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9월 21일 수요 저녁 기도회 (창세기 일흔 여섯 번째 강해) 본문: 창세기 21:9-21 제목: 하나님의 사랑은 보편적입니다. 추석 전, 장인어른과 장모님의 유해가 모셔져 있는 국립 현충원을 다녀왔습니다. 참배를 마치고 나와서 마침 차를 주차한 장소가 장군 묘역 앞이었기에 그리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자연스럽게 장군 묘역을 눈으로 스캔하게 되었는데 묘역의 크기나 시설 자체가 병사들의 묘역과는 족히 비교되지 않는 웅대함이 엿 보였습니다. 장군과 장병은 살아서 뿐만이 아니라 죽어서도 그런 차별됨이 있다는 것을 여지없이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한편으로 보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죽어서까지 장군 묘역과 장병 묘역을 차이 나게 조성한 것을 보면서 왜 높은 자리에 올라가야 하고, 출세를 해야 하는지 세속적 관점은 언제나 동일한 공식을 보여주는 것 같아 조금은 씁쓸했습니다. 세속적인 영역은 언제나 차등이 존재합니다. 우등한 사람이 있으면 열등한 사람이 있는 영역이 세상입니다. 잘 사는 사람이 있으면 못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 있으면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는 공간이 세상입니다. 이런 것을 엄격하게 구분하는 곳이 세상의 나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통치하는 하나님은 차등을 인정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굳건히 믿었던 바울은 이렇게 강력한 어조로 선포하였던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28절입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고린도전서 1:11절입니다. “그러나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 이런 관점에서 오늘 본문도 이해해야 하고 공부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이삭이 젖을 뗀 뒤이니까 약 3-4세가 되었을 때이고, 이스마엘의 나이는 17-18세 즈음으로 추측이 가능합니다. 본문 9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아들이 이삭을 놀리는지라” 이스마엘이 이삭을 어떻게 놀렸을까요? ‘놀리는지라’는 히브리어 ‘짜하크’의 번역입니다. 출애굽기 32장을 보면 이스라엘 신앙공동체가 시내 산에서 내려오기를 더디 하는 모세를 원망하며 집단 반기를 들고 금송아지를 만드는 기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론을 압박하여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은 뒤에 패역한 이스라엘이 자행한 일탈을 출애굽기 기자는 이렇게 보고합니다. 출애굽기 32:6절입니다. “이튿날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 번제를 드리며 화목제를 드리고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더라” 여기에 기록된 ‘뛰놀더라’가 바로 ‘짜하크’입니다. 차준희 교수는 이 짜헤크(짜하크)를 이렇게 주석해 놓았습니다. “송아지라는 표현은 ‘애송이’라는 경멸의 의미가 담겨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일제히 소리쳤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다. 그들은 송아지와 야웨 하나님을 동일시하고 있다.”(차준희, “출애굽기 다시 보기”, 315.) 이스라엘 신앙공동체가 자행한 심각한 범죄는 하나님을 송아지로 급전직하 시킨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모멸한 뒤에 패역한 이스라엘 공동체는 하나님 앞에서 ‘짜헤크’를 하며 하나님을 희롱한 것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이스마엘이 이삭이 3-4살이 되어 젖을 떼었을 때 그를 희롱한 태도가 바로 짜헤크 즉 업신여긴 것입니다. 일부 구약학자들은 아버지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젖을 떼는 그날 큰 잔치를 베풀었을 때 그 장소에서 내가 이 집의 장남이라고 소리를 치며 난동을 부렸던 것을 기록한 것이 9절에 기록된 희롱사건이라고 해석하기도 하지만 조금은 과유불급인 듯합니다. 분명한 사실은 본문은 이스마엘이 이삭에게 도전한 첫 번째 기사인 것만큼은 분명하다는 점입니다. 이 광경을 사라가 본 것입니다. 본문 10절입니다. “그가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 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므로” 사라가 분노한 것입니다. 사라가 남편에게 요구한 것은 가정에서 내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도무지 같이 있을 수 없는 존재라고 본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본처의 요구로 인해 고통스러워합니다.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이렇게 근심하고 있는 아브라함의 어려움에 개입하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본문 11-13절을 보면 하나님은 사라의 요청대로 하라고 아브라함에 명하십니다. 단 하나님이 명하시면서 아브라함에 약속하신 것이 있습니다. 본문 13절입니다 “그러나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신지라” 이스마엘의 계보도 내가 함께 할 것이며 그를 통하여 한 민족을 이루게 할 것이라는 약속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이 약속을 들은 아브라함은 이스마엘과 하갈을 떠나보냅니다. 떡과 물을 하갈에게 매어줍니다. 본문은 한 부대에 이것을 담았다고 적시합니다. 한 부대라면 약 12리터의 물을 담을 수 있습니다. 어찌 보면 대단히 매정한 것처럼 보이는 하갈과의 이별 사건에 대해 여기까지만 성경이 증언하고 있기에 이 점에 대한 추측이나 부연 설명이 쉽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어떻게 아들까지 낳은 후처에게 이 정도의 사례밖에 할 수 없었단 말인가 하고 분노할 수 있지만 성경적인 내증의 보고가 빈약하니 어찌할 수 없는 일입니다. 다만 영적으로 추측하기로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그 약속에 대한 굳건한 신뢰를 아브라함이 갖고 있었기에 하갈과 이스마엘에 대한 앞날을 하나님이 책임지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고 에두르는 수밖에 없습니다. 하갈은 사라에게 쫓겨 광야로 아들과 함께 광야로 나갔습니다. 첫 번째 내 쫓겼을 때의 동선이었던 이집트 쪽으로 이동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 모자(母子)는 며칠이 안 되어 물이 떨어지고 양식도 고갈되는 운명에 처하게 되었음을 보고합니다. 본문 16-21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이르되 아이가 죽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 하고 화살 한 바탕 거리 떨어져 마주 앉아 바라보며 소리 내어 우니 하나님이 그 어린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으므로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하갈을 불러 이르시되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저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그가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시니라” 너무 당연한 모성애가 담보된 절규가 하갈에게서 터져 나왔습니다. 아들이 죽게 된 것에 대한 고통을 쏟아낸 것입니다. 하갈이 이 절규를 쏟아내자 하나님의 사자가 동원되어 개입합니다. 하나님의 사자는 하갈의 고통을 하나님께서 들으셨고 아이가 죽지 않을 것이며, 네 아들을 통해 큰 민족을 이룰 것이라는 기존의 약속(창 16:10)에 대해 재확인하십니다. 이윽고 하나님이 준비하신 프로젝트를 하갈과 이스마엘에게 행하시는 장면이 본문 19-21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히셨으므로 샘물을 보고 가서 가죽부대에 물을 채워다가 그 아이에게 마시게 하였더라 하나님이 그 아이와 함께 계시매 그가 장성하여 광야에서 거주하며 활 쏘는 자가 되었더니 그가 바란 광야에 거주할 때에 그의 어머니가 그를 위하여 애굽 땅에서 아내를 얻어 주었더라” 하갈과 이스마엘에게 보여준 샘물은 ‘맹세의 샘’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세바 근처의 샘물이었는데 훗날 이 샘물의 이름을 기리기 위해 후대의 자손들이 하나님이 하갈에게 보이게 한 이 샘물을 기념하여 브엘세바라고 명명하게 됩니다. 주목할 구절은 20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그 아이와 함께 계시매 그가 장성하여 광야에서 거주하며 활 쏘는 자가 되었더니” 우리는 이스마엘의 후손들이 이스라엘과는 종교적 특성에 있어서 정반대에 있는 아랍인들임을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이스마엘의 후손들은 활 쏘는 자의 후손들로 전락해서 싸우기를 좋아하는 민족이라고 평가합니다. 종교사적인 측면에서 이삭의 후손들을 지속적으로 힘들게 했던 후손들이 이스마엘의 후손들이기에 그들에게 후한 점수를 주지 않는 고정된 의식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물론 이스마엘의 자손들은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 오른 편 계보가 아니라 왼편 계보에 위치해 있습니다. 이것을 저 또한 인정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아주 신중하게 이런 질문을 던져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마엘을 버리셨는가? 우리는 그 동안, 수없이 반복해 온 학습에 의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지, 아랍 민족의 하나님이 아니시라는 메시지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이렇게 편 가르기 식의 내용에 익숙해져 있는 이유는 아마도 바울에게 길들여져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갈라디아교회의 신자들에게 편지했던 한 구절을 소개하겠습니다. 조금 길지만 갈라디아서 4:22-28절을 읽겠습니다. “기록된바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여종에게서, 하나는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며 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갈이라 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니 그가 그 자녀들과 더불어 종노릇 하고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기록된바 잉태하지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산고를 모르는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이 구절에 대하여 깊숙한 고찰이 없이 그냥 목회자들이 쉽게 고지한 내용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갈라디아 교회는 거짓 율법 교사들이 침투하여 예수그리스도께서 허락하신 복음을 왜곡하며 할례 동참에 대해 역설하는 그릇된 거짓 복음이 만연했던 교회였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이 거짓 복음으로 흔들리고 있는 갈라디아 교회를 바로 잡기 위해 강력한 메시지가 필요했고 그 대안으로 사라와 하갈의 구약적인 내증을 실례로 제시한 것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복음을 왜곡하고 있는 율법주의에 대하여 경고하며 복음의 본질을 흔들지 말라고 강력한 메시지를 보낸 바울조차도 율법폐기를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로마서 7:7-8절을 이렇게 증언합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라” 바울은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해주는 가장 강력한 도구임을 밝힙니다. 율법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거짓 복음을 경계한 것이지 율법을 폐기하거나 지키지 말 것을 제정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은 율법에 대한 존중을 말한 최고의 압권입니다. 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선한 선생님이 내가 영생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어찌 보면 영생의 자격에 대해 물은 느낌입니다. 청년의 질문에 대해 주님이 제일 먼저 언급하신 내용이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19:17절을 주목하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어디 이뿐입니까? 요한복음 14:15절을 대명제입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왜 이 구절들을 소개할까요? 바울의 설파를 갖고 하갈에 대하여 구원 받지 못한 존재, 구원을 받아서는 안 되는 존재 등등 정말로 말이 안 되는 종교적 폭력을 행하지 말라는 권고 때문입니다. 하갈과 그의 아들 이스마엘 역시 하나님이 함께 하신 귀한 존재들입니다. 다시 본문 20절입니다. “하나님이 그 아이와 함께 계시매 그가 장성하여 광야에서 거주하며 활 쏘는 자가 되었더니” 예언자 이사야의 글을 보면 참 은혜가 되는 구절이 등장합니다. 이사야 19:25절입니다.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복 주시며 이르시되 내 백성 애굽이여, 내 손으로 지은 앗수르여, 나의 기업 이스라엘이여, 복이 있을지어다 하실 것임이라” 애굽을 복 주시는 하나님, 내 손으로 지었다는 앗수르를 이스라엘과 동급으로 여기심을 약속하셨습니다. 은혜 중에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어느 한 편을 일방적으로 편드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보편적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편 가르기를 하지 않으십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기를 바라며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은 보편적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이삭의 하나님이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스마엘의 하나님이시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수요 예배에 참여한 교우 여러분! 오늘 설교의 레마를 심비에 새기십시다. ※ 하나님의 사랑은 보편적 사랑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