의 소외된 그룹이라고 이해를 해도 그들의 성적인 태도를 인정하는 것은 바른 기독인의 모습은 아니라고 아빠는 생각한다. 이유야 어떻든 그들을 이해의 대상으로 품어주어야 하는 과정은 필요할지는 모르지만 그 상태를 즐기고 엔조이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를 정면으로 부인하며 심지어는 도전하는 죄악이기에 궁극적으로 그들은 회개하도록 도와주어야 할 대상들이라고 아빠는 해석한다. 시대가 하수선하여 아빠의 이 해석에 대하여 반론하는 부류들도 상당수 많을 것이지만 적어도 아빠는 아들이 다양한 신학적 스펙트럼의 사유는 열어놓되 복음적인 결론을 도출하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빠는 개인적으로 홍석천이라는 사람을 잘 모르지만 그의 라이프스타일이 과연 소외되고 보호받아야 할 성적 소수자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섭리를 무시하는 동성애자인가에 대한 시니컬한 비판이 전제된 뒤에 그에 대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포용을 결정해도 늦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되어 한 마디 적어 보냈다.
말이 길어져 또 어쩔 수 없이 설교처럼 되었구나.
이제 제대 날짜가 눈으로 그려지고 있는 아들이 남은 군 생활이 정말로 보람되고 기쁘기를 중보한다.
온 맘 다해 아들을 사랑하고 응원한다. 제천에서 아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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