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예배

제목[수요 예배] 브엘라해로이(1)2024-03-08 17:17
작성자 Level 10

2022년 5월 11일 수요 저녁 기도회 (창세기 예순 번째 강해)

 

본문창세기 16:7-16

제목브엘라해로이 (1)

 

서론)

 

우리는 흔히 사랑의 반대말을 미움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많은 지성인들은 동의하지 않습니다.

이유는 사랑의 반대말을 무관심이라고 정의하기 때문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실로 그렇습니다.

미워하는 감정이 있다는 것은 그 대상자에게 일말의 관심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무관심은 정말로 무서운 사랑의 반대편에 있는 개념입니다.

어제 새정부가 들어섰습니다.

어떤 권력이든 원하는 것이 있습니다.

자신들의 권력에 무관심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일 것입니다.

관심을 갖게 될 때 피곤해 지기 때문입니다.

숙명여대 김응교 교수가 그래서 본인의 책에서 이렇게 갈파했습니다.

모든 부패한 독재정권이 바라는 것이 무관심이다.” (김응교, “손모아”, 비아토르,p,133.)

세상의 권력은 이렇지만 하나님은 결코 당신의 자녀들에게 무관심하지 않으십니다.

오늘 본문을 들여다 보면 하나님은 차별하지 않고 당신의 모든 백성들에게 지속적인 관심을 갖고 계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해줍니다.

 

본론)

 

하갈은 주인의 허락 하에 남자 주인이었던 아브람과 동침하여 임신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상황이 변하자 불완전한 것 투성인 인간의 죄성이 하갈에게 드러납니다.

지난주 수요일에 보았던 4절을 들쳐보십시다.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임신하매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그의 여주인을 멸시한지라

여기에 기록된 멸시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카랄은 보이는 대상을 가볍게 본다는 의미의 동사입니다.

임신 전에 감히 근처도 가까이 하지 못하던 여 주인 사래를 가볍게 보았다는 하갈의 심정적 변화를 보면서 인간이 얼마나 본능적으로 악한 존재인지를 엿보게 됩니다.

고대 근동에서 노예는 인권이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냥 상품이었고 물건이었습니다.

이집트 출신의 하갈도 예외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존재일 수밖에 없었던 하갈은 자신이 남자 주인의 씨를 임신한 것을 알고 여주인 사래를 가볍게 보는 시행착오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래가 그냥 지나칠 리가 없습니다.

아브람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그녀를 내쫓아 버립니다.

내쫓았다고 표현한 이유는 6절 하반절의 기록 때문입니다.

창세기 16:6절을 복기 해 보십시다.

아브람이 사래에게 이르되 당신의 여종은 당신의 수중에 있으니 당신의 눈에 좋을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매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였더니 하갈이 사래 앞에서 도망하였더라

사래가 자신이 갖고 있던 권력으로 하갈을 학대(히브리어 아나'즉 누르기 시작했습니다.

아마도 육체적정신적인 핍박과 압박이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심각하게 자행된 견디기 어려운 누름을 당한 하갈이 그집에서 도망하였다고 창세기 기자는 보고합니다.

도망할 수밖에 없는 내쫓김을 당한 것입니다.

하갈의 신세는 비참했을 것입니다.

7절을 봅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광야의 샘물 곁 곧 술 길 샘 곁에서 그를 만나

술 길은 에담이라고 알려진 시내 광야 북서쪽에 위치해 있는 곳입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떠나 광야로 나갈 때 이 지역 근처를 지났습니다.

그러니까 역으로 생각하면 하갈은 자신의 고향으로 피신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임신한 여인의 몸으로 광야를 지난다는 것은 곧 죽음의 길을 간다는 말과 직결됩니다.

무섭고 두려운 길 한 복판에 서 있는 하갈에게 극적인 일이 생깁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그곳으로 찾아오신 것입니다.

이 구절을 통해 우리들이 얻을 수 있는 첫 번째의 은혜가 보입니다.

 

1) 하나님은 고통을 당하는 당신의 백성들을 찾아와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백석대학교 송병현 교수는 본문 16장에서 여호와의 사자와 여호와를 특별하게 구분하지 않고 있다고 본인의 창세기 주석에서 보고합니다.

그의 지론에 맞추어 저 역시 여호와와 여호와의 사자를 구분하지 않고 같은 맥락으로 설명하겠습니다.

하갈은 사래의 몸종이었습니다.

8절에서 창세기 기자가 이를 분명히 합니다.

이르되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그가 이르되 나는 내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

그렇습니다.

사래의 여종이라는 신분이 하갈의 정체성이었습니다.

말 그대로 물건이자 상품이었던 사래를 하나님의 사자 즉 하나님이 찾아왔습니다.

그녀를 인격적으로 대우하셨다는 말이 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그 유명한 갈라디아서 3:28절을 아십니까?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하나님은 신분의 차별을 두지 않으십니다.

주님의 자녀들을 반드시 보호하십니다.

특히 위기의 때에는 직접 찾으십니다.

요한복음 21:1절은 감동입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호수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은 이러하니라

갈릴리 디베랴 호수로 낙향하여 고기를 잡고 있었던 인물은 시몬 베드로를 비롯하여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인 요한과 야고보 그리고 익명의 또 다른 두 명의 제자 둘까지 총 7명의 제자들이었습니다.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제 1제자군이라는 것과 모두 겟세마네에서 체포당하시는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간 자들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해 볼 때 나를 배신한 이런 자들을 다시 보고 싶겠습니까?

그럴 리 없습니다.

그런데도 갈릴리 디베랴로 이들을 다시 찾아가신 분은 배신을 당한 예수님이십니다.

왜 이들을 다시 찾아가셨습니까?

요한복음 13:1절로 대답하겠습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이렇게 주군을 싸늘하게 배신한 자들도 끝까지 사랑하시는데 고통 받고 있는 당신의 자녀들을 외면하시겠습니까?

C.S 루이스가 했던 말이 울컥하게 합니다.

하나님은 은혜는 자신의 궁핍을 결코 완전히 인정하지 못하는 혼란스럽고 몽매한 필요를 완전히 어린아이 같이 즐겁게 받아들이는 자세로 바꾸어 놓는 일이고자신이 전적으로 의존적인 존재라고 인정하도록 바꾸어 놓는 일이다.”(C.S 루이스,“네 가지 사랑”, 홍성사,p,222)

무슨 말인지 아십니까?

번역본이기에 거칠지만 원문 안에 있는 문장을 그대로 이해하면 이렇게 쉽게 바꿀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사랑받도록 바꾸면서까지 사랑하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이런데 어떻게 주님의 사랑을 외면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기에 하나님은 술 광야 길에서 방치하면 죽을 수 있는 하갈을 직접 그 현장까지 찾아가신 것입니다.

부인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당신도 나도 이 은혜를 받은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지난 번 친구 목사들과 사적으로 만나 대화하다가 이런 이야기를 제가 했습니다.

나는 내가 목사가 되어서 받은 가장 큰 은혜는 지금 살아 있다는 점이다만에 하나 목사가 안 되었다면 나는 지금 이 땅에 존재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100%.”

나를 목사로 만드셔서 항거할 수 없는 사랑을 쏟아 부어주셔서 살게 하셨고사랑하신 주님의 그 사랑은 이 땅에서 표현할 수 있는 언어로 담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찬양의 가사를 진정성을 담아 부릅니다.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네하나님의 크신 사랑 그 어찌 다 쓸까 저 하늘 높이 쌓아도 채우지 못하리”(찬송가 304장 3)

하나님은 하갈에게 이 사랑의 마음을 갖고 이렇게 찾아오셨습니다.

본문 8-12절을 읽겠습니다.

이르되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그가 이르되 나는 내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네 씨를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임신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 같이 되리니 그의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지며 그가 모든 형제와 대항해서 살리라 하니라

이 구절들에 대한 강해적인 요소가 너무 많아 한 마디로 언급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의 교훈을 추출하기 위해 잠시 본문을 설명하겠습니다.

술 광야 길에서 기진하고 있던 하갈을 찾아오신 주님은 그녀에게 오셔서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고 있느냐?

몰라서 물으신 것이 아닙니다.

생전 처음 경험하는 하나님과의 만남이라는 충격적인 엔카운터 현장에서 그녀에게 있을 두려움을 상쇄시키시기 위해 인격적으로 대화를 시작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질문에 하갈은 자기가 당한 일을 솔직담백하게 고백합니다.

내 여주인 사래에게 쫓겨나 도망하여 여기까지 왔음을 시인한 것입니다.

이 답변을 들으신 주님은 하갈에게 쉽지 않은 하명을 하십니다.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 복종하며 살라는 명령이었습니다.

결코 순종하기 쉽지 않은 하명이었지만 하갈이 모든 고난을 이길 수 있는 약속을 하나 남기십니다.

복종하며 사는 동안 아들을 낳을 것인데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지을 것을 명하셨고그 아들을 통한 후손이 많아질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이스마엘이라는 아들 이름의 뜻은 하나님이 들으셨다는 뜻입니다.

이 하명을 받은 하갈은 죽기 보다 싫은 고통의 현장인 사래에게 돌아갔고 본문 15-16절에 보면 하나님이 예언하신 대로 득남하게 되었음을 보고합니다.

하갈이 아브람의 아들을 낳으매 아브람이 하갈이 낳은 그 아들을 이름하여 이스마엘이라 하였더라 하갈이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낳았을 때에 아브람이 팔십육 세였더라

아마도 하갈이 여주인 사래의 학대를 이길 수 있었던 근원적인 이유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본문 설명을 통해 우리는 두 번째 본문 레마를 찾을 수 있습니다.

 

2) 하나님은 우리를 위로하시는 인격적인 하나님이십니다.

 

지금 설명드린 대로 하나님은 하갈에게 오셔서 아주 세밀하게 대화하셨습니다.

그녀의 아픈 행적에 대해 알면서도 물으셨습니다.

그 아픔을 들으시고 그녀에게 행할 일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가르쳐 주시면서 그녀에게 위로하셨습니다.

위로라는 말이 본문에 어디에 나오냐고 질문하실 것 같지만 분명히 하나님은 하갈을 위로하셨습니다.

그 출처를 저는 이렇게 찾고 싶습니다.

하나님이 들으셨다가 하갈이 낳을 아들의 이름이었습니다.

이것보다 큰 위로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 아들을 통한 후손들을 많아지게 할 것이라는 자손의 복보다 더 위대한 복과 위로는 지금 하나님께서 하갈의 고통과 애닮픔을 듣고 보고 계신다는 위로입니다.

고린도후서 1:3-5절을 읽어봅니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무려 5번에 걸쳐 위로하시는 하나님을 바울이 언급합니다.

애증의 대상이었던 고린도 교회 공동체 안의 신자들에게 싸늘하게 배신을 당한 바울도 인간인지라 위로 받고 싶었을 것입니다.

사람의 위로가 필요했지만 바울은 알았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허접한 것인지를.

그러기에 바울은 절대적 명제와 진리를 놓치지 않으려고 본질적인 은혜를 붙들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위로였습니다.

성도인 우리에게 정말로 큰 위로가 무엇입니까?

카일 아이들먼이 이렇게 말했던 ‘NOT A FAN’의 문장을 새겨놓았습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말했지만 신약에서는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신다고 말한다.” (카일 아이들먼, “NOT A FAN”, 두란노,p,119.)

목회 현장에서 내게 주신 하나님의 가장 큰 위로는 두 가지임을 저 또한 절절하게 느낍니다.

이 목사야내가 너와 함께 한다그리고 또 하나이 목사야내가 네 안에 있다.”입니다.

목회를 계속할 것인가아니면 로브를 벗어야 하는 것일까의 절체절명의 시기에 주님이 제게 오셔서 주신 위로는 이것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8:10절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존 스토트 목사는 이렇게 갈파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고난으로 초청하시는 이유는 누구나 맛 볼 수 없는 영광에 참여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존 스토트, “온전한 그리스도인”, IVP, pp,46-47.)

저는 존 스토트의 이 선포가 얼마나 위로가 되었는지 모릅니다.

명심하십시다.

하갈에게 찾아오셔서 그녀와 대화하셨던 주님은 마른 장작나무와 화석같이 침묵하는 비인격적인 분이 아니라 하갈의 말을 들으시고 그녀를 위로하신 인격적인 하나님이셨음을.

 

이제 우리는 본문을 통해 주시는 마지막 세 번째의 레마를 찾기 위해 다시 여행을 떠나보십시다.

하나님께서는 하갈에게 오셔서 여주인 사래에게로 돌아갈 것을 명하셨습니다.

주지했듯이 득남을 약속하셨고그 아들의 후손들이 많아질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더불어 하나님은 낳게 될 아들의 미래가 긍정 반부정 반의 미래가 될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본문 12절입니다.

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 같이 되리니 그의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지며 그가 모든 형제와 대항해서 살리라 하니라

전반절은 후손들이 용감하고 강한 민족이 될 것이라는 긍정의 예고를 하신 것입니다.

반면 하반절은 아브람의 적자인 이삭의 후손인 이스라엘이라는 배가 다른 형제의 후손들과 치열하게 싸우는 후손들이 될 것이라는 부정적이고 비극적인 예고를 숨김없이 예언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이 예고하심이 오늘 2022년까지 어떻게 현장에서 실현되고 있는지를 여지없이 눈으로 보고 있습니다.

상황이 어떻든 제가 설교의 마지막 레마로 추출하고 싶은 것은 본문 13-14절에 있습니다.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 이러므로 그 샘을 브엘라해로이라 불렀으며 그것은 가데스와 베렛 사이에 있더라

하갈이 술 광야 샘 곁에서 하나님을 만났다고 창세기 기자는 보고하면서 그녀의 토로를 삽입했습니다.

그 샘의 이름을 브엘라해로이라고 불렀다고 종결합니다.

이 단어를 번역하면 로이 지파에 속한 우물이라는 문자적인 의미와 더불어 나를 지켜보시는 살아계신 자의 우물이라는 뜻이라고 송병현 교수는 주석합니다.” (송병현, “엑스포지멘터리 창세기 주석” 국제제자훈련원,p,315.)

 

3) 하나님은 우리를 살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너무 잘 아는 시인의 고백을 여기서 들쳐 내보십시다.

시편 121편을 낭독하겠습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이 시는 대체적으로 3대 절기를 지키기 위해 성지순례 차 예루살렘에 올라오는 자들이 성전에 올라가며 부르는 찬송시로 유명합니다.

존 스토트는 이 시를 해석하는 책에서 의미 있는 글을 남겨 놓았습니다.

시인은 이 시에서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수호자로 소개한다이스라엘을 지키시는 하나님은 세계를 지으신 전능하신 권능과 물샐틈없이 지켜보시는 하나님이라는 믿음의 근거가 된다.”

(존 스토트, “내가 사랑한 시편”, 포이에마, p,197.)

지금 낭독했지만 시편 121편에는 지키신다라는 히브리어 단어 샤마르가 무려 6번에 걸쳐 등장합니다.

그러니 존 스토트의 말이 적절하다는 생각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물샐틈없이 지켜보시는 하나님

저는 성경의 내증 중에 살피시는 하나님이라는 테제를 갖고 나눌 때마다 정말로 빼놓을 수 없는 텍스트가 생각나는 데 에스더 6:1절입니다.

그 날 밤에 왕이 잠이 오지 아니하므로 명령하여 역대 일기를 가져다가 자기 앞에서 읽히더니

하만이 모르드개를 비롯하여 수산성에 거하는 유다 백성들을 전멸하기 위한 마지막 통로인 왕의 윤허를 받기 위해 입궐을 이른 새벽에 했다고 에스더를 기록한 역사가는 보고합니다.

자기에게 절하지 않는 모르드개를 50 규빗이 되는 장대에 매달아 죽게 하기 위한 윤허를 받기 위해 잠을 설치고 아주 이른 새벽에 왕궁으로 입궐한 것입니다.

하만이 입궐한 그날 밤 이상하게도 아하수에로 왕이 잠이 오지를 않았습니다.

잠이 오지 않는 아하수에로는 왕궁 내시에게 역대 일기를 가져올 것을 명령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글을 읽기 시작을 합니다.

왕이 읽은 일기에는 불과 5년 전에 있었던 자신을 모살하려던 반역의 일기가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 날 밤에는 5년 전에 전혀 관심을 갖지 않았던 하나의 일이 왕에게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모반 계획을 알려주었던 모르드개에 대한 대우에 관한 일이었습니다.

적어도 반역의 무리를 일망타진하게 도와준 모르드개를 어떻게 대접했는지에 대하여 왕이 궁금해진 것입니다.

당시에는 전혀 관심을 갖지 않았던 부분을 에스더 6장의 바로 그 긴박한 상황에 왕이 관심을 가졌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5년 전의 일을 왕이 신하에게 물어보니 아무런 대우도 하지 않았음을 알게 된 아하수에로는 드디어 자신에게 있어서 어찌 보면 생명의 은인이라고 할 수 있는 모르드개에게 늦었지만 상을 내리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잠을 자지 못하고 날을 센 아하수에로는 자신의 일을 긴급하게 시행하기 위해 마침 어전에 일찍 입궐해 있었던 하만을 부릅니다.

그리고 그에게 5년 전의 일을 상기시키면서 모르드개에게 상을 주어야 하겠다고 선언을 한 것이 아주 의외의 말을 하만에게 던집니다.

그 내용의 전말이 에스더 6:6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만이 들어오거늘 왕이 묻되 왕이 존귀하게 하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하여야 하겠느냐 하만이 심중에 이르되 왕이 존귀하게 하기를 원하시는 자는 나 외에 누구리요 하고"

나를 존귀하게 한 사람이 있으면 그에게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느냐를 하만에게 질문한 것입니다.

이 질문을 받은 하만은 왕을 존귀하게 한 자가 본인이라고 확신하고 또 다른 최고의 영예와 권력을 탐하며 다음과 같이 진언을 합니다.

이어지는 에스더 6:7-9절을 주목하십시다.

"왕께 아뢰되 왕께서 사람을 존귀하게 하시려면 왕께서 입으시는 왕복과 왕께서 타시는 말과 머리에 쓰시는 왕관을 가져다가 그 왕복과 말을 왕의 신하 중 가장 존귀한 자의 손에 맡겨서 왕이 존귀하게 하시기를 원하시는 사람에게 옷을 입히고 말을 태워서 성 중 거리로 다니며 그 앞에서 반포하여 이르기를 왕이 존귀하게 하기를 원하시는 사람에게는 이같이 할 것이라 하게 하소서 하니라"

무슨 말입니까?

① 왕께서 입으시는 왕복과 왕께서 타시는 말과 머리에 쓰는 왕관을 가져다가 왕을 존귀하게 한 사람에게 입히시고 태우라는 것입니다.

② 그렇게 한 뒤에 그를 바사 성 중 거리로 다니게 하시면서 앞으로 왕을 존귀하게 하는 자들에게 이렇게 할 것임을 공포하라는 것입니다.

하만이 이렇게 아주 구체적으로 방법론을 제시한 이유는 본인이 그 말을 탈 것이며그 옷을 입게 될 것임을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바로 이 목적으로 왕에게 그렇게 직언한 것입니다.

그런데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에스더 6:10절은 압권이며 백미입니다.

"이에 왕이 하만에게 이르되 너는 네 말대로 속히 왕복과 말을 가져다가 대궐 문에 앉은 유다 사람 모르드개에게 행하되 무릇 네가 말한 것에서 조금도 빠짐이 없이 하라"

하만은 귀를 의심했습니다.

지금 자신이 말한 그 놀라운 영광을 받을 것을 기대하며 직언한 내용이 적용되는 당사자가 자신이 완벽하게 죽일 것을 계획하고 이제는 왕의 윤허만을 남겨놓은 모르드개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아하수에로는 하만에게 분명한 메시지를 전하였습니다.

네가 말한 그 방법을 하나도 빠짐이 없이 그리고 빈틈이 없이 모르드개에게 행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왕의 엄명이 떨어진 이후 하만은 더 이상 다른 방법을 모색하거나 항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고 울며 겨자 먹기로 그렇게도 죽이고 싶었던 모르드개를 불러 엄청난 영광을 받게 해 주는 기기 막힌 일을 행하게 됩니다.

이렇게 정말로 믿지 못할 만한 수모를 당한 하만은 그 날 저녁 집으로 돌아와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괴로워하는 장면을 에스더 기자가 아주 문학적으로 묘사를 하고 있습니다.

에스더 6:12절을 마지막으로 보겠습니다.

"모르드개는 다시 대궐 문으로 돌아오고 하만은 번뇌하여 머리를 싸고 급히 집으로 돌아가서"

이 구절에서 기록한 '번뇌하여'의 히브리어 아벨은 '땅을 치며 통곡하며 아파하는 것슬퍼하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우리가 너무 잘 아는 것처럼 이 사건을 기점으로 하만과 모르드개의 상황이 역전되어 하만이 모르드개를 죽이기 위해 만든 50규빗의 장대에 매달려 죽게 되는 극적인 역전승을 유다 백성들이 거두게 됨을 에스더 역사서가 보고합니다.

제가 오늘 설교를 마무리하면서 에스더에 나오는 부림절의 근거가 되는 사건의 일부를 소개한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을 세밀하게 살피십니다.

이 땅에 존재하는 일체의 피조물들을 동원하여 당신의 백성들을 살펴 주십니다.

그러므로 하갈이 있었던 술 광야 옆 샘만이 브엘라해로이가 아닙니다.

오늘 내가 발을 딛고 있는 현장 모두가 브엘라헤로이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살피시는 현장 말입니다.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찾아와 주시는 곳나를 위로해 주시는 곳그리고 나를 살펴주시는 곳 모두가 나의 브엘라해로이입니다.

나는 날마다 우리 교우들이 발을 디디는 곳에서 브엘라해로이의 기적을 맛보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담임목사는 세인 교회 강단이 브엘라해로이가 되기를 소망하고여러분은 현장이 브엘라해로이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하나님께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은 너를 만드신 분

너를 가장 많이 알고 계시며

하나님은 너를 만드신 분

너를 가장 깊이 이해하신단다

 

하나님은 너를 지키시는 분

너를 절대 포기하지 않으며

하나님은 너를 지키시는 분

너를 쉬지 않고 지켜보신단다

 

그의 생각 셀 수 없고 그의 자비 무궁하며

그의 성실 날마다 새롭고 그의 사랑 끝이 없단다

 

하나님은 너를 원하시는 분

이 세상 그 무엇 그 누구보다

하나님은 너를 원하시는 분

너와 같이 있고 싶어하신단다

 

하나님은 너를 인도하는 분

광야에서도 폭풍 중에도

하나님은 너를 인도하는 분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신단다

 

그의 생각 셀 수 없고 그의 자비 무궁하며

그의 성실 날마다 새롭고 그의 사랑 끝이 없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