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5월 25일 수요 저녁 기도회 (창세기 예순 두 번째 강해) 본문: 창세기 17:1-8 제목: 묵묵히 걷는 신앙 서론) 한자 사자성어 중에 ‘마부작침(磨斧作針)’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풀이하면 ‘도끼를 갈아 침을 만든다.’는 뜻의 한자성어입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다. 이게 가능할까? 현실적으로 사려해 본다면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훈적으로 생각하면 그 의미는 분명해 집니다. 무언가를 이루려면 중단하지 않는 끈기가 있어야 함을 교훈하는 가르침입니다. 제가 가끔 설교를 통해 성경적인 내증으로 인용하는 창세기 18장에 기록된 소돔성을 위한 아브라함의 중보 기도 기사가 있습니다. 소돔의 죄악이 너무 커서 하나님께서 그 성을 멸하실 것을 결정헸고 그 일을 아브람에 통보하자 아브람이 조카 롯을 생각하며 중보한 기사입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아브람이 하나님께 소돔을 멸하지 않는 조건의 수로 제시한 것이 50-45-40-30-20-10으로 줄어듭니다. 하지만 아브람이 제시한 10명의 의인이 소돔에는 없었습니다. 결국 소돔은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없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부침할 내용이 있습니다. 아브람의 중보 기도 내용입니다. 아브람은 왜 10명에서 기도 내용을 중단했을까? 입니다. 저도 이 점에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습니다. 이왕 목을 걸었으면 5명, 1명으로 끝까지 기도하지 하는 아쉬움입니다. 불완전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 성에는 롯이 있었는데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하지만 신학자들의 해석 퍼즐은 목회자가 느끼는 이런 정서적인 해석과는 거리를 둡니다. 구약학자 샤마의 이야기를 이렇습니다. “아브라함의 의인 수는 왜 10명으로 멈추었을까? 열이라는 숫자는 전체를 상징하는 숫자다. 열 명이란 사회 전체를 지탱해 주고 대변하는 최소의 기준이다.” (N.M. Sama,“Genisis-The JPS Torah Commnetary”, p,134.) 샤마의 글을 전제할 때 아브람의 중보 기도 내용에 대한 분명한 해석이 가능해 집니다. 10명이라는 숫자는 아브람이 요구할 수 있는 마지막 마지노 숫자였다는 말입니다. 이 말을 바꾸어 해석하면 아브람의 기도를 숫자를 중단했다는 아쉬움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브람의 기도는 최선을 다한 기도라는 결론에 도착하기 때문입니다. 아브람의 이런 끈질김이 도대체 어디에서 파생되었을까요? 저는 목회자로서 성경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아주 중요한 단서를 본문을 통해 이 답을 제시해 보고자 합니다. 본론) 아브람이 75세가 되는 어느 날, 갈대아 우르로 찾아오신 하나님께서 본토, 친척, 아비의 집으로 떠나라고 명하셨습니다. 명하시면서 아브람에 주셨던 약속을 여러 차례 나누었습니다. 12:2-3절이 첫 번째 약속이었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이 약속을 믿고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에 들어온지 10년이 되는 어느 날, 즉 아브람의 나이가 85세가 되는 날 하나님은 그를 다시 찾아오셔서 이렇게 첫 번째 주셨던 약속을 재 확인하셨습니다. 창세기 15:5절입니다.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하지만 아브람과 사래는 하나님이 연거푸 주신 약속을 적통이었던 사래의 몸에서 날 후손을 통해 이루실 것이라는 믿음이 아닌 아브람의 씨만을 생각하여 몸 종 하갈과 동침하여 낳은 아들도 하나님이 주신 후손에 대한 복이라고 생각하는 얍삽함으로 온전하지 못한 신앙의 행동을 보였음을 우리는 16장 강해를 통해 살폈습니다. 아브람이 이스마엘을 낳은 나이는 86세였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스마엘을 낳은지 13년 되는 어느 날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본문 1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14년만에 다시 오신 것입니다. 오셔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여기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이름은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엘 샤다이” 구약 성경 전체에서 총 48번 사용된 이 하나님의 이름이 사용된 경우는 대상자들이 전쟁에 나갈 때 사용되던 하나님의 성호였습니다. 다시 말해 불가능한 전쟁을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강조한 성호로 많이 사용된 단어입니다. 또 한 가지의 경우가 있습니다. 믿음의 대상이신 야웨 하나님을 온전하게 신뢰하지 못하는 대상자들에게 당신의 존재를 밝히실 때 사용되던 성호입니다. 특별히 오늘 같은 본문이 좋은 실례입니다. 6-8절을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내가 너로 심히 번성하게 하리니 내가 네게서 민족들이 나게 하며 왕들이 네게로부터 나오리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네가 거류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온 땅을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하나님이 말씀하신 이 내용은 75세와 85세의 아브람에게 오신 하나님께서 연이어 말씀하신 언약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아브람이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체결하신 언약을 온전하게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한 번은 엘리에셀을, 또 한 번은 이스마엘로 자기의 후사와 씨를 인위적으로 퍼뜨릴 생각을 했음을 우리는 이전 강해 사역을 통해 나누었습니다. 이것이 왜 불신앙이며 하나님을 온전히 믿지 못한 결과물일까요? 다음 강해 사역을 통해 살필 17:16-21절을 조금 길지만 미리 읽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사라라 하라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가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여러 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으며 마음속으로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출산하리요 하고 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아뢰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이스마엘에 대하여는 내가 네 말을 들었나니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매우 크게 생육하고 번성하게 할지라 그가 열두 두령을 낳으리니 내가 그를 큰 나라가 되게 하려니와 내 언약은 내가 내년 이 시기에 사라가 네게 낳을 이삭과 세우리라” 하나님이 계획하신 아브람의 후손의 복은 이스마엘이 아니라 1년 뒤에 낳을 아들 이삭을 통하여서임을 분명히 선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브람이 속으로 하나님의 이런 계획하심을 비웃습니다. 17:17절이 증거입니다.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으며 마음속으로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출산하리요 하고” 이런 비웃음은 단지 아브람만의 비웃음이 아니었습니다. 사래도 마찬가였습니다. 창세기 18:10-12절이 이것을 증명합니다. “그가 이르시되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아브라함과 사라는 나이가 많아 늙었고 사라에게는 여성의 생리가 끊어졌는지라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 이렇게 온전하지 못한 아브람과 사래의 불완전한 믿음을 아신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아니 엘 샤다이”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적어도 99세의 아브람, 89세의 사래의 신체적, 생리적 상황을 뛰어넘어 그들에게 아들을 주실 수 있는 능력의 하나님이심을 선포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이 능력을 믿으라고 압박하신 셈입니다. 1절 하반절이 그 증거입니다.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현대인의 성경 번역으로 읽어 보십시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너는 나에게 순종하며 내 앞에서 흠 없이 살아라.“ 무슨 말입니까? 내 전능성을 의심하지 말고 믿으라는 압박을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압박을 하자 아브람이 하나님께 엎드렸습니다.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하나님께 보여줄 수 있는 행위는 엎드림입니다. 이렇게 엎드리고 있는 아브람에게 하나님께서는 75세에, 85세에 말씀하셨던 언약을 再再 언약을 하십니다. 본문 4-7절입니다.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내가 너로 심히 번성하게 하리니 내가 네게서 민족들이 나게 하며 왕들이 네게로부터 나오리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4,6-7절은 이미 약속하신 언약에 대한 다시 확인하시는 하나님의 약속 강조의 구절입니다. 허나 특히 눈에 띄는 구절은 5절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의 이름을 다시 지어주시는 개명 사역이 등장합니다. 이전의 이름 ‘아브람’ 즉 ‘존귀한 아버지’라는 그의 이름을 ‘아브라함’ 즉 ‘여러 민족의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바꾸라고 명하십시다. 그를 통한 복이 확대됨을 시사합니다. 송병현 교수는 아브람의 이름 개명 스토리에 대한 영적인 의미를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 ”고대 근동의 정서에 의하면 아브람의 이름 변화는 인격과 운명의 변화를 의미한다.“(송병현, ”엑스포지멘터리 창세기 주석“, p,321.) 결국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약속하셨던 일체의 언약을 완벽하게 이루실 프로젝트를 다 준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24년 전에 아브람을 지명하셔서 그를 통해 당신의 구속사를 이루어가실 하나님의 엄청난 계획은 이미 완벽하게 진행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그리신 그 구속사에 대한 약속을 신뢰하지 못했던 아브람과 사래의 온전하지 못한 불신앙이었습니다. 이상의 본문 설명을 통해 62번째 창세기 강해에서 우리들이 건져 올릴 레마를 나누어 보겠습니다. ※ 주님의 말씀 의지하고 묵묵히 천로역정의 길을 걸어 가십니다. 저는 오늘 레마에서 제일 강조하고 싶은 단어가 ‘묵묵히’라는 부사입니다. 오늘까지의 본문에서 제일 안타까운 장면은 조급함입니다. 아브람과 사래는 하나님의 언약을 믿지 못했거나 계산했습니다. 엘리에젤을 후사로 삼겠다고 했을 때의 심정은 나름 이해가 됩니다. 10년 동안 하나님이 나타나지 않으셨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10년 만에 찾아오신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일방언약 체결식까지 하시면서 언약을 다시 확인해 준 이후의 사건인 하갈을 통한 이스마엘 탄생 기사는 정말로 얍삽한 아브람과 사래가 보여준 불신앙의 합작품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적자인 이삭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자의적으로 해석한 그 두 사람의 얍삽함의 선택은 불신앙의 극치인 게 틀림이 없기 때문입니다. 왜 아브람과 사래는 이런 불신앙적인 선택을 한 것일까요? 조급함 때문입니다. 이것을 오늘 우리는 반면교사 삼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묵묵한 걷기입니다. 조변석개, 조삼모사의 마음을 갖는 것은 신앙인의 태도가 아닙니다. 나태주 시인의 대표적인 시인 ‘풀꽃’에 담긴 시 한편을 읽어 드립니다. (나태주, ”꽃을 보듯 너를 본다“, 지혜,p,74.)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이 시를 읽는데 왜 그리 감동이 되든지 기억이 생생합니다. 우리 현대인들의 치명적인 약점은 조급함입니다. 오래 보면 다 사랑스러워 집니다. 조급한 마음으로 무언가 성과를 내려 하니까 싫증이 나고 짜증나는 것입니다. 열왕기하 5:14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요단 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의 살이 어린 아이의 살 같이 회복되어 깨끗하게 되었더라“ 우리가 너무 잘 아는 나아만이 나병에서 고침을 받는 드라마틱한 해피엔딩의 스토리입니다. 이 구절은 대단히 아름다운 해피엔딩이지만 과정이 녹록하지 않았음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나아만이 엘리사의 문전박대에 분노하여 다메섹으로 돌아가 고향에 있는 아바나와 바르발 강에 씻겠다고 고집을 피울 때 상전이자 주인이었던 나아만을 설득했던 주인공들을 역사서는 놓치지 않고 보고합니다. 열왕기하 5:13절을 소개합니다. ”그의 종들이 나아와서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에게 큰 일을 행하라 말하였더면 행하지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하니“ 나아만을 설득하였던 주인공들을 성경은 나아만의 종들이라고 적시합니다. ‘종’이라고 번역한 히브리어 ‘에베드’의 원 뜻은 ‘노예’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누구도 인권을 보장해 주지 않던 노예들이 주인을 만류했습니다. 엘리사가 너무 엄청나게 힘든 것을 요구한 것도 아닌데, 못하실 게 뭐가 있냐고 에둘러 주인을 달랬습니다. 저는 열왕기하 5:13절에 기록되어 있는 ”큰 일을 행하라 말하였더면 행하지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하니“라는 이 대목이 이렇게 읽혀졌습니다. ”주인님, 포기하지 마십시다. 눈에 보이는 효과를 거두려는 조급함을 버리고 한 번만 인내함으로 순종해 보십시다.“ 종들의 간청에 따라 나아만은 분노를 누그러뜨리고 요단강에 7번 내려가서 몸을 씻었다고 역사가는 보고합니다. 히브리적인 개념으로 7이라는 숫자는 숫자적인 일곱의 의미보다도 완전수의 의미로 더 많이 사용됩니다. 이 도식을 적용한다면 나아만이 요단강에 내려간 숫자는 단순히 일곱 번이 아니라 몸이 깨끗해 질 때까지 내려갔다고 말하는 것이 더 주석적인 설명입니다. 나을 때까지 내려간 나아만을 보면서 무엇을 느낍니까? 조급한 마음으로 무언가 효과와 결과물을 얻으려던 마음이 끈기 있는 모습으로 바뀌었음을 알려줍니다. 목회를 하면서 현장에서 배우는 공부가 있습니다. 신학교에서는 결코 배우지 못하는 공부입니다. 내가 교인들을 변화시켜 보겠다는 의지를 버리는 공부였습니다. 저 역시 젊었을 때, 이 시도를 해 보려고 했습니다. 정말로 열정을 갖고 이 시도를 하며 노력도 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결론은 실패였습니다. 성도를 어떻게 하든 변화시키겠다는 의지는 지금 생각해 보면 목사의 교만이자, 조급함으로 인한 욕심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 현장에서 30년 넘게 공부한 목사의 결과물이었습니다. 지난 DPA 4기 사역 중에 교육을 받는 목사님이 한 분이 강의 Q/A 시간에 이렇게 물었습니다. ”목회를 하면서 가장 괴로운 것은 성도들이 변화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목회 선배 목사님들은 성도가 변화되지 않을 때 어떻게 목회를 했는지 그 노하우를 듣고 싶습니다.“ 참석한 강사 목사들이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나름 눈높이에 맞추어 답변해 주었습니다. 답변에 나선 선배 목사들이 말한 공통분모는 하나였습니다. ”성도들이 변하기 전에 목사인 내가 변해야 합니다.“ 듣고 보니 기가막힌 정답이었습니다. 성도가 변하는 것은 조급함으로 해결되는 사안의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철저히 성령 하나님의 몫입니다. 성령 하나님의 몫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은 한 가지를 전제한다는 것입니다. 조급해 하지 않는 것입니다. 묵묵히 하나님이 그때 그때마다 조명하시는 말씀을 붙들고 뚜벅이처럼 천로역정의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결론)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아브람은 조급해서 이스마엘이라는 기도 제목을 낳았습니다. 이삭은 하나님의 계획하신 아브람에게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지 25년 만에 그 일을 이루셨습니다. 아들 이삭을 낳은 뒤, 아브라함은 알게 되었습니다. 야웨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지는 신실한 약속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이 믿음으로 성장했기에 아브라함은 모리아에서 아들 이삭를 바치라는 명령에도 순종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은 더딜 지는 모르지만, 반드시 이루어 주시는 하나님의 미션입니다. 조급해 하지 마십시다. 묵묵히 믿음의 주를 의지하고 내게 맡겨 주신 길을 오롯히 걸어가십니다. 히브리서 12:1-2절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일갈했습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우리가 지금 해야 하는 일은 결과가 어떻게 나타날 것인가에 대한 조바심이 아니라 어떻게 믿음의 경주를 경주할까에 대한 묵묵함입니다. 묵묵히 신앙의 길을 걷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