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예배

제목[수요 예배] 보는 눈이 바뀔 때2024-03-08 17:20
작성자 Level 10

2022년 7월 6일 수요 저녁 기도회 (창세기 예순 일곱 번째 강해)

 

본문창세기 18:1-15

제목보는 눈이 바뀔 때

 

서론)

 

나희덕 시인의 시인 어떤 피에타를 낭송하며 설교를 시작하겠습니다.

 

한 개의 씨앗에서

삶과 죽음은 두개의 떡잎처럼 돋아났다

내가 생일을 맞이한 날에

아버지의 죽음은 무럭무럭 자라나 심연을 완성했다

아버지가 받아 안았던 딸이

중년이 되어 아버지의 시신을 받아 안은 그날에

한 열매가 대지로 돌아간 그날에

씨앗의 심연이여,

이것은 어떤 피에타인가

(나희덕, “파일명 서정시”, 창비시선-426, 80)

나희덕 시인의 시집인 파일명 서정시에 안에 담겨 있는 어떤 피에타입니다.

기도원에 가지고 올라간 시집인데 참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준 글이었기에 설교 파일에 담아 놓았다가 교우들에게 소개했습니다.

이 시는 시인이 아버지의 죽음을 경험하면서 아버지의 그 깊은 사랑을 잘 몰랐고또 깊이 생각하지도 않았는데 이제 나이가 들어 엄마가 된 뒤에 비로소 이론으로 표현하기 어려운 부성적인 사랑의 운명을 보게 되었다고 고백한 시인의 토로입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사물과 사건을 보는 관점이나 시각이 폭넓어진다는 것과 맥을 같이 합니다.

만에 하나나이가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젊었을 때 보던 시각과 똑같다면 그건 참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가족사진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대중가수인 김진호씨가 부른 가족사진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1절 가사가 이렇습니다.

바쁘게 살아온 당신의 젊음에

의미를 더해줄 아이가 생기고

그날에 찍었던 가족사진 속에

설레는 웃음은 빛바래 가지만

어른이 되어서 현실에 던져진

나는 철이 없는 아들이 되어서

이곳저곳에서 깨지고 또 일어서다

외로운 어느 날 꺼내본 사진 속

아빠를 닮아있네

 

아빠를 닮아있네라는 깨달음은 결코 철이 없는 나이에는 경험할 수 없는 성숙함의 결과물입니다.

 

오늘 본문은 마므레 상수리나무 숲으로 아브라함을 찾아오신 하나님의 신-현현(Theophany)의 기사를 적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찾아오신 장소는 아브라함이 거주하고 있던 헤브론이었습니다.

다만 날짜를 명시하지 않아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본문에 의하면 뜨거운 날이었고이삭이라는 아들이 탄생하기 약 일 년 전의 사건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본문을 조금만 더 깊이 들여 다 보십시다.

어느 뜨거웠던 날입니다.

눈을 들어보니 장막 맞은편에 세 사람이 서 있는 것이 아브라함의 눈에 보였습니다.

이들을 발견한 아브라함은 즉시 그들에게로 달려가 그들을 영접하고 그들에게 자기 집에 들어와 잠시 유할 것을 간청합니다.

아브라함이 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본문 3-5절입니다.

이르되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시옵고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에서 쉬소서 내가 떡을 조금 가져오리니 당신들의 마음을 상쾌하게 하신 후에 지나가소서 당신들이 종에게 오셨음이니이다 그들이 이르되 네 말대로 그리하라

읽으신 것처럼 아브라함의 간절한 청을 세 사람이 허락합니다.

아브라함은 세 사람을 집으로 모신 뒤에 급히 아내 사라에게 떡을 만들라고 지시하고 더불어 아브라함이 직접 기름진 송아지를 잡아 하인들에게 주며 요리하게 하고 엉긴 젖과 함께 준비하여 세 사람에게 극진히 대접하는 장면이 이어지는 본문 6-8절에 소상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급히 장막으로 가서 사라에게 이르되 속히 고운 가루 세 스아를 가져다가 반죽하여 떡을 만들라 하고 아브라함이 또 가축 떼 있는 곳으로 달려가서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를 잡아 하인에게 주니 그가 급히 요리한지라 아브라함이 엉긴 젖과 우유와 하인이 요리한 송아지를 가져다가 그들 앞에 차려 놓고 나무 아래에 모셔 서매 그들이 먹으니라

이상 제시된 본문을 설명했는데 몇 가지 본문 주석에 대한 이해에 접근해 보겠습니다.

2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서 있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 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아브라함의 장막을 찾아온 대상을 본문 기자는 세 사람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여기에 기록된 방문객 세 사람의 정체를 알아보는 것은 의미가 있는 시도라 진행해 보겠습니다.

세 사람의 어렴풋한 정체는 신적 존재일 것입니다.

사람이라고 변역된 히브리어 이시는 통상적으로 성인 남자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본문 2절은 물론이거니와 3-7, 16절에서도 본문 기자는 세 사람의 기조를 유지합니다.

문제는 1절과 9-15절의 기록입니다.

1절을 복기하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마므레의 상수리나무들이 있는 곳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날이 뜨거울 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아 있다가

1절의 주어는 여호와이십니다.

동시에 3절을 마저 보겠습니다.

이르되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시옵고

아브라함은 분명 대화하는 상대를 세 사람을 의미하는 나의 주님들이라고 말하지 않고 나의 주라는 단수로 대화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세 사람이라는 이 구절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것일까요?

영남신학대학교 오택현 교수의 주석을 빌려오겠습니다.

말씀과 연관하여 살펴보았을 때 세 사람은 하나님과 그의 천사였는데 아브라함은 그들이 누구인지 깨닫지 못하고 지나가는 나그네인 줄로만 알았다.” (오택현, “창세기-연세신학백주년기념주석”, 150.)

오 박사가 이렇게 해석한 것은 고대 근동의 시기에는 지나가는 나그네를 극진히 대접해 주는 법이 있었기에 아브라함이 그 법에 충실하였다고 해석한 것입니다.

하지만 백석대학교 송병현 교수는 약간 해석의 뉘앙스가 다른 해석을 내놓았습니다.
유목민 생활을 하던 아브라함은 물론 고대 근동의 사람들은 손님 환대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는 거의 일치하지만 송 교수는 아브라함의 손님 대접을 종교적인 차원으로 확대하고 있다는 점에서 묘한 차이를 보여줍니다.

6-7절에서 표현되어 있는 행위를 다시 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이 급히 장막으로 가서 사라에게 이르되 속히 고운 가루 세 스아를 가져다가 반죽하여 떡을 만들라 하고 아브라함이 또 가축 떼 있는 곳으로 달려가서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를 잡아 하인에게 주니 그가 급히 요리한지라

고운 가루 세 스아(1스아는 15리터나 되는 많은 양)로 떡을 급히 만들라고 명한 것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를 아브라함이 직접 잡아 하인들에게 준 행위는 받아들인 손님의 중요함을 강조한 것으로 보이는 대목입니다.

이런 행위를 송 교수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실제로 낯선 사람을 환대하는 것은 일종의 예배 행위다. ‘탈무드는 객들에게 베푸는 행위는 하나님의 임재를 환영하는 것보다 더 위대하다고 기록한다.’ (중략그러므로 아마도 아브라함은 이 세 방문자가 누구인지 알았던 것 같다.” (송병현, “엑스포지멘터리 창세기 주석”, 337-338.)

아브라함이 알았던 이 세 사람의 정체성은 1절의 여호와라는 주어에서 보듯 하나님과 그와 연관된 신적인 존재라는 것을 직시한 것으로 보입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오늘 설교의 레마와 관련된 중요한 교훈을 유추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내가 보는 시각을 영적으로 바꾸면 하나님을 느끼게 됩니다.

 

9절 이하를 읽다보면 오늘 설교의 핵심적인 요지를 만나게 됩니다.

지금부터 말씀드리는 본문 해석에 더 귀를 기울여 주기를 바랍니다.

본문 9-10절을 만나보겠습니다.

그들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대답하되 장막에 있나이다 그가 이르시되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9-10절 번역이 대단히 정직합니다.

9절에서 음식을 먹은 세 사람들이 아브라함에게 묻습니다.

네 아내 사라가 어디에 있느냐고.

질문한 주어가 그들이입니다.

삼인칭 복수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세 사람에 대한 이미지일 것입니다,

주목할 것은 10절의 주어가 바뀌었다는 점입니다.

그가 이르되

이제 말하는 주어가 3인칭 단수로 바뀌었습니다.

라는 3인칭 단수는 1절에 소개되어 있는 여호와일 것입니다.

결국 아브라함은 자기가 대접한 세 사람의 정체에 대하여 나름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송병현 교수의 해석을 뒷받침해주는 9-10절의 기록은 압권입니다.

아직은 아브라함과 사라가 내년 이 맘 때에 다시 너희들에게 돌아오면 사라에게 아들이 있게 될 것이라고 알려준 여호와의 고지에 대해 웃으며 신뢰하지 못하는 수준이었지만아브라함은 그렇게 말하는 자들이 누군지를 어렴풋하게 인지하고 있는 영적인 변화가 감지되고 있는 장면이 본문입니다.

아브라함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내가 눈으로 보고 있는 것의 시각이 바뀌면 내 삶의 질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증명일 수 있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나의 눈으로 보는 것을 영적인 것으로 바꾸면 그때부터 나는 하나님을 느끼고만지고같이 호흡할 수 있게 되는 시작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어제 한희철 목사가 만든 여기에 물이 있다’ 7월 5일 큐티를 했습니다.

성서일과는 시편 119:73-80, 시편 6예레미야 8:4-13, 열왕기하 5:15-27, 사도행전 19:28-41이었습니다.

저는 성서일과 중에 예레미야 8:4-13절 중, 8절을 나누기로 했습니다.

예레미야 8:8절입니다.

너희가 어찌 우리는 지혜가 있고 우리에게는 여호와의 율법이 있다 말하겠느냐 참으로 서기관의 거짓의 붓이 거짓되게 하였나니

성전 설교라고 하는 소위 예레미야 7장 설교의 후속 말씀인 8장은 예레미야 시대에 영적으로 더 나쁜 선례를 남기고 있는 유다 공동체의 영적 망가짐을 고발하고 다루고 있는 메시지입니다.

이 상황을 통곡하던 8절의 예레미야의 토설이 가슴을 때렸습니다.

해서 이렇게 말씀 묵상을 남겼습니다.

성전 설교의 압권은 역설적 거스름이었다가장 두려운 것은 올바른 말씀이 선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말씀을 의도적으로 거스르는 참담함이다서기관의 붓마저 거짓으로 점철된 시대에 무슨 희망이 있나예레미야 8:10절 2f: 선지자(코헨)로부터 제사장(나비)까지 다 거짓을 행함이라는 구절이 통곡하게 하는 레마다.”

말씀묵상을 마치면서 이렇게 갈무리했습니다.

질문하자오늘 내가 강단에서 선포하는 메시지와 원고가 거짓의 붓은 아닌가를 치열하게 성찰하고 있는가?”

그리고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세인교회 강단에서 선포되는 메시지가 순결하게 하옵소서!”

결단은 이것이었습니다.

입에서 떠난 말씀이 1/2이라도 삶으로 실천되게 몸부림치자.”

왜 개인 큐티의 내용을 공개했는지 아십니까?

담임목사의 영적 시각을 보고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몸부림이 주님을 보려는 몸부림으로 귀결될 때 제게 임하는 은혜와 복은 하나님을 체감할 수 있는 민감한 은혜에 머물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이 날 큐티를 마치고 하나님께 기도하는데 제게 임한 하나님의 음성이 있었습니다.

아들아고맙다.

루틴하고식상한 상투적 멘트로 듣지 마십시오.

이 은혜와 영적 희열은 경험한 자만이 느낄 수 있는 특권의 복입니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시각에 들어온 것이 지극히 세속적인 가치라면 버리십시오.

내 눈으로 바라보는 시각을 영적인 것으로 바꾸십시오.

그렇게 될 때하나님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내게로 부터 눈을 들어 주를 보기 시작할 때 주의 일을 보겠네 내 작은 마음 돌이키사

하늘의 꿈꾸게 하네 주님을 볼 때 내게로 부터 눈을 들어 주를 보기 시작할 때

주의 일을 보겠네 내 작은 마음 돌이키사 하늘의 꿈꾸게 하네 주님을 볼 때

모든 시선을 주님께 드리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느낄 때 내 삶은 주의 역사가 되고

하나님이 일하기 시작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