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창세기 18:16-21
제목: 주님은 듣고 계신다.
민수기 14:28절을 말씀을 읽어 드리며 설교를 시작하겠습니다.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이 구절에 대한 세밀한 해석을 나누겠습니다.
민수기 13장은 우리에게 너무 잘 알려진 가나안 정탐에 대한 보고기사입니다.
가나안을 정탐하고 온 12지파의 지휘관 된 자, 한 사람씩을 선발하여 가나안 정탐에 나섰습니다.
하지만 12명의 지파 리더 중에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10명이 돌아와 열거한 보고는 대단히 부정적이었습니다.
민수기 13:31-33절을 나누어 보겠습니다.
“그와 함께 올라갔던 사람들은 이르되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하고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정탐한 땅을 악평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이 보고를 받은 이스라엘 공동체는 집단적인 멘붕에 빠지게 됩니다.
정탐꾼들의 보고를 받은 이스라엘 회중 공동체의 반응을 봅니다.
이어지는 민수기 14:1-4절입니다.
“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백성이 밤새도록 통곡하였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려 하는가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이에 서로 말하되 우리가 한 지휘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하매”
애굽으로 돌아가자는 중론이었습니다.
그런데 애굽으로 돌아가자는 중론보다 더 심각한 발언이 보고됩니다.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극단의 발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께서 그토록 강력하게 천명하셨던 가나안 입성이라는 은혜에 대하여 조금의 믿음도 갖고 있지 않은 자들을 향해 분노하셨습니다.
그리고 내리신 심판은 그들의 입에서 나온 말대로 시행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 시행의 메시지가 앞에서 읽어드린 구절입니다.
민수기 14:26-30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에게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 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너희 시체가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라 너희 중에서 이십 세 이상으로서 계수된 자 곧 나를 원망한 자 전부가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내가 맹세하여 너희에게 살게 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지금까지 우리가 너무 잘 아는 말씀을 상기 차원에서 다시 한 번 나누었습니다.
하나님은 식언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시기도 하지만, 더불어 우리들이 행한 말에 대해서도 가볍게 여기시지 않는 하나님임을 증언해 주는 대표적 메시지가 민수기 14장 메시지입니다.
이것을 전제하여 본문을 들여다보십시다.
아브라함의 장막을 찾아오신 하나님과 두 천사 이야기를 지난 주 수요일에 나누었습니다.
물론 하나님과 하나님을 보좌하기 위한 두 천사들이 아브라함의 장막을 찾은 이유는 이삭 탄생의 고지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목적은 또 하나가 있었습니다.
소돔에 대한 상황 파악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계획을 아브라함에 알리셨습니다.
본문 17-21절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알려준 계획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되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무거우니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 하노라”
아브라함의 가계도를 통한 하나님의 축복하심을 다시 재확인을 하신 뒤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당신이 갖고 계신 의미 있는 미션 하나를 귀띔해 줍니다.
소돔에 대한 미션이었습니다.
주목할 내용은 20절 보고입니다.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되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무거우니”
이 구절을 묵상하다가 왜 갑자기 소돔과 고모라가 튀어 나왔을까, 질문해 보았습니다.
그러다가 다가온 구절이 창세기 13:13절이었습니다.
“소돔 사람은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었더라”
롯이 아브라함과 장막을 유리하면서 선택했던 장소를 소돔이라 했습니다.
너무 비옥한 땅으로 정평이 나 있었기에 롯이 약삭빠르게 선택한 지역이었던 소돔에 대하여 창세기 기자가 아주 의미 있는 여운을 남겼던 내용이 바로 13:13절입니다.
“소돔 사람은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었더라”
‘하타임 므오드’ 즉 ‘큰 죄인들’이라는 표현은 구약성경 중에 여기에만 기록되어 있는 문구입니다.
이 표현이 의미한 것이 무엇일까?
고든 웬함은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소돔의 죄악이 매우 심각함을 함축한다. 더불어 이 구절은 간접적으로 그 도시의 장래 운명을 나타내며 롯의 선택이 어리석었다는 것을 강조한다.” (고든 웬함, “WBC 사사기 주석”, 522.)
다시 말하면 소돔의 죄악상이 아브라함의 나이 99세에 이르러 급격히 악해진 상태가 아니라, 이미 악의 진원지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창세기의 내적 보고입니다.
주목할 것은 이미 소돔의 악행과 패역함은 이렇게 보편화되어 있었다는 점인데, 하나님과 그의 천사들이 소돔의 진짜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하림(下臨)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확실한 성경의 내증이 없어 단언해서 말하기가 어려운 대목이지만 충분한 추측과 개연성은 짐작해 볼만합니다.
두 가지를 짐작해 봅니다.
⓵ 하나님은 주변 정황에 대한 부르짖음에 대해 듣고 계셨다는 점입니다.
롯이 소돔에 거주했다고 했습니다.
반면 아브라함은 그 반대의 척박한 지역이었던 헤브론 지역에서 정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고대 근동의 지역적 개념은 씨족적인 개념이었고, 그리 넓은 공간적 개념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소돔과 연관되어 있는 주변의 사람들이 편만하게 퍼져 있었을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 중에는 소돔의 악으로 인해 적지 않은 고통과 어려움을 당하는 자들도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본문 21절에서 말한 그대로 ‘내게 들린 부르짖음’이라는 하나님의 성토는 바로 여기에서 나왔을 것이라는 해석입니다.
⓶ 소돔의 상태가 하나님의 방향성과는 전혀 다르게 흘러가고 있다는 가능성이 보입니다.
다시 롯의 이야기를 나누어 보겠습니다.
롯이 엘람 왕 그돌라오멜에게 볼모로 끌려갔을 때 아브라함이 그를 구출하고 돌아왔다고 했습니다.
그때 소돔 왕 베라가 살렘 왕 멜기세덱과 함께 아브라함을 영접하러 나온 장면을 기억할 것입니다.
당시 소돔왕의 반응을 복기해 보십시다.
창세기 14:21절입니다.
“소돔 왕이 아브람에게 이르되 사람은 내게 보내고 물품은 네가 가지라”
이 구절에서 언급된 ‘물품’이라는 히브리어 단어 ‘레쿠쉬’의 문자적인 의미는 지극히 세속적인 이익과 부와 물질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송병현 교수가 이 ‘레쿠쉬’를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소돔 왕이 아브라함에게 주려고 했던 ‘레쿠쉬’는 억울한 자의 눈물과 피로 얼룩진 가증한 물건이었다. 소돔은 죄악으로 가득 차 있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심판을 받아 멸망한 도시였다. 그렇다면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소유물 역시 의롭거나 정결하지 못할 것이다.” (송병현, 엑스포지멘터리 주석-창세기, 289.)
사정이 이 정도라면 소돔이 얼마나 하나님의 생각과 다른 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는지를 충분히 짐작하게 해주는 증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상의 본문 해석을 통해 우리는 아주 중요한 영적 교훈을 받을 수 있습니다.
※ 하나님은 억울한 자들의 억울함을 신원해 주시는 분이기에 그리스도인들은 선하게 살아야 합니다.
신원(伸冤)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펼 伸과 원통할 寃이 합쳐진 단어입니다.
단어를 풀자면 원통한 일을 풀어준다는 뜻의 단어가 신원입니다,
하나님은 신원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억울함을 당한 자의 소리를 듣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소돔 사람들로 인해 피해를 호소하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하나님은 천사들을 그곳으로 보내셨습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하나님은 소돔 사람들로 인해 억울함을 당하는 자들의 소리를 들으셨기 때문입니다.
이미 알고 계셨지만 하나님은 소돔의 죄악을 체크하기 위해 움직이시며 일하셨습니다.
천사들을 그곳으로 보내셨습니다.
기도하는 일과의 제목 중에 이런 기도를 습관적으로 드립니다.
‘하나님, 오늘 하루 제 3자가 나를 통해 상처받지 않게 하시고, 나 때문에 위로를 받는 날 되게 하옵소서!’
이 기도는 습관적인 기도가 되어도 괜찮습니다.
내가 의도하면 더 나쁜 일이고, 의도하지 않았다면 경책의 차원에서라도 민감하게 체크해야 할 일은 나 때문에 억울한 일을 당하는 자가 없도록 나를 쳐서 경성하는 일입니다.
주님은 듣고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한희철 목사가 기록한 ‘여기에 물이 있다’ 7월 13일 묵상노트에 보면 이런 문장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슴에 못(釘)으로 남는 말이 있고, 가슴에 못(池)으로 남는 말도 있다.” (한희철, “여기에 물이 있다”, 40.)
가슴에 잘 새겨야 하는 금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타인들의 가슴에 흡족한 선한 일들을 남기는 교우들이 되기를 바라고, 행여라도 타인들에게 아픔을 주는 일이 없는 교우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