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시골 철저한 유교 가정에서 태어 났다. 경북대 부속 간호학교를 가게 되면서 서울에서 피난와서 대구에 정착한 큰 언니를 따라 교회에 나갔다. 또한 학교에 채플시간이 있어 금요일 아침 7시에 선교사님이 오셔서 예배를 인도하셨다. 룸메이트와 함께 그가 다니는 교회에 나갔다. 후에는 믿음의 친구들 7명이 클럽으로 활약했으며 졸업 후에는 3년이 넘도록 십일조를 모아 회원 대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었다.(후에 잘못되었음을 알았다.) 저의 큰 언니, 둘째 언니가 교회의 직분자들이었으며 나를 위한 중보기도가 있어서 마음 의지하며 힘든 가정 생활에서 위로 받으며 살았고 32년전 둘째 언니가 위암으로 소천하게 되었고 후에 나는 심한 우울증에 시달렸다. 언니는 15년전 장결핵을 장암으로 오진하여 개복했지만 그대로 닫았었다. 근 1년 동안을 물만 마셔도 토했고 이제는 못 산다고 식구와 형제들이 다 찾아 갔었다. 나도 둘째를 분만하고 한달도 안된 몸으로 기차와 버스를 타고 새벽부터 찾아가느라 힘들었고 밤 늦게야 집에 도착했었다. 언니는 정말 힘든 상태였다. 많이 울었고 말도 제대로 되지 않는 상태였다. 새벽에는 장독대까지 기어나가 히스기야의 생명을 15년 연장시킨 하나님, 15년을 연장시켜 달라고 간절히 기도한다고 했다. (그후 인천 기독병원에서 수술 당시 장폐쇄-장꼬임- 수술 받고 완치 되었다.) 미국에 이민간 큰 언니께 이 사실을 편지했다. 답장에 그때 동생이 흰옷 입고 하늘로 날아 오르며 하늘나라에서 만나자고 소리쳤다고 했다. 온 우주를 자유자재로 운행하시는 성령님. 소름이 끼치는 오한을 느끼며 하나님을 깊이 영접했다. 나는 그렇게 언니들과 믿음의 교제를 이어갔다. 81년, 6개월의 연세대에서의 교육을 마치고 보건진료소로 근무지를 옮겼다. 그때만 해도 농촌 사람들의 의료혜택의 부재로 인한 어려움을 보았기에 저들을 향한 마음이 간절했다. 주로 보건교육을 위주로 했으며 스탠딩 처방을 할 뿐인데 기도 함으로 저들에게 투약할 때 저들을 잘 치유해 주셨다. 친구들을 통해 헌 옷, 담요 나누기 등 봉사 사역을 감당하고 기회 있을 때마다 복음을 전했다. 여기까지. 이제까지 인도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앞으로의 나의 삶도 주님께서 철저하게 인도하실 것을 믿으며 감사드린다.
-이완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