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느헤미야 9:7-8
제목: 어떻게 찬양하지 않을 수 있나! (2)
서론)
이정하 시인의 시어 한 편 읽겠습니다.
“그리움이란 멀리 있는 너를 찾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 남아 있는 너를 찾는 일이다.”(이정하, 『사랑해서 외로웠다.』, 자음과 모음, 83쪽)
대학원 시절, 유대인 철학자 마틴 부버의 걸작인 ‘나와 너’를 일고 열광한 때가 있었습니다.
부버의 말을 들어보십시다.
“‘너’라고 말할 때 짝말 ‘나-너’의 나도 함께 말해진다. ‘나’ 그 자체란 없으며 오직 근원어인 ‘나-너’의 나만 있을 뿐이다.”(마틴 부버, 『나와 너』, 문예출판사, 8쪽)
이 말이 목사로 살아가는 나에게 도발이 되었고, 도전이 되었습니다.
결국 ‘너’없는 ‘나’는 없고 ‘나’와 ‘너’‘는 관계로 하나라는 말이었기 때문입니다.
성숙한 인간이 추구하는 것이 무엇일까?
부버와 시인의 말대로 나와 너를 찾는 일일 것입니다.
하지만 나와 너를 찾는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혹여 내가 나를 찾았다고 말할 때, 그것이 진짜 ‘나’인가를 되새기면 껍데기일 가능성이 훨씬 많기 때문입니다.
나는 나에 대해 정확하게 진단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나는 나에 대해 매우 너그럽게 평가하려는 본능이 내 마음 깊은 곳에 똬리를 틀고 앉아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교리 중에 인간론을 다루려면 반드시 언급해야 하는 교리가 하나 있습니다.
이 교리는 예정론에 입각한 교리를 기초하고 있는 개혁교회나 그 반대편에 있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는 교단이나 예외가 없이 뜻을 같이 하는 교리입니다.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했다는 교리입니다.
그러므로 인간 스스로 그 타락에서 주체적으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 바로 ‘전적 타락’이라는 교리입니다.
성경은 이 교리적인 내용에 대해 적극적으로 지지합니다.
수없이 많지만 두 구절만 소개합니다.
창세기 8:21절 하반절을 봅니다.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다시 멸하지 아니하리니”
로마서 7:18절을 읽겠습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가톨릭계에서 그리 흔치 않은 치유 사역자인 프란시스 맥너트는 일찍이 이렇게 논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도 부서진 바이올린으로는 연주하실 수 없다.” (프란시스 맥너트, 『치유』, 91쪽)
바로 이 문장, 부서진 바이올린 같은 존재가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인 인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저는 바로 이 관점에서 오늘 주일 설교를 시작해 보려고 합니다.
본론)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 그래서 부서진 바이올린 같은 존재이며 스스로 부패했기에 그 부패에서 스스로 도저히 벗어나지 못할 존재가 인간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하나님의 입장에서 볼 때 구제불능의 존재입니다.
그런데 그런 타락한 인간의 대표성이라고 할 수 있는 아브람을 찾아오신 하나님은 그의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개명해주었습니다.
왜 그의 이름을 개명해 주었다고 했습니까?
그로 하여금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구속사의 도구로 사용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자연인 아브라함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은 구제불능 한 인간임에 틀림없었지만, 그를 부르셔서 당신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그를 만드시고 조각해 주셨다고 했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인간이 야훼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 당위이며 이유였음을 우리는 지난 주일 설교를 통해 나누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아브라함을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살피면 하나님은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만드시고 조각하시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으시고 한 발 더 나아가셨음을 알게 됩니다.
그 근거가 오늘 읽은 본문 8절입니다.
“그의 마음이 주 앞에서 충성됨을 보시고 그와 더불어 언약을 세우사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여부스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의 땅을 그의 씨에게 주리라 하시더니 그 말씀대로 이루셨사오매 주는 의로우심이로소이다”
본문 8절은 창세기 15:18-21절을 염두 해 둔 느헤미야 기자의 회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야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75세 되는 해에 갈대아우르로 가셔서 내가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고 첫 번째 말씀하셨고, 이후 가나안이 아닌 하란에 정착한 아브라함에게 미련을 못 버리시고 다시 나타나셔서 내가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고 두 번째 명령하셨고, 그 결과 아브라함은 마지못해 하란을 떠나 가나안으로 들어갔음을 지난 주일 설교에서, 더불어 수요일 예배에서 살피는 창세기 강해를 진행할 때 나누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지시하는 땅으로 들어가면 받게 될 복으로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창세기 12:2절입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이런 약속을 받은 아브라함은 우여곡절 끝에 가나안에 들어가 10년이라는 세월을 보냅니다.
문제는 그 십년 동안 하나님이 약속하셨던 징후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아브라함의 가계를 통해 이루게 될 것이라고 약속했던 큰 민족은 고사하고 아브라함에게는 자신의 대를 이을 아들 한 명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내용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리고 늙은 몸종 엘리에셀을 후사로 생각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지 않고 있는 85세의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다시 찾아 가셔셔 창세기 15장에서 언약 체결식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명하셔서 삼 년 된 암소와 삼 년 된 암염소와 삼 년 된 숫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가져오라고 명하십니다.
아브람이 순종하여 이 동물들을 가져오자 가져온 동물들을 죽여 그 사체를 둘로 나누어 서로 마주 보게 세워놓으신 하나님은 고대 팔레스타인 지역에 계약식의 방법처럼 쪼개진 사체 사이를 지나가십니다.
창세기 15:17-21절은 이렇게 보고합니다.
“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연기 나는 화로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과 더불어 언약을 세워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 곧 겐 족속과 그니스 족속과 갓몬 족속과 헷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르바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여부스 족속의 땅이니라 하셨더라”
오늘 본문 8절은 바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면서 선언하셨던 내용을 다시 기록한 것입니다.
“그의 마음이 주 앞에서 충성됨을 보시고 그와 더불어 언약을 세우사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여부스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의 땅을 그의 씨에게 주리라 하시더니 그 말씀대로 이루셨사오매 주는 의로우심이로소이다”
느헤미야가 무엇을 이스라엘 신앙공동체에게 복기시키고 있습니까?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약속, 그 약속은 지금도 유효하다는 것을 각인시키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의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⓵ 노아에게 행하신 언약: 내가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않겠다. (창 9:9-17)
⓶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 땅과 후손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어 주겠다. (창 15,17장)
⓷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 공동체와 맺은 언약: 야훼는 이스라엘의 하나인 하나님이 되고, 이스라엘은 하나 뿐인 나의 백성이다. (출 24:1-11)
⓸ 다윗과 맺은 언약: 다윗의 나라가 영원하며, 견고하게 할 것이다. (삼하 7장)
결국,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을 종합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이스라엘을 책임지는 하나님이다.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언약, 즉 약속은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끝까지 책임지시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본문 8절에 기록된 메시지를 근거하여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 5번째의 이유를 알게 됩니다.
※ 야훼 하나님은 나와 당신을 책임지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그 약속을 하나님은 여호수아 시대에 부분적이기는 하지만 성취 시켜주셨습니다.
이후 다윗의 시대에는 아브라함에게 너와 네 자손들에게 가나안을 줄 것이라는 약속을 온전하게 이루셨습니다.
하지만 다윗의 시대가 저물고 솔로몬을 거쳐 이스라엘은 양분되었고, 결국 아브라함에게 약속해 주었던 가나안 땅에 살고 있었던 이스라엘과 유다는 멸망당하는 비운을 맛봅니다.
한편으로 보면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다윗에게 주어진 언약이 깨진 것이 아니냐는 질문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이스라엘은 부서졌습니다.
남쪽도 북쪽도 지도상에서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인 느헤미야 9장은 다시 포로지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귀환 백성들의 귀향 담론들을 여지없이 보고해 주는 메시지인데 본문에서 귀향한 지도자들과 백성들은 선조들에게 야훼 하나님께서 행하셨던 일들을 추적하며 그 일로 인해 야훼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포로 귀환 공동체 백성들은 자신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성전을 건축하고 다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는 것 자체가 아브라함에 약속하신 언약의 성취라고 확신하며 자신들을 책임져주시는 하나님을 마음껏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귀환 공동체의 찬양의 이유를 조금만 더 확장해보겠습니다.
야훼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을 책임지신 것처럼 2023년 세인 공동체의 지체들을 당신의 나라가 이루어지기까지 선하게 사용하시기 위해 역시 책임지고 계심을 믿고 우리도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신앙공동체를 시내 산까지 인도하셨습니다.
모세로 하여금 열 가지의 계명을 받게 하셔서 가나안에 들어가게 될 이스라엘 신앙공동체 지체들이 지켜야 할 영적인 율례 즉 율법으로 삼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지켜야 할 율례만을 공동체에게 주신 것 아니라 이렇게 약속도 첨부하십니다.
출애굽기 23:2-23절을 읽겠습니다.
“내가 사자를 네 앞서 보내어 길에서 너를 보호하여 너를 내가 예비한 곳에 이르게 하리니 너희는 삼가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고 그를 노엽게 하지 말라 그가 너희의 허물을 용서하지 아니할 것은 내 이름이 그에게 있음이니라 네가 그의 목소리를 잘 청종하고 내 모든 말대로 행하면 내가 네 원수에게 원수가 되고 네 대적에게 대적이 될지라 내 사자가 네 앞서 가서 너를 아모리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가나안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에게로 인도하고 나는 그들을 끊으리니”
왜 하나님께서 사자를 이스라엘보다 앞서 보내십니까?
당신이 약속하신 내용을 책임지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사사기를 시작하는 사사기 1:1-2절은 대단히 중요한 구절입니다.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여쭈어 이르되 우리 가운데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족속과 싸우리이까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유다가 올라갈지니라 보라 내가 이 땅을 그의 손에 넘겨주었노라 하시니라”
여호수아가 죽은 뒤에 시작된 사사시대의 질문은 누가 먼저 가나안으로 올라가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질문하는 이스라엘 공동체를 향하여 확신하도록 격려하시고 응원한 답이 이것이었습니다.
“올라가라, 내가 그들을 너희들에게 넘겨줄 것이다.”
열조와 여호수아에게 약속하신 것에 대해 책임지시겠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대단히 불행하게도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사사시대의 재앙이었습니다.
약속을 믿지 않은 불신앙이 사사시대의 아픔이었습니다.
영어숙어 중에 누군가를 책임진다는 표현을 할 때 이렇게 표현합니다.
“be responsible for”
고등학교 시절 영어선생님이 이 단어를 설명하시면서 이렇게 가르쳐주셨습니다.
“이 숙어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전치사 ‘for’임을 잘 기억해라. 누군가를 책임진다는 것은 책임지는 그 사람을 위하는 일이기에 반드시 for’라는 전치사가 그 다음에 나온다.”
하나님이 나를 책임지시는 이유는 나를 위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을 위하시기에 나를 책임지시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하시기 때문에 나를 책임지시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언젠가 읽었던 정채봉 시인의 “너를 생각하는 것이 나의 일생이었지”를 음미해 보겠습니다. (윤동주외 『매일, 시 한 잔』, 북로그컴퍼니, 40쪽)
모래알 하나를 보고도/너를 생각했지/풀잎 하나를 보고도/너를 생각했지
너를 생각하게 하지 않는 것은/이 세상에 없어/너를 생각하는 것이/나의 일생이었지
시인의 시어를 읽다가 울컥했습니다.
과유불급이라고, 지나친 비약이라고 설교자인 저를 공격해도 오늘 설교를 마무리하면서는 이렇게 한 번 적용해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미치도록 나를 생각하고 있는 분이 있습니다.
유일하게 존재합니다.
바로 나를 책임지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나를 책임지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면 우리가 하나님께 해야 할 일이 하나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시편 기자의 한 텍스트로 답을 대신하겠습니다.
시편 147:1-4절에서 시인은 이렇게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우리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이 선함이여 찬송하는 일이 아름답고 마땅하도다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세우시며 이스라엘의 흩어진 자들을 모으시며 상심한 자들을 고치시며 그들의 상처를 싸매시는도다 그가 별들의 수효를 세시고 그것들을 다 이름대로 부르시는도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시분초마다 우리를 세우시고, 내가 상심할 때마다 고쳐주시고, 내가 내 힘으로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상처로 인해 아파하면 싸매주시며, 또 어느 때마다 내 이름을 잊어버리지 않고 불러주시며 나를 책임져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기를 소망합니다.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롬 5:6-8)
나를 위해 죽으신 주님은 나를 책임져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을 마땅히 찬양하는 것이 우리의 미션입니다.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왕이신 나의 하나님,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