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창세기 15:6-21
제목: 계약이 성사되었습니다.
성경 66권을 둘로 나눕니다.
앞에 나오는 39권을 구약성경이라고 지칭하고, 뒤에 나오는 27권을 신약성경이라고 칭합니다.
이때 구약과 신약이라고 말하는 약(約)이라는 단어는 ‘묶는다’는 의미의 ‘約’자입니다.
우리가 흔히 쓰는 단어인 약속한다고 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내가 누군가 상대방과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는 것은 그 약속 시간만큼은 약속한 그 상대방에게 시간이 묶여 있다는 의미입니다.
상대방과 약속 시간을 정했는데도 만에 하나 그 상대방에게 약속을 어겼다면 그것은 곧 상대방에게 묶이기로 했던 시간을 빼앗은 것과 진배없는 일입니다.
이런 이유로 인해 약속은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주 수요일 설교에 아브람이 하나님께 불만 섞인 토로를 했음을 살폈습니다.
15:2절을 복기해 보십시다.
“아브람이 이르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
갈대아 우르에서 살던 아브람에게 하나님이 오셔서 그를 부르실 때의 나이가 75세였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면 네 자손이 많아지게 될 것이고, 네 후손들이 복을 받게 될 것임을 천명하셨습니다.
그런 약속을 믿고 가나안에 올라온 이후 1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16장을 연구할 때 살피겠지만 아브람이 사라가 잉태하지 못해 그녀의 몸종이었던 하갈과 동침하여 이스마엘을 낳은 시기를 이렇게 창세기 기자가 보고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16:3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그 여종 애굽 사람 하갈을 데려다가 그 남편 아브람에게 첩으로 준 때는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거주한 지 십 년 후였더라”
아브람의 나이가 이제 85세가 되었을 때입니다.
창세기 25:7절에 근거하여 우리가 이미 아는 것처럼 아브람이 누린 나이는 175세였습니다.
그의 향유 나이가 175세였을 때 85세 라고 하면 청춘의 나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감성적인 접근일 뿐 85세라는 나이는 신체적으로나 생리학적으로 볼 때 그때나 지금이나 적은 나이가 아니었습니다.
아브람의 나이가 99세, 사라의 나라가 89세가 되는 해에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오셔서 이제 때가 되어 아들을 낳을 것임을 고지하십니다.
이때 사라의 반응이 어땠습니까?
창세기 18:11-12절을 이렇게 보고합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나이가 많아 늙었고 사라에게는 여성의 생리가 끊어졌는지라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
아브람의 나이 85세 되던 해에 주님이 오셔서 네 자손들을 많게 하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성취가 정말로 가능할 것인가에 대한 통상적인 동의를 아브람이 하기가 무척이나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사회 통념상 도무지 일어날 수 없는 일을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는데 아브람이 반응한 내용이 대단히 의미가 있습니다.
먼저 교우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본문 6절입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이 구절은 대단히 짧은 구절이지만 신약성경에서 말하는 칭의(justification) 즉 ‘의롭다고 인정받음’이라는 교리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 너무 중요한 성서적 자료입니다.
바울이 로마 교회에 편지한 로마서 4:3절을 소개하겠습니다.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일반적으로 기독교가 교리 전면에 내세우는 구원받음의 조건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받음을 조건의 일 순위로 제시합니다.
물러설 수 없는 교리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오늘 본문 6절에 기록된 메시지는 대단한 의미를 부여합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과학적으로 도무지 일어날 수 없는 아들 탄생이라는 고지를 아브람이 믿었다고 본문은 말하고 있는데 창세기 기자는 이 믿음을 근거로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의롭다고 인정하셨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동시에 이렇게 의롭다고 인정하신 아브람과 하나님께서 계약을 맺는 장면이 본문에 등장합니다.
본문 7-8절을 보겠습니다.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소유를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이끌어낸 여호와니라 그가 이르되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을 소유로 받을 것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그를 불러낸 주체이심을 재확인을 하십니다.
그러자 아브람은 하나님께 가나안으로 들어와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자신에게 이 땅이 정말로 내가 거주하며 하나님이 여러 차례 말씀하신 언약의 땅이라면 그 증거를 보여 달라고 요구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의 이 청을 들으신 뒤에 드디어 소위 말하는 일방 계약을 맺으시는 시도를 하십니다.
이어지는 본문 9-11절을 나누겠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삼 년 된 암소와 삼 년 된 암염소와 삼 년 된 숫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가져올지니라 아브람이 그 모든 것을 가져다가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그 새는 쪼개지 아니하였으며 솔개가 그 사체 위에 내릴 때에는 아브람이 쫓았더라”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명하셨습니다.
삼 년 된 암소와 삼 년 된 암염소와 삼 년 된 숫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가져오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람은 순종하여 이 동물들을 가져옵니다.
가져온 동물들을 죽여 그 사체를 둘로 나누어 서로 마주 보게 세워놓습니다.
고대 팔레스타인 지역에 계약을 위한 방법론 중의 하나가 이런 시도였습니다.
쪼개진 사체 사이를 갑과 을이 같이 지나가는 것입니다.
만에 하나 이 약속을 어기면 어기는 자가 이 사체처럼 될 것이라는 살벌한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방법이었습니다.
이후 동물들이 죽어 사체가 되자 독수리와 같은 맹금류들이 그 사체를 노리기 위해 배회하는 것을 본 아브람은 맹금류들의 접근을 막았다고 본문 11절이 보고합니다.
계약 설정을 위한 스탠바이가 이루어지자 하나님은 드디어 계약의 행위를 아브람과 나누십니다.
제일 먼저 하나님이 행하신 일은 하나님은 아브람을 깊이 잠들게 하시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환상을 보여줍니다.
13-16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가득 차지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이 구절에 대한 함의를 세 가지로 요약합니다.
⓵ 이방인이 객이 되어 400년 동안 노예로 살 것임을 예고한 것입니다.
⓶ 아브람은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게 될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⓷ 아브람의 자손들은 4대 만에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오게 될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람에게 이렇게 환상 중에 메시지를 주신 하나님은 결정적인 계약 체결 의식을 진행합니다.
본문 17-21절 마지막 부분입니다.
“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연기 나는 화로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과 더불어 언약을 세워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 곧 겐 족속과 그니스 족속과 갓몬 족속과 헷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르바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여부스 족속의 땅이니라 하셨더라”
앞에서 잠시 언급했듯이 고대 근동의 언약 체결법 중의 하나는 죽인 동물의 사체를 반으로 쪼개 서로 마주 보게 한 뒤에 계약 당사자가 그 사체 사이를 서로가 지나가는 행위를 합니다.
물론 오늘 본문의 계약 의식은 소위 말하는 일방 계약 (아브람, 다윗과 맺은 계약을 종적 언약 즉 일방 계약이라고 하고 모세와 맺은 계약을 쌍방 계약 즉 횡적 언약이라고 함)이기에 하나님만 횃불의 형태로 그사이를 지나갑니다.
이런 의식을 진행하신 하나님은 가나안에 살고 있는 10 족속을 400년 만에 돌아온 아브람의 후손들이 쫓아내고 그 땅을 차지하게 될 것임을 표증으로 말씀합니다.
이상이 아브람과 일방적으로 맺으신 하나님의 종적 계약식을 말해 주는 본문 텍스트 이해입니다.
주석 하나를 교우들에게 소개합니다.
“꿈속에서 주어지는 메시지의 형태를 가진 이 신학적 진술은 세 가지의 중요한 주장을 담고 있다. ⓐ 약속은 반드시 지켜질 것이다. ⓑ 여러 가지 역사적인 이유들로 인하여 약속은 지연 될 것이다. ⓒ 약속을 가장 먼저 받은 아브람은 약속의 지연에 대하여 염려할 필요는 없다. 그로서는 약속이 계속해서 다음 세대로 이어진다는 사실만 확신하기만 하면 충분하다. 그는 확신을 가지고 자신의 노년과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월터 브루그만, “현대성서주석-창세기,pp,236-237.)
브루그만이 말하고자 했던 신학적 성찰이 무엇이었을까요?
저는 이 질문의 답을 오늘 설교의 레마로 삼고 싶습니다.
※ 믿음이란 기다림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아브람은 당대에 자손이 많아지는 것을 보지 못하고 죽을 것임을 하나님이 시사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아브람과 맺은 계약이 파기된 것입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아브람이 죽은 이후에도 진행되었습니다.
약속하신 그대로 요셉 시대에 이스라엘은 이집트에 내려갔던 것이 기화가 되어 430년간 종살이를 했습니다.
하지만 때가 되자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셔서 출애굽의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이어 모세의 대에 이루지 못한 가나안 정착을 여호수아를 통해 계속 진행하셨습니다.
이 과정 중에 본문에 예고된 그대로 가나안 거민들을 쫓아내고 가나안 정착에 성공합니다.
간과해서는 안 되는 일은 바로 본문에서 하나님이 아브람이 요구하는 요청에 대한 증표를 준 계약의 결과물이 아브람 후대를 통해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갔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아브람과의 관계를 통해서 정말로 주목해야 하는 은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하심이 내 대에서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결코 좌절하거나 실망하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아브람과 하나님이 맺은 계약은 아브람 대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의 후손 대대를 통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이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인해 성경은 곧잘 이런 표현을 우리에게 줍니다.
대표적인 구절입니다.
마가복음 12:26절입니다.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을 말할진대 너희가 모세의 책 중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이삭의 하나님이시고, 이삭의 하나님은 야곱의 하나님이시며, 야곱의 하나님은 오늘 나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계대로 하나님의 약속이 신실하게 지속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본문이 주는 영적 시사점이 무엇이겠습니까?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복의 승계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계승한 자들에게 지속해서 이어지고 있다는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내 소원이 내 代에서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내 대가 아니면 나의 다음 세대에서 나에게 약속하신 복의 계약을 이루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승부는 끝나지 않습니다.
여전히 유효하며 진행형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전제할 때 이렇게 단언해도 괜찮습니다.
믿음이란 기다림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는 것이라고.
오늘 본문은 아브람의 나이 85세가 되는 해에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맺으신 계약이자 언약입니다.
이미 아시는 교우들은 주지하다시피 이 계약식이 진행되고 난 뒤에도 하나님은 당신의 약속을 금방 이루시지 않았습니다.
이후로도 15년이 지난 후에야 아브람에게 이삭을 허락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식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우리가 믿음을 갖고 하나님께서 당신의 약속을 반드시 이루실 것을 확신하며 든든히 그 약속을 붙드는 신실한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재철 목사께서 쓰신 책 안에 담겨 있는 글 하나 소개하고 설교를 맺겠습니다. (이재철, ”청년아, 울더라도 뿌려야 한다.“, 홍성사, p,45.)
가톨릭 시인인 구상 선생님과 몇몇 사람들이 앉아서 식사를 할 때였습니다. 한 사람이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선생님, 정말 세상이 온통 어둡습니다. 온통 흙탕물입니다. 이럴 때 크리스천들은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구상 선생이 대답했습니다.
”크리스천들은 맑은 물을 계속해서 흘려보내야 합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또 물었습니다.
”선생님, 온 세상이 흙탕물인데 크리스천이 맑은 물 몇 방울을 흘려보낸다고 이 세상이 맑아지겠습니까?“
이 반론에 대하여 구상 선생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래도 크리스천들은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구상 선생님의 고집입니까?
우격다짐식의 아집입니까?
그럴 리가 있습니까?
구상 선생의 마음을 저는 분명히 압니다.
그렇게 행하는 삶의 연속을 통하여 하나님이 그들을 통해 일하실 것을 믿었기 때문에 영혼 맑은 시인은 그렇게 답한 것입니다.
같은 맥락으로 바울도 믿음이라는 것이 눈에 보이는 확실한 그 무언가를 붙드는 것이 아니라 현재는 보이지 않아도 반드시 하나님이 일하심으로 나를 통해 이루실 것임을 알았기에 이렇게 선언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히브리서 11:1-2절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그리고 또 이렇게 말입니다.
고린도후서 4:18절입니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아브람과 계약을 맺으신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와 계약을 맺으십니다.
나는 네가 믿음의 자녀로 살아가라. 너와 네 후손에게 복의 복을 줄 것이라고 말하시며 계약을 맺고 계십니다.
이 신실한 약속을 믿고 기다리는 믿음으로 승리하는 교우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